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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자료실

작성자 한 빛
작성일 2003-06-24 (화)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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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되는 한미 갈등, 시민사회 네트워크로 풀자


미국은 한국을 네번째 배반할것인가?


심화되는 한미 갈등, 시민사회 네트워크로 풀자
한국에선 반미론, 미국에선 혐한론


미국은 한국을 세 번 배반했다.

1)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조선식민지배를 허락했다.

2) 소련과의 신탁통치로 한반도 분단을 용인했다.

3) 애치슨 선언은 한국전쟁의 원인이 됐다.


이제 미국은 네 번째 배반을 준비중인가. 껄끄러워진 한미관계의 해법은 어디에 있을까.

한반도는 아메리카의 일부인가. 항미(抗美)로 일관한 북한이 핵개발을 통해 용미(用美)의 몸짓을 하고 있다면, 친미(親美) 성향의 남한은 내부에서 반미(反美)의 혼돈기를 맞고 있다. 민족공조를 내세우며 봉남통미(封南通美)하는 북한이나 한미동맹에 의해 반북승공(反北勝共)해온 남한의 현실은 한반도의 운명이 미국의 세계전략에 깊은 영향을 받아왔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세계전략과 북한의 벼랑끝 전술 사이에서 한국, 한국의 시민사회가 한반도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개척할 방법은 없을까.




미국을 대하는 남북한의 입장과 이해는 완연히 다르지만, 미국 없는 남북한의 미래는 상상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록 남북통일이 기본적으로 민족 내부의 문제이긴 하지만, 한미관계의 기조와 변화에 따라 그 향방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 한미정상회담도 새 정부의 출범에 따른 의례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북핵 해법을 둘러싼 한미간 이견을 해소하고 남북관계의 기본방향을 조율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공동이해에 대한 원론적인 합의 이상을 도출하기 어려운 만남이었다.

최근 한미관계는 틈새가 벌어져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과거 국가 수준에서 일어났던 한국과 미국 사이의 이해 갈등이 시민사회 영역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한미갈등의 역사적·구조적 요인들을 찾아보고, 정부 차원이 아닌 시민사회 네트워크를 통한 대화와 교류의 방안을 알아본다.


미국을 짝사랑한 한국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다. 선린과 적대를 상대화시키는 것이 국익이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외정책에서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해 왔다. 첫째 자유와 인권, 둘째 경제적 이해, 셋째 군사적 이해가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한미관계는 이 삼중적 잣대에 의해 때로 협력했고 때로는 반목해왔다.

미국은 건국 이후부터 국가이익의 신장을 위해 세계적 차원의 군사, 정치, 경제, 문화 전략을 구상해왔다. 국제사회에 뒤늦게 참여한 신생국으로서 자기보호 본능에서 비롯된 세계전략은 국제질서 수호라는 메시아적 사명감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미국에서도 ‘유교적 제국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순종하는 나라엔 당근을 주지만 거역하는 나라엔 채찍을 휘두른다.

“미국을 무조건 우방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한 한국 최초의 미국유학생 유길준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가 되풀이되는 이유는 때때로 과거가 망각되기 때문이다. 120년 전 그의 경고는 현시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한반도는 동북아 세력관계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적 비중에 지나지 않는다. 지정학적 위치를 염두에 둔 미국의 정책에서 한국은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종속변수일 뿐이었다.

한미갈등은 개항, 식민지화, 분단의 세 단계로 대별되는 두 나라 사이의 오랜 관계의 역사 속에 잉태되었다. ‘개항’으로 시작된 한미관계는 사랑과 배신의 연속에 비유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에 대해 짝사랑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미국과 일본의 결탁에 의한 ‘한국 식민지화’나 미국과 러시아의 타협에 따른 ‘한반도 분단’이 말해주듯 미국의 배반에 다름 아니었다. 약소국 조선의 강자 미국에 대한 구애는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비대칭적인 한미관계

개화파 지식인들은 조선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패권다툼에 지친 나머지 미국을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켜줄 구세주로 여겼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제시된 ‘연미국(聯美國)론’이 좋은 보기다. 일본의 조선반도 침략과 러시아의 극동진출을 막으려면 중국과 친교하면서 미국과의 연합을 시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 주요 논지다. 이는 숭미(崇美)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1882년 조-미수호조약 체결이후 미국은 열강의 다툼에서 자국의 실리만을 챙기는 기회주의적 불간섭정책을 폈다. 갑신정변, 영국의 거문도 점령,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미국은 그야말로 대국답지 않게 군사적·경제적 이해만을 쫓는 처세를 보였다. 중·일·러 사이에 끼인 한국의 입지를 살려주는 대국의 면모를 찾기 어려웠다.



