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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자료실

작성자 한 빛
작성일 2003-04-11 (금) 17:21
ㆍ추천: 0  ㆍ조회: 2902      
아리랑은 일제시대 애국가였다 (김산의 '아리랑')

<노래 듣기>

* 클릭 --> "김산(희망)의 아리랑"



월간중앙 (2003년 2월호)
http://www.monthlyjoongang.com


아리랑은 일제시대 나라 잃은 백성들의 애국가였다


‘아리랑’의 주인공 金山의 아들 고영광과
언론인 리영희,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3人이 나눈  ‘아리랑 鼎談’”



글 진행/정리 오효림 기자 (hyolim@joongang.co.kr)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젊은 지성들의 필독서였던‘아리랑’(님 웨일스 著)의 실제 주인공 金山.남과 북으로부터 버림받고 중국인의 손에 최후를 맞았던 그는 일제말 항일투사로, 공산운동가로 33년의 짧은 삶을 불꽃같이 살다 간 풍운의 혁명가다.

지난해 12월, 그의 아들 고영광(65) 씨의 방한에 맞춰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씨의 주선으로 한국어판 ‘아리랑’의 서문을 쓴 언론인 리영희 선생과 ‘소설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 씨 3인이 만나 아리랑에 대한 정담을 나눴다.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정담중인 리영희.조정래.고영광 선생(왼쪽부터)
 

님 웨일스의 ‘아리랑’은 어떤 책인가


광 화문에서는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12월 15일 오후, 서울 인사동 초입에 자리잡은 ‘장터국밥’집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중국에서 온 아주 귀한 손님이 이곳으로 온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님 웨일스(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 1997년 작고)의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 산(金山)의 실제 아들 고영광(高永光·65) 씨. 재외동포재단(이사장 고내현)이 ‘유공동포모국방문초청사업’의 일환으로 초청한 19명의 한국 방문단에 끼었던 고씨가 우연히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에 의해 김 산의 유일한 아들로 밝혀지면서 갑자기 마련된 자리였다.


초청자 명단에는 고씨 외에 ‘105인 사건’ 연루자 김기창 선생의 딸 신정(84) 씨, 고려 동포작가 아나톨리 김(63) 씨 등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유독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아리랑연합회에 의해 일제시대 중국 공산당혁명에 가담했던 조선의 혁명가 김 산의 아들로 확인되면서 부터였다.


‘연합통신’이 배포한 19명의 초청동포 명단에 고씨가 포함된 것을 확인한 아리랑연합회는 즉각 재외동포재단에 연락해 1941년 미국에서 출판된 ‘아리랑’ 초판본을 기증할 의사를 타진했다.


1937년 延山에서의 김산.


아리랑연합회는 지난 1983년 나운영·고 은 선생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이래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역사성과 정신,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한 활동을 벌여온 단체다. 현재는 평생을 민족의 노래 아리랑 연구에 헌신한 김연갑 씨가 상임이사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스의 서명이 들어 있는 이 초판본은 미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희귀본으로 알려졌다. 1943년 미국에서 공산주의 서적으로 분류돼 판매금지 처분을 받아 대부분 회수, 폐기됐기 때문이다. 연합회도 고영광 씨가 한국을 방문하기 직전인 지난해 12월3일 워싱턴의 한 고서점에서 비싸게 구입한 것이었다.


이날의 만찬은 아리랑연합회로부터 초판본을 건네 받은 고영광 씨가 한국판 ‘아리랑’의 서문을 썼던 리영희 선생과 ‘소설 아리랑’의 저자인 조정래 선생을 만나보고 싶다고 요청해 마련됐다.


리영희 선생은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0억인과의 대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의 저서를 통해 한국 지성사에 큰 영향을 끼친 지식인이자 언론인. 지난 1995년 22년간 지켜오던 한양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이래 최근까지도 우리 사회에 대한 원로 지식인으로서의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2년전 뇌출혈에 신경마비가 겹친 이후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리영희 선생이 혁명가 김 산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1년 출간된 한국어판 ‘아리랑’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연한 기회였다. 1959년 가을, 합동통신사 외신부 기자로 미국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도쿄(東京)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아리랑’을 발견했던 것. 벅찬 감격을 혼자 감당할 수 없었던 리영희 선생은 일본어판 ‘아리랑’을 한국에 들여와 몇몇 지인에게 소개했고, 이내 그 책은 리영희 선생의 손을 벗어나 암울한 군사독재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한국 젊은 지성인들에게 퍼져나갔다.