*****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조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지배를 용인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태평양의 전략적 요지 필리핀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미국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적대국이 되었다는 사실은 국제정치의 역설적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을 가져온 38선 획정과 그 이후 소련과 공모한 신탁통치안(案)에서 다시금 미국은 한국을 배반했다. 미국은 대소-대중 봉쇄와 일본방어의 일환으로 1945년 한국에 주둔했을 뿐이었다. 한반도는 미국에 있어 동북아질서 유지를 위한 일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은 미국에게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먹기에는 보잘것없는 계륵(鷄肋)에 비유됐다. 동북아에서 중국, 일본, 소련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특이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애치슨선언이 한국전쟁의 원인(遠因)을 제공했지만 그 결과로서 한국과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다시금 재회했다. 작금 뜨거운 감자가 된 주한미군의 존재도 그 조약의 산물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 할까. 미국이 한국에 막대한 군사·경제 원조를 하는 등 두 나라는 전쟁 이후 한동안 밀월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때도 두 나라는 안으로는 반목했다.

지난 역사에서 한미관계가 비대칭적이었음은 여러 가지 사실(史實)로 입증된다. 한국으로서는 혜택을 입었는가 하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오늘의 한미갈등은 지난날의 불평등 경험이 현재화한 것이다. 근래에 비밀해제된 미국의 여러 정부문서를 보면 한미관계가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 휴전을 둘러싸고 이승만 정권과 미국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휴전을 반대하기 위해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북진통일을 외쳤던 이승만은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기로 작정한 미국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주고 미군을 한반도에 주둔시키는 ‘양보’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이 한국군에 북진명령을 내릴 경우에 대비해 ‘에버레디 계획(Everready Plan)’이라는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을 수립했다. 이 비상계획의 골자는 유사시 이승만을 제거하고 한국군부로 하여금 정권을 장악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미국은 반공이라는 목표를 위해 ‘부산정치파동’도 묵인할 정도로 이승만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전쟁을 끝내려는 자국의 입장에 반대하여 통일을 외치자 여차하면 갈아치워야 할 애물단지로 생각을 바꾼 것이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자 재빨리 이승만을 버리고 자신들의 통제 아래 있던 한국군부로 하여금 데모대에 적대하지 않도록 조처한 것은 미국이 이미 수립된 비상계획에 맞춰 자국의 국익을 추구한 기민한 움직임에 다름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과 끊임없는 갈등

박정희 정권 시기에도 한미갈등이 증폭됐었다. 5·16 군사쿠데타는 한국군 통수권(?)을 지닌 미국의 불개입을 통한 ‘적극적 방관’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장면 정권 시기 주한미사령관인 매그루더는 미국 의회증언을 통하여 “한국은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군의 극히 일부만이 가담한 쿠데타를 사실상 방관한 것은 당시 미국이 한국에 민주정부보다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더 잘 부합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쿠데타 이후의 정치일정을 둘러싸고 박정희는 미국과 심각한 마찰을 빚었다. 쿠데타 정권이 미국과 사전 상의 없이 단행한 화폐개혁이나 경제개발계획에 미국은 반대했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민정이양을 둘러싼 대립은 또 다른 사례다. 박정희가 미국과 협의하지 않고 군정연장을 선언했을 때 미국은 한국에 경제제재를 가했다. 박정희가 끝내 미국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그를 다른 지도자로 갈아치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당시 미국문서는 보여준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정치적 반미’ 표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얼마나 극적으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문서는 많다. 1965년 당시 미 대통령안보담당보좌관이었던 로스토의 지시에 의해 한국관련 부서가 협력하여 작성한 ‘대한정책’ 문서와 1968년 1·21사태 이후 북한에 보복할 것을 주장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 특사로 내한한 밴스가 귀국 후 다시 작성한 ‘대한정책’ 문서를 비교해보면 미국의 시각변화를 읽을 수 있다. 후자의 문서는 박정희가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이제 호랑이가 된 것 같다고 진단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이승만 이후로는 감히 미국의 동의 없이 북한을 공격하고자 하는 남한 지도자가 없을 줄 알았는데 박정희가 북한에 대한 제한된 공격을 주장하자 미국이 대책마련에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상황은 자못 심각했다. 북한이 특수부대를 보내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사태에 대해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내세우며 한국이 어떠한 형태의 보복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바로 이틀 후 미국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호가 북한 근해에서 북한해군에 의해 납치되자 미국은 판문점에서 한국정부를 배제한 채 북한과 쌍무협상을 벌였다.