지난 20년간 한국 근대사를 주제로 한 대하소설 ‘태백산맥’ ‘소설 아리랑’ ‘한강’을 집필한 작가 조정래 선생은 ‘아리랑’이라는 동명(同名)의 소설을 집필했다는 ‘기묘한’ 인연으로 이 자리에 초대됐다. 특히 한반도와 만주·중앙아시아·하와이를 배경으로 한일병탄 직후부터 8·15 광복까지를 그린 ‘소설 아리랑’은 김 산의 생존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암울했던 시절 조잡한 복사본을 몰래 돌려 읽던 ‘아리랑’의 주인공 김 산의 아들이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은 리영희 선생과 조정래 선생은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특히 리영희 선생은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약속시간에 1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고영광 씨를 기다리며 ‘아리랑’을 주제로 한 다양한 이야기를 꽃피웠다.


1987년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 씨가 찾았을때의 님 웨일스.


옥살이하던 젊은이들의 필독서 ‘아리랑’


김연갑 : 바쁘신 중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리영희선생님은 지난번 한 방송 인터뷰에서 더 이상 일절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셔서 못 모실 줄 알았습니다. 고영광 씨께서 리영희 선생님은 아버지 책에 서문을 써 주신 분으로 꼭 한번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리영희 : 민족이 낳은 아주 소중한 사람인데 만나야지.

김연갑 : 고영광 씨가 예전에 한국어판 ‘아리랑’을 보내주십사 하고 한국에 부탁했더니 부탁받은 분이 조정래씨의 ‘아리랑’을 말하는 줄 알고 그 책을 보냈답니다. 그 인연으로 조정래 선생님도 한번 만나뵈었으면 하더군요.

조정래 : 그런데 김 산의 ‘아리랑’을 보면 결혼 사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고영광 씨의 존재가 어떻게 알려지게 됐나요?(느닷없이 우리 앞에 나타난 고영광 씨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많았던 조정래 씨가 참지 못하고 그 질문부터 꺼낸다)

김연갑 : 1980년대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 씨가 추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53년에 일본에서 ‘아리랑’이 출판되면서 상당한 반향이 있었습니다. 1987년 님 웨일스의 생존 소식을 접한 이회성 씨는 미국까지 님 웨일스를 찾아갔습니다. 님 웨일스도 1937년 이후의 김 산의 소식은 전혀 모르고 있었죠. 님 웨일스는 김 산이 단순히 병사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이회성 씨가 김 산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도 믿지 않았죠. 이회성 씨가 님 웨일스한테 받은 사진을 들고 중국에 들어가 옌볜(延邊) 동포들한테 사진 속의 주인공을 아는지 추적하고 다니면서 아름아름 정보를 모았습니다. 김 산이 중국에서는 계속 가명을 썼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도 잘 몰랐어요. 그러면서 고영광 씨의 존재가 먼저 일본에 알려진 것입니다.


김 산의 본명은 장지락(張紙樂). 그러나 일제시대 김 산을 취조한 일본측 기록에는 장지학(張志鶴)으로 기록되어 있다. 33년이라는 짧은 삶을 불꽃같이 살다 간 혁명가다. 몇 년 전 국내에서 풍운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우리의 혁명가 김 산은 조국 한반도에서는 물론 중국에서도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남에서는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이념적 이유로, 북에서는 그가 연안파였다는 이유로 중국 동북 방면에서의 항일투쟁 사실은 철저히 묻혀졌다. 또한 중국에서는 역시 그가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그의 생애와 항일투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김 산이 우리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광복 직후인 1946년. ‘서울신문’이 발행하던 좌파 성향의 잡지 ‘신천지’(新天地) 지에 ‘아리랑’ 전문이 장장 16개월간 연재되었다. 그러나 극심한 사회 혼란기 속에서 젊은 혁명가의 삶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쉬 잊혀졌다.


그가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다시 각인된 것은 리영희 선생이 1960년 들여온 일본어판 ‘아리랑’이 김지하·김정남 등 당시 지식인과 젊은이들 사이에 읽히면서부터다. 특히 ‘아리랑’은 당시 옥살이를 하던 젊은이들의 필독서였다. 소일거리가 필요한 감옥 생활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것이 일본어 공부였기 때문에 당시 감옥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젊은이라면 누구나 더듬거리는 일본어 실력으로 ‘아리랑’을 읽고 나왔다고 한다.