미국이 얼마나 철저하게 한국의 입장을 무시하고 자국의 이익과 위신만을 추구했는지는 판문점 도끼사건이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절단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심지어 오키나와 공군기지로부터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폭격기까지 불러들여 북한을 위협했다. 한국은 영문도 모른 채 미국의 대북 군사공세에 끌려들어갔던 셈이다.

1972년 유신체제 성립 이후 한미관계는 또다시 경색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의회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한국정부의 로비사건인 ‘박동선 사건’이나 한국내 민주화운동 탄압을 둘러싼 인도적 문제 등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그 내막은 훨씬 복잡하고 격렬했다. 미국이 “아시아는 아시아인의 손으로”라는 닉슨 독트린을 내세우며 베트남에서 철수하자 박정희 정권은 자주국방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자주국방의 일환으로 핵무기와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추진했다. 이 시기 미국의 비밀문서는 미국이 한국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미 사반세기 전 한국의 지도자가 미군철수와 미국의 핵우산 제거를 염려하여 독자적인 핵무기와 중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1961년의 5·16쿠데타나 1980년의 5·17쿠데타 당시 미국 군부는 일관되게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한국군부를 지지했다. 전자의 경우 우리 국민은 다소 의아한 심정으로 미국의 불개입을 통한 개입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달랐다. 전시도 아닌 평시에 자국 군대에 의한 국민학살을 지켜본 우리 국민은 한국에서 미군주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사실상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남한에 최초로 ‘정치적 반미’가 태동했던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전기로 반미는 배미(排美) 혹은 극미(克美) 차원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북한의 대남 공세도 한몫을 했지만, 당시는 학생집단과 노동자층을 중심으로 이른바 3민주의(민족·민주·민중)가 사회운동의 사상적 지표가 되었던 때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운동도 NL, PD, CA 등 다양한 분화를 겪으면서 반미에 초점이 모아졌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회세력이 결집하는 중대한 계기였다. 민주화 과정은 군사정권의 해체뿐만 아니라 극우반공주의에 찌든 냉전적 사고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 한미갈등은 경제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농산물 및 공산품에 대한 개방압력이 그것이다. 슈퍼201조라는 자국법으로 한국의 수출을 규제하려는 미국의 보호주의에 대해 ‘경제적 반미’가 등장했다. 그러나 작년 한국의 대통령선거 전후에 나타난 대대적인 대미항의는 다분히 ‘문화적 반미’의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반미의식이 시민사회로 확장됨을 의미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미국의 텃세로 금메달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젊은 세대들은 그 해 말 미군장갑차에 의한 두 여중생 치사사건 용의자에 대해 미 군사법정이 무죄판결을 내린 것을 계기로 분노를 터뜨렸다. 빈곤과 억압 아래 자란 기성세대들과 달리 이들은 촛불시위에서 볼 수 있듯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세대다. 월드컵 응원단 붉은악마에서 결집된 그들의 집합감정은 미국과 관련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한미갈등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한국은 남북한 상호교류를 통해 남북관계 안정과 통일을 추구하는 평화적 해법을 추구했다. 이와 달리 미국은 전쟁을 불사하더라도 군사력으로 북한을 길들이고자 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북 정책에서 과거엔 한국정부가 더 호전적이었고 미국이 대화와 화해를 한국정부에 요구했으나, 지금 그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점이다. 한미관계의 역사에서 미국이 이처럼 군사적 방법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미국은 구세주가 아니다