1970년대 말부터 의식있는 사회과학 출판사라면 모두 한 번씩은 ‘아리랑’ 한국어판 출판을 검토했다. 그러나 ‘아리랑’ 출판은 ‘감옥 문이 훤히 보이는’ 일이었다.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고 튄다’는 용기를 가장 처음 보인 곳이 동녘출판사. 1984년 8월, 동녘출판사의 이건복 사장은 말 그대로 책을 내고는 잠적했다.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물론 예상대로 용공 서적으로 분류돼 판금(販禁)조치를 받고 지형(紙型)까지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동녘측은 당시 사회과학 출판사의 관행대로 이미 지형도 두 장을 떠놓았다. 그후 동녘은 1992년 1월, 문화부에 정식 납본하고 개정판을 낼 때까지 초판본을 끊임없이 찍어냈다.


나라 밖에서도 1980년초 김 산의 ‘아리랑’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문화혁명 말기 일본어판 ‘아리랑’을 접한 옌볜 교포들 사이에 김 산에 대한 관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베이징(北京)에 살던 고영광 씨를 찾아낸 것도 바로 옌볜 교포사회다. 옌볜의 역사연구소는 1977년 홍콩에서 해적판으로 조악하게 간행된 중국어판 ‘아리랑’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한 한국어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김 산’이 과연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미 님 웨일스가 1961년 집필한 ‘한국과 김 산에 관한 각서’(Notes on Korea and the life of Kim San)에서 김 산의 본명이 장지락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지만 이 사실은 그때까지 중국 옌볜과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옌볜 역사연구소가 김 산의 본명을 알게 된 것은 1981년 직접 님 웨일스에게 편지를 띄우고서였다.



조정래 " 그러면 김 산의 죽음은 어떻게 알려졌나요?


김연갑 : 고영광 씨가 1981년에 홍콩에서 출판된 ‘아리랑’을 읽고 님 웨일스한테 편지를 쓰는 한편, 중국 공산당에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심사해 달라고 소원신청을 한 것이죠.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중국·일본 등지에 흩어져 살던 동포·유학생들은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 ‘아리랑’을 접하게 된다. 혁명가로서의 김 산의 치열한 삶에 매료된 이들은 님 웨일스의 ‘아리랑’이 끝나는 1938년 이후 김 산의 행적을 여러 가지로 추리해 봤지만 ‘병사(病死)했다’ ‘광복후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연안파 숙청때 함께 숙청됐다’는 등 추측만 난무했다.

김 산에 대한 신빙성 있는 자료가 발견된 것은 1986년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나마 중국 랴오닝(遼寧)인민출판사에서 간행된 ‘조선족항일렬사전’에 실린 것이다. 이 책에는 1938년 산간닝볜구(陝甘寧邊區) 보안처에서 김 산을 반역자, 일제 간첩, 트로츠키주의자 등의 혐의로 심사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차에 캉성(康生)에 의해 비밀리에 처단됐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또한 김 산이 1930년과 33년 두 번이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무사히 풀려나자 동지들로부터 일본 첩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다 결국 38년 일본 간첩 혐의로 총살당했다는 사실이 살아남은 몇몇 동지들에 의해 뒤늦게 증언되기도 했다.


조정래 : 중국에서 김 산을 처형한 것은 만주에 있던 동북항일부대가 ‘민생단 사건’에 연루돼서입니다.
그런데 1932~36년에 있었던 민생단 사건이라는 것이 흔히 일본이 역정보를 줘서 협력 관계에 있던 조선혁명군과 중국인들 사이에 일어난 자중지란(自中之亂) 때문으로 알려졌는데, 그것이 꼭 그렇기만 할까요? 당시 동북항일전선에 연대장(요즘의 대대장)급 한국인이 약 230명이었습니다. 반면 동북항일군의 주력은 중국인이었어요. 중국인들이 민족적 배타감정 때문에 더욱 무자비하게 제거했다는 것이죠. 그것이 결국 김 산에게까지 미친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봐요.


‘민족’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거든요. 더구나 민생단 사건은 만주에서 있었는데 김 산은 당시 만주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근거도 없이 죽였습니다. 비슷한 예가 흔히 김 산과 비교되는 체 게바라입니다.


저는 체 게바라를 죽인 사람이 카스트로라고 봅니다.
쿠바혁명이 끝나고 체 게바라가 왜 다시 정글로 뛰어들어갔는가. 또 당시 그의 행적은 미국도 추적하지 못했습니다. 체 게바라의 거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카스트로입니다. 그렇다면 체 게바라에 대한 정보를 소련측에 제공한 것이 카스트로 아니겠는가. 아직까지 이런 의견이 나온 적은 없지만 나는 그렇게 봐요. 혁명이 끝나면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이에요. 그것이 정치의 비정함입니다.


김연갑 :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죠.

조정래 : 재미 언론인 김영희 씨가 김 산을 평가한 글을 보면 ‘비극적 최후다. 그러나 백의민족의 힘보다 다수 민족인 중국을 더 의지했던 사실이 문제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님 웨일스도 ‘그는 중국을 믿었다. 그는 바보다’라고 썼는데, 이것은 참 잘못 됐다고 봐요. 역사를 전혀 모르고 하는 말들입니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인생은 허무하다고, 우주의 영겁을 사유해야 할 사람들이 왜 각축을 벌이느냐고 하는데, 그것은 결과론적 이야기입니다. 하루 세 끼를 굶으며 살아가는 배고픈 자에게 삶은 처절한 현실입니다.

그보다 더 처절한 것이 독립투쟁이에요. 우리 땅에서라도 투쟁한다면 괜찮아요. 3·1 운동으로 상하이(上海)에 임시정부가 생기기는 했는데, 일본인들이 자금흐름을 통제하기 시작한 1921~22년부터 국내에서 보내는 돈이 완전히 끊겨요. 돈만 조금 줬다 하면 그냥 잡아다 고문을 해버리니 국내의 돈 많은 지주들도 돈을 보낼 방법이 없었던 거예요.


상하이 임시정부를 살린 것은 순전히 하와이 노동자들의 돈입니다. 하와이 노동자들이 채찍에 맞아가며 10센트, 20센트 모아 2천몇백만달러를 보낸 것입니다.
돈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 덩어리에서 독립운동을 하자면 누구한테 의지해야 했겠어요? 만주에나 동포가 있지 베이징으로만 넘어가도 동포조차 없었습니다. 그나마 중국인밖에 의지할 곳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것이지 정말 그들을 믿어서였겠어요?

역사적 현실을 모르면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당연히 미국 입장에서 중국을 믿으면 안 되죠. 하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당시 믿을 곳이 어디 있었겠어요? 김 산이 함께 투쟁한 중국인들로부터 죽음의 위기에 몰릴 때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모르기는 몰라도 피를 토했을 겁니다. 제 책 ‘아리랑’에도 민생단 사건에 걸린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물이 너무 분해서 오히려 일본에 투항해 아군에 총을 들이대는 상황을 썼습니다. 그들의 실존적 고뇌라는 것도 극점에 몰리면 이성을 잃고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결론적 이야기이고….

최선을 다해 싸웠는데 중국인들이 자신을 일본의 첩자라고 죽이려 드니 그 중국인들을 죽이겠다고 일본에 투항하는 그것이 진실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소설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역사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말해 버립니다. 그리고 당위적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조정래 : 선생이 한창 열변을 토하는 중 훤칠한 키에 흑백 사진 속의 김 산을 그대로 빼닮은 노신사가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영광 씨였다. 중국인 어머니한테서 태어나 줄곧 외가에서 성장해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그는 조선족 통역을 동반했다.
“아들 한 명은 한국 여자와 결혼시키고 싶다”

고영광 : 오늘 이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한국의 동포로서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뵙게 되어 고맙습니다. 한국에서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어 김 산의 아들로서 자랑스럽습니다. 님 웨일스도 편지에서 초판본을 못 갖고 있다며 2판을 보내주셨는데, 한국에 와서 초판본을 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리영희 : 아주 반갑습니다. 40년 전에 아버님의 책을 몰래 돌려봤는데…. 당시에는 그분의 아들을 만나뵐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자리를 잡은 고씨는 ‘아리랑’책 두 권을 꺼내 리영희 선생과 조정래 선생에게 각각 서명을 부탁했다. 중풍을 맞아 손놀림이 자유롭지 못한 리영희 선생은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서명했다.

고영광 : 이 책은 중국보다 한국에서 더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리영희 : 중국공산당이 죽였잖아. 그들은 원죄가 있다고…. 참, 이것 말고 하드커버본이 있는데, 오늘은 일단 여기에 서명을 하고 내 나중에 하드커버본을 보내드리리다.