미국 부시 정권은 북한을 ‘불량국가’로 불신하고 있다. 남한이 김대중 정권아래 대북 햇볕정책을 간단없이 추진해오는 과정에서 부시 정권은 한국의 의도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어왔다. 미국은 김대중 정권이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불거진 대북 뒷거래 의혹과 관련, 한국을 의심하고 있다. 미국은 햇볕정책이 핵 개발에서 보듯 전체주의 북한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켜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워싱턴 정책서클에서 ‘혐한(嫌韓)론’이 나오는 배경이다. 노무현 새 정부에 대한 부시 정권의 ‘좌심(左心) 판정(?)’도 바로 이 ‘혐한’에 기인한다.

한국인은 계층에 따라 미국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한미관계에서 혜택을 입고 그것을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나가기를 바라는 국민이 있는가 하면 저간의 한미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국민도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한국인이다. 민주화 시대의 한국정부는 누가 지도자가 되건 이러한 여러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한미관계에 명암이 있듯이 우리는 과거를 장밋빛으로 미화하거나 미래를 잿빛으로 투시할 필요는 없다. 한미관계에서 신화를 대신해야 할 것은 현실이지 또 다른 동화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을 일방적인 걸림돌로 여기는 민족공조나 미국을 무조건적인 디딤돌로 보는 한미공조는 똑같이 논리의 비약에 의한 현실 왜곡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미국은 구세주가 아니다. 미국도 하나의 국가이다. 그러나 초강대국이다. 이제는 지구제국(global empire)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오랜 한미관계의 역사로 인해 우리는 미국을 잘 안다고 막연히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미국 하면 좋은 나라, 강한 나라, 부자 나라라는 관념이 일부 국민에게 심어져 있다. 미국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이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미국의 빛과 그림자를 저울질할 필요가 있다. 세계에서 자유와 평화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는 미국. 그러나 그 배후에 침탈과 정복의 어두운 면이 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이 미국으로 독립하기까지 프랑스, 스페인, 영국과의 전쟁이 있었다. 독립전쟁의 정당성은 그렇다 치고, 멕시코와의 전쟁은 오늘의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세 주가 말해주듯 땅 빼앗아먹기에 다름 아니었다.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기까지 백인들에 의해 수많은 인디언 원주민, 흑인 노예, 여러 소수 인종, 하층 계급, 제3세계의 민중이 희생됐다. 자유와 평등의 이상 아래 삼권분립, 연방주의, 지방자치가 보장된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대표적 나라’치곤 억압과 차별의 흔적이 매우 심하다. 건국 이래 미국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라는 큰 지향 아래 체제를 유지해왔다.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양당제도의 맥락에서 구현되고 있는 그러한 이념적 차이는 국내외 정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봉건주의와 사회주의의 전통이 없는 미국에서 자유주의나 보수주의는 통합적 이론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보수적 자유주의처럼 개인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인간복지보다 시장경제를 선호하는 자유방임적 분파도 있고, 진보적 자유주의와 같이 재산권보다 인간의 권리와 평등을 강조하는 민중적 입장도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활동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주장하는 전통적 보수주의의 유기체론적 시각도 있고, 자유적 보수주의처럼 다른 개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세속적 관점도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200년밖에 안 된 짧은 역사의 경험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좌우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확고한 노선과 강령을 갖고 있지 않다. 뉴딜을 부르짖은 루스벨트 대통령 시기에 민주당의 자유주의 정책이 만개했다면, 신보수주의의 효시인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공화당의 보수주의 정책이 개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서민의 정당=민주당, 상층 정당=공화당이라는 도식은 옛 일이다. 특히 대통령선거에서 두 정당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성, 인종, 종교, 지역, 계층의 차이 없이 다양한 정책을 내거는 중도 통합적(catch-all)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국 20대 64%가 反美

그러나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확연히 다르다. 민주당이 군비확장에 주저하는 데 비해 공화당은 강한 군사력에 의한 세계경찰의 역할을 자처한다. 그 중에서도 부시 정권은 가장 강성이다. 미국이라는 초강국은 테러, 학살, 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국제개입을 주도해야 한다는 신보수주의가 부시 정부의 사상적 바탕이다. 이른바 ‘대량살상무기’ 보유국에 대한 선제공격론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부시 정권은 9·11테러 이후 철저한 자기방어 논리 아래 공세적 세계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미국은 도쿄의정서 조인 거부, 해외에서의 미국인 범죄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거절 등 일방주의적 외교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행정대학원 원장인 조지프 나이(Joseph Nye)의 분석을 원용한다면, 문화와 같은 연성권력을 주장하는 ‘국제주의자’들보다는 군사력과 같은 경성권력을 추종하는 ‘국가주의자’들이 부시 정권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규모의 반전시위를 무릅쓰고 미국이 이라크 침공과 점령을 강행한 것도 강한 군사력에 의해 문제해결을 시도하는 미국의 현실주의 세계질서관에 기인한다. 부시 정권은 미국만이 공동선을 국제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다. 세계 정치학계의 거두로 ‘문명의 충돌’의 저자인 헌팅턴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다. 유럽 문명과 타 문명 사이의 충돌을 예견한 그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비판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미국이 테러와 독재에 대한 전쟁이라고 강변하지만, 이슬람교도들은 그것을 이슬람에 대한 전쟁으로 받아들일 뿐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초강국의 지위를 지키려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정책은 결국 미국을 국제사회에서 외톨이로 만들 것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우리 국민의 미국관도 바뀌고 있다. 최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실시한 국민의식조사에 따르면, 미국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는 응답자가 41.9%로, 호감을 느낀다는 24.6%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50대 이상에서 거부감을 보인 비율이 24.5%인 데 비해 20대는 64.4%, 30대는 48.4%였다. 젊은 세대일수록 반미감정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1997년과 비교하면 미국에 대한 호감도는 연령에 무관하게 전체적으로 줄어들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국가선호도 면에서 50대가 미국-중국-북한-러시아-일본 순으로 꼽은 데 비해 20대는 이와 거의 반대로 일본-북한-중국-러시아-미국 순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노년세대와 그렇지 않은 청년세대 간 인식의 차이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보혁갈등의 일면이 드러난다.

근래 한미갈등의 저변에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정책과 한국민의 대미인식의 변화가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다. 노년세대와 달리 청년세대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것은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정책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해석된다. 햇볕정책 이후 한국 사회에 나타난 평양에 대한 감상적 민족주의 탓도 있지만, 그들은 북한을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한 부시 정권의 공세적 세계전략에 반발하고 있다.


동맹론에서 종속론으로

한국의 미국에 대한 시각은 세대변화의 맥락에서 볼 때 동맹론에서 종속론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이 한국민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지켜주었다는 것이 동맹론이다. 이같은 인식은 노년세대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동맹론은 주한미군이 동북아 안보를 위해 존재한다는 커다란 의미를 놓치고 있다. 실제로 닉슨 정권과 카터 정권 때의 철군 논의가 말해주듯 한반도에서 미국의 이해는 경제적·군사적 고려가 자유와 인권에 우선한다.

종속론은 정치군사 면에서 남한이 미국에 예속되어 있다는 주장(주사파)이다. ‘민족경제론’의 견지에서 한미관계가 경제적 종속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논의도 있다. 그러나 주사파의 주장은 북한의 통일전략의 연장선 위에 있고 종속론은 세계경제에의 참여가 가져온 발전의 역학을 부정하는 한계를 지닌다. 북한의 경제위기에서 보듯 자력갱생의 취약성과 이에 비해 남한의 연관발전(associated development)이 지니는 상대적 우위성은 종속론의 허점을 찌른다.