고영광 : ‘아리랑’ 책은 제가 중국에서도 한번 받아 봤습니다. 그러나 이제 두 분의 서명이 든 책을 받았으니 매우 기쁩니다.

리영희 : 하나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쓴 것은 사실 서문이 아니라 님 웨일스의 ‘아리랑’이 한국에서 어떻게 알려지게 됐느냐, 그 과정을 쓴 거야.

고영광 : 저는 홍콩에서 중국어판으로 낸 것을 처음 읽었습니다만, 번역이 형편없었습니다.

조정래 : 어머님께서 어릴 적에 아버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까.
고영광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대학생 무렵이던 문화혁명 당시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잡혀가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책에 실린 아버지 사진을 보자마자 이 분이 아버지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김 산이 처형당할 당시 고영광 씨는 겨우 한 살이었다. 생모 자오야핑(趙亞平, 1989년 작고)은 김 산이 고영광의 생부인 것이 알려질 경우 아들이 장래 불이익당할 것을 우려해 갓난아기에게 자신의 성을 붙였다가 재혼후 계부의 성을 따르게 했다. 생모 자오야핑 역시 고씨가 태어난 지 3개월만에 항일운동에 나가 고씨는 열 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 고씨는 자신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고씨가 자신의 생부 김 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문화혁명을 겪으면서였다. 일본 첩자였다는 김 산의 이력 때문에 어머니가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조사받게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고영광 씨는 부친이 조선의 위대한 혁명가였다는 것과 옌안(延安)에서 처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고영광 씨는 아들로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에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사를 요청해 1983년 ‘김 산에 대한 사형은 특별한 역사적 조건 아래서 발생한 잘못 처리한 안건’으로 공식 확인받고 김 산의 당적 회복을 받아낸다.

고씨는 1957년 톈진(天津) 난카이대학 졸업후 하얼빈(合爾濱)공대 교직원으로 재직하다 78년 베이징(北京)으로 이주해 최근까지 국가계획위원회 과학기술사로 근무했다. 공무원이라는 신분 탓에 그동안 김 산과 관련된 국내 취재진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다 2001년초 정년퇴임후 비로소 국내 언론 앞에 부담 없이 모습을 나타냈다.


27살때 수감됐을 당시의 김산(왼쪽 사진)과 님 웨일스의 30대 모습(오른쪽 사진)


“님 웨일스, 金山을 男子로 느꼈던 것 같다”

리영희 : 나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다 알고 있어. 왜냐하면 ‘아리랑’을 연구하는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 씨와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의 조지 토튼이라는 교수가 있는데, 이들이 15년 전쯤 나를 찾아 ‘아리랑’을 영화로 만드는 작업을 상의한 적이 있었거든. 그러면서 토튼이 베이징에 가서 고영광 씨를 만난 것도 다 들었지. 그래, 영화 이야기부터 하지.

내가 아는 영화감독이라고는 이장호 감독밖에 없잖아? 이감독을 불러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으니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하겠대. 그래서 이감독이 4년간 영화에 대한 판권을 갖는다는 계약을 맺었고 계약금까지 보냈지. 그런데 이감독이 지금까지도 영화를 못 만든 거야. 영화가 자꾸 늦어지니 차라리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 어떠냐고 해서, 아마 MBC에서 기자 하나가 갔을 거야. 원래는 꽤 긴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했는데, 그렇게는 못 한 것 같아. 나는 못 봤는데, 아마 2부작으로 만들었다지?

고영광 : MBC에서 와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안 하고 인터뷰하자고 해서 베이징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리영희 : 원래 그런 것이 아니고 제대로 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했어.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1980년대만 해도 반공법이 있어서, 공산주의자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거든. ‘아리랑’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님 웨일스의 마지막 소망이기도 했어.

반가운 소식은 님 웨일스의 소망이 곧 현실화될 것 같다는 점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명필름 (대표 심재명)에서 ‘남부군’의 정지영 감독이 사령탑을 맡아 영화를 제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리영희 :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김영삼 대통령이 막 집권했던 해, 해외 인사들 중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공이 있는 사람들한테 포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어. 그래서 내가 님 웨일스를 미국의 유명한 학자 브루스 커밍스 교수,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등의 이름을 넣어 정부에 건의했지.

한·미·일 3개국 지성인들과 함께 작업했던 관계로 서류작업만 꼬박 1년을 했어. 그래서 김영삼 정권 3년에 정부 총무처 장관에게 내가 직접 갔어. 그랬더니 “아, 좋습니다. 새 정부가 해외의 정부 유공자들을 표창하는 좋은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여기 넣어 대통령의 재가를 얻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다 된 줄 알았어.

그 사업의 주무관청이 외무부였는데 외무부에서 한참을 아무 소식이 없더니 나중에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안 되겠다는 거야. 도저히 공산당과 관계되어서 안 된다고…. 국가 포상을 위해서는 보훈처랑 협의해야 하는데 보훈처에서 안 된다고 한다는 거야. 일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좋은 일’이라며 하자던 그 장관이 며칠후 낙마한 거야. 그 장관이 지금 국회의장 하는 박관용 씨였지, 아마.

고영광 : 공산당이라는 점 때문에 그랬다는데 충분히 이해합니다.

리영희 : 훌륭하신 분을 대한민국 국가가 감사 표상을 못 하게 돼서 참 유감이야. 누군가가 다시 추진했으면 참 좋겠어.

고영광 : 쉽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정래 : 지금까지 안 된 것이 오히려 더 잘 된 것일 수 있습니다. 통일이 된 후 통일조국의 이름으로 포상하면 더 가치 있을 테니까요. 지금 남쪽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독립투쟁을 역사에서 지웠고, 북쪽에서는 북쪽대로 민족주의자들의 투쟁을 다 지웠습니다. 양쪽 다 역사가 반쪽이 나 있는 거예요. 한국에서 한국전쟁 후의 공산주의자와 해방전 공산주의는 다릅니다. 한국전쟁 이전의 공산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공산주의를 택한 것이지 한국전쟁 때 남쪽을 막 죽이려고 했던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그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고영광 : 제가 한국에 와서 느낀 것은 정부가 김 산의 공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국민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보는 눈과 국민이 보는 눈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 온 이래 국민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고, 언론도 관심을 가져 주셨습니다. 성공하든 안 하든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열심히 나서 주신 데 감사 드립니다.

리영희 : 그래도 민족이 낳은 어른은 민족이 확인해 주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역사가 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한 가지 내 사견은 님 웨일스가 단순히 작가로서 김 산을 만났던 것이 아니라 김 산을 남자로 생각했던 것 같아. 내가 그것을 여러 번 느꼈어.

고영광 : 그것도 재미있네요. 실제로 아버지께서 어머니한테보다 님 웨일스한테 더 많은 말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1980년대 ‘아리랑’을 읽고 ‘나도 모르던 김 산을 알게 됐다’고 서운해 하셨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합니다. 제가 님 웨일스와 연락이 닿았을 때까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님 웨일스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편지로 제가 상세한 과정을 다 보내 드렸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아리랑’ 읽고 한국 이해해”

조정래 : 님 웨일스가 김 산을 만나기 전에 일본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온 적이 있어요. 그러면서 한국에 반해 버렸어요. 김 산이라는 가명은 님 웨일스가 지어준 것인데, 그것이 금강산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리영희 : 또 하나 한국 사람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41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하고 전쟁을 해야 하는데 일본에 관해서는 온갖 책이 많은데 일본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거야. 그런데 유일하게 찾은 것이 님 웨일스의 ‘아리랑’이었던 거지. 그래서 태평양전쟁을 하며 식민지 문제를 어떻게 다룰까, 조선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를 고민하여 루스벨트가 읽은 것이 이 ‘아리랑’이에요.


조정래 : 내가 ‘태백산맥’을 거의 마칠 무렵 이 책이 출판됐습니다. 그리고 ‘아리랑’을 쓰면서 독립투사들이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실감해야 글이 되는데 막연하기만 한 거예요. 그들이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조국을 위해 버릴 수 있었는지 실감이 안 나더라고요.


‘태백산맥’을 집필할 당시에도 처음에는 막연하기만 했는데 생존해 있는 빨치산을 한 명씩 만나면서 마음 속에 하나의 실체가 만들어졌거든요. 그런데 중국에서 활동했던 독립투사들의 모습이 영 빨치산처럼 실감이 안 오는 겁니다. 그러던 중에 김 산의 책을 두 번 읽으면서 ‘앗, 이것이구나’ 하고 확 느껴졌죠. 그제서야 머리 속에서만 맴돌던 독립투사들이 제 몸에 육화(肉化)된 것이죠. ‘아리랑’에 등장하는 그 많은 인물들의 모체가 바로 김 산입니다.