동맹론과 종속론이 공통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이 미군주둔의 의미이다. 미국은 자국의 대외정책적 이익을 위해 한반도에 군대를 상주시키고 있으므로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언제든지 철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외국의 군대가 주권국가 수도의 심장부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여간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미군의 존재가 전쟁억제와 경제발전이라는 기능을 넘어 경제대국 일본과 군사대국 중국에 대한 견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동북아 세력관계에서 주한미군은 중국과 일본을 견제하는 일종의 균형추 기능을 갖는다. 미국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는 이점과 제약을 아우르는 폭넓은 각도에서 주한미군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심화되는 한미 갈등, 시민사회 네트워크로 풀자
한국에선 반미론, 미국에선 혐한론

문제는 우리가 용미(用美)를 얘기하면서도 미군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송두리째 부정하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이 와중에서 정념적 친미와 반미가 다투어왔을 뿐 자주국방과 자립경제가 수사 이상의 실체를 가지지 못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과연 미국과 한국을 대등하게 볼 수 있을까. 두 나라가 세계체제 안에서 공동의 이해를 지켜나가는 과정에서는 동반자가 될 수 있겠지만 쌍무 관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쌀 개방이나 반덤핑 같은 미국의 통상압력, 핵 개발을 둘러싼 북한과의 직접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외교력 한계, 그리고 불평등을 안고 있는 SOFA의 개정에 대한 미국의 냉담한 반응 등 우리와 미국과의 관계는 대칭적이지 못하다. 특히 한미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을 들고 나오는 미국의 태도는 미래의 한미관계에 회의를 갖게 한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vs 멀고도 먼 나라

한국은 예전의 한국이 아니다. 지난 4월 대한민국 국회의원 일부는 비 전투병력의 이라크 파병 동의안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은 1966년에도 있었다. 당시 국회에선 소장파의원들을 중심으로 전투병력 월남 파병안에 반대하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과의 최종 협상을 앞두고 있던 박정희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차지철을 시켜 만든 자작극이었다. 한미관계가 발전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미국은 한국민들에게 멀고도 가까운 나라지만, 한국은 미국민들에게 멀고도 먼 나라다. 한국에도 지미(知美)파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 지한(知韓)파는 매우 적다. 한국의 초등학생 정도면 지구의에서 미국을 찾아낼 수 있지만, 미국의 대학생 중 3분의 1은 한국이 아시아 대륙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 미국민들에게 한국은 그리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니 서로 이해보다 오해가 많을 수밖에 없다.

한국과 미국의 만남은 정치인, 기업인, 지식인 등에 한정되어 있다. 위로부터의 엘리트 교류다. 두 나라 사이의 상호이해 증진이란 점에서 이들의 역할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이 여론주도층이라 해서 자족해서는 안 된다. 미국은 여론에 민감한 나라다. 국내외 정책 수립과정에서 여론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미국은 이라크전을 벌이기 전에 자국민이 과연 어느 정도의 아군 사상자를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여론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사상자가 3000명이 넘으면 전쟁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부시 대통령이 2004년 재선을 위해 테러와 전쟁을 이용한다는 비판도 미국사회에서 여론의 중요성을 환기시켜주는 대목이다.

미국의 대학에 한국에 관한 강좌는 많지 않다. 그간 국제교류재단과 학술진흥재단의 노력이 있었지만 중국학이나 일본학에 비하면 한국학은 초라할 정도다. 사정이 이러니 한반도의 특수사정이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대학에서 미국 역사와 사회에 관한 강의를 찾기 힘들다. 미국에 대한 학습 없이 과연 비미(批美)가 가능할까. 미국내 한국학에 대한 투자 못지않게 한국내 미국학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오늘날은 NGOs(비정부단체)의 시대다. 이들은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지식, 정보, 가치, 규범을 전파한다. 국가간 협력에서 정부나 기업 못지않게 NGOs의 역할이 커졌다. 특히 미국은 토크빌(A. Toqueville)이 일찍이 ‘결사체의 예술’에 의해 민주주의가 꽃피었다고 언급한 대로 수많은 NGOs가 자원봉사, 의정감시, 정책대결, 대안제시를 맡고 있다.

NGOs가 한미관계에 기여할 부분은 매우 많다. 미국은 사적 신뢰(private trust)보다 공적 신뢰(public trust)가 잘 형성되어 있는 나라다. 연고와 정실보다 능력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다. 두 나라의 NGOs를 통한 대화와 교류가 활성화된다면 국경을 넘는 ‘사회적 자본’의 탄생을 예상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 사이 토론의 공간으로서 ‘공론영역(public sphere)’은 정치인, 기업인, 지식인들이 독점해왔다. 일반 대중은 소외되어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한미갈등의 현장에 종종 개인적 인맥을 갖는 엘리트들이 동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두 나라 사이의 중대현안을 둘러싼 이견으로 정부간 대화가 막힐 경우 이들이 돌파구를 열어왔다는 점에서 그 역할은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연줄망은 효과에 비해 유지비용이 많이 들고 연속성이 떨어진다.

여기에 시민사회 네트워크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 한국과 미국의 시민들을 연결해주는 느슨하더라도 공식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NGOs를 통한 시민사회 네트워크는 한미 사이의 현안들에 관한 이견(異見)을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통해 조정할 수 있다. 물론 한국과 미국에는 두 나라 사이의 상호이해를 위해 조직된 관변·민간 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유명인사들의 사교클럽으로 밑으로부터의 대화와 교류를 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인터넷은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지난 일이지만 만일 미군장갑차에 의한 두 여중생 사망과 관련 병사 무죄판결 사건의 배경이 되는 SOFA 개정문제만 해도 두 나라 시민들 사이에 인터넷상 의견교환이 있었더라면 한국민의 정서가 일방적인 반미로 흐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민 2세대가 한-미의 새로운 연결고리

미국에는 150만에 가까운 한인교포들이 살고 있다. 이 중 한인 2세대는 대부분 대졸 이상의 학력에다 미국인 평균소득의 1.4배를 번다. 이들은 미국과 한국 두 나라 사이에서 복합적 정체성을 지닌다. 이들은 또 두 나라 국민들 사이의 국제문제에 관한 인식격차를 메울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 재미한인들 중 제1세대는 문화적 이질감과 언어적 장벽으로 주류사회보다 모국사회에 더 관심을 갖는 회귀성을 보였다. ‘회오리바람’ 같은 한국정치가 이들을 정략적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교포사회는 분열되고 갈등에 휩싸이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애틀랜타 등 큰 도시로 갈수록 한인 교포사회의 내분과 반목은 심하다.

그러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인 2세대나 1.5세대는 다르다. 주로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은 한국보다 미국에 더 관심이 많다. 따라서 미국 사회 안에서 개인적인 신뢰 혹은 집단적인 참여를 통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을 한미 시민사회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이음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양국 시민사회 교류 활성화가 해법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숨겨져 있는 갈등이 많다. 우리가 민주화를 이루기까지 한미갈등은 주로 정권 대 정권 차원에서 빚어졌다. 그러나 촛불시위에서 볼 수 있듯 한미갈등은 이제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갈등극복이 정부 차원에서 해결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것이 시민사회 네트워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최근 한국에서 높아지고 있는 반미시위나 반미감정에 대해 미국은 노무현 정권이 이를 방관하고 있다고 보며 그 저의를 의심하고 있지만, 실은 민주화된 한국에서 국가는 더 이상 시민사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적(無敵)이 아닌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시민사회는 변화하고 있다. 질적 양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시민사회는 이제 더 이상 국가의 포로가 아니다. 신구(新舊) 사회운동을 통해 외교정책에 대해 도전하고 항의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막강한 시민사회는 국제적 쟁점에 대해선 관심을 덜 보인다. 대외정책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시민사회의 시야가 좁다. 미국의 시민사회는 이라크전쟁에 반대했지만 조직화된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민사회 네트워크는 국가를 넘어 사회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근의 한미갈등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두 나라의 시민사회 안에 다양한 연결망을 만들어야 할 중대한 시점이다.冬

(끝)

글: 임현진 서울대 교수·정치사회학 (06월23일)


임현진
● 1949년 서울 출생
● 서울대 사회학과 및 대학원 졸업
● 미국 하버드대 사회학 박사
● 월드뱅크 컨설턴트 역임
● 한국일보 논설위원, 나라정책연구회 회장, 한국NGO학회 상임대표 역임
● 현 듀크대 겸임교수
● 저서: ‘21세기 한국사회의 안과 밖’ ‘지구시대 세계의 변화와 한국의 발전’
‘한국사회 이대로 안 된다’ ‘Economic Transition and Social Policy in North Korea’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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