리영희 : 1970년대 내 책이 김지하 등에게로 돌아다니다 박경리 씨에 의해 돌아왔는데, 나중에 박경리 씨가 그러더라고. 원래 ‘토지’를 단권 아니면 길어야 두 권 정도로 짧게 구상했는데 김 산의 ‘아리랑’을 보고 계획을 바꿨다고. ‘아리랑’이 없었으면 대하소설 ‘토지’도 없었을 거야.


고영광 : 한번은 중국의 한 민요 경창대회에서 ‘아리랑’이 최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TV에서 아리랑 노래가 나오면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조정래 :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일제시대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애국가였습니다. 유랑하는 사람, 독립투사, 학생, 노무자, 정신대 등 조선 백성이라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울 때면 아리랑을 불렀어요.


그래서 김 산이 님 웨일스에게 조선인에게는 서양사람이 모르는 한(恨)이라는 것이 있다, 한이라는 것은 가슴에 맺혀 있는 사무친 서러움으로, 백 번 천 번 서러워 더 이상 풀 길이 없는 서러움과 원통함이다. 그것을 노래로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리랑이라고 말해줬어요. 그래서 님 웨일스가 책 제목을 ‘Song of Arirang’이라고 붙인 것이고, 나도 일제시대를 그리면서 책 제목을 아무 고민 없이 ‘아리랑’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김 산의 아리랑 중에 이런 말이 나와요. ‘슬픈 것은 아름답다’고…. 그는 우리 슬픈 역사조차 독립투쟁을 하면서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굉장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에요.

고영광 : 정말 감사합니다.

아내의 키는 156cm에 불과한데 자신의 아들 둘이 모두 180cm가 넘는 것은 아무래도 장신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때문인 것 같다며 아들 자랑을 빼놓지 않는 고영광 씨. 자신이 결혼할 당시에는 주위에 한국 여자가 한 명도 없어 못 했다며, 두 아들 중 한 명은 꼭 한국 여자와 결혼해 ‘조선인’의 핏줄을 이어갔으면 한다고 마지막으로 작은 바람을 밝혔다. 식사를 마친 고영광 씨 일행은 마침 교양 다큐멘터리 전문채널 CTN사에서 나온 촬영에 응하기 위해 급히 자리를 옮겼다.  
 
출판호수 2003년 04월호 | 입력날짜 200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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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웨일스의 ‘아리랑’은 어떤 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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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펄 벅이 운영하던 존 데이 출판사에서 출판한 Song of Arirang 초판본.

 

“아리랑은 일제시대 나라 잃은 백성들의 애국가였다


‘ 아리랑’(Song of Arirang)은 님 웨일스가 1937년 옌안(延安)에서 김 산(金山)과 20여 차례 나눈 대화를 기록했다가 1941년 출판한 책이다.


1937년 7월 중국 혁명의 수도 옌안이 지루한 장마를 겪고 있을 때, 미국의 젊은 여류작가 님 웨일스는 우연히 젊은 조선인 혁명가 김 산을 만나 그의 혁명가로서의 삶에 대해 두 달간 20여 차례에 걸쳐 집중적으로 대화를 나눈다. 급변하는 1920~30년대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혁명가의 투쟁 역정을 따라 전개되는 ‘아리랑’은 김 산 개인의 자서전인 동시에 중국 혁명사이기도 하다.


특히 ‘아리랑’에서 밝힌 광저우(廣州)·하이러우펑(海陸豊) 봉기에 대한 김 산의 회고는 이미 광저우에서 당사 자료로 채택됐을 만큼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다. 당시 상황을 가장 먼저 회고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중국 혁명사에 대한 김 산의 판단이 지금 봐도 정확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책은 식민지 하의 조선 민중이 겪고 있던 처지와 분노를 서구 지식인들에게 알렸으며 광복 직후 일본에서 ‘한 조선 청년의 불꽃 같은 항일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참회의 필독서’로 읽혔다. 미국에서도 USC·UCLA 등 20여 대학의 동양학 관련 학과에서 교과서로 채택됐다.


국내에서는 1984년 초판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90여 쇄(판)까지 발행된 대표적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출판호수 2003년 04월호 | 입력날짜 2003.01.22




* 클릭 --> 김산과 님웨일즈의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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