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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자료실

작성자 한 빛
작성일 2003-04-23 (수)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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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공 군홧발 '찬양의 노래’ 부른 문인들


■  기사모음

5,6공 군홧발 '찬양의 노래’부른 문인들


[한겨레 96년 01월 25일 15면]


서정주 김춘수 등 10여명 앞장… 민속학계 음악 미술계도 '한몫'
 조병화 임동권 등 현역감투 비롯 여전히 원로대접… 이젠 청산을


과거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의 큰 물결을 예술가들이라고 비켜 갈 수는 없다.'
미’를 추구하고 ‘인간의 영혼’을 노래한다는 이 들이 학살의 수괴들을 찬양했기 때문이다.

5,6공 신군부의 군홧발 밑에서 국민들이 신음할 때 그들의 편에 서서 찬양의 노래를 부른 예술가들 중 으뜸은 문인들이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도 있지만 내란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전두환·노태우의 칼을 펜으로 미화해 준 문인은 10여명에 이른다.



지난 19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96 문학의 해’ 선포식에도 이들은 문단의 원로로서 나란히 한자리씩을 차지해 변신이 빠름을 과시했다.

시인 조병화는 80년 8월 28일치 〈경향신문〉에 ‘새 대통령 당선을 경축하며’란 축시를 썼다. “새시대, 새역사의 통치자/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새 대통령/온 국민과 더불어 경축하는/이 새출발/국운이여! 영원하여라//청렴결백한 통치자/참신과감한 통치자/이념투철한 통치자/정의부동한 통치자/두뇌명석한 통치자/인품 온후한 통치자/애국애족, 사랑의 통치자….” 그는 지금 예술원 회장이다.



일제시대에 친일부역한 이력을 갖고 있는 시인 서정주 역시 권력에 약했다. 그는 87년 1월 18일 전두환의 생일 축하장에서 발표한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에서 .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참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마련하셨나니/…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라고 썼다.



80년 당시 문예진흥원장이었던 송지영(사망)이 〈조선일보〉 80년 8월 13일 자에 쓴 시론은 더 가관이다.. “…정로(正▦)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엊그제 국보위 상위장 전두환 장군이 솔직하게 담백하게 자세하게 밝혀준 그 길이 곧 바른 길이다… 우리 국가의 앞날이 그 길로만 차질없이 뻗어간다면 민족의 생존과 번영이 어김없이 우리 모두 기대하는 그대로 이뤄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이들 뿐 아니라 일제시대로부터 순수문학을 부르짖어온 시인 김춘수,소설가 김동리(사망), 문학평론가 조연현(사망), 수필가 조경희 등이 앞다투어 군부독재정권을 미화하는 글을 남겼다. 그 결과,김춘수는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고, 조경희는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과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거쳐 88년 노태우 정권 아래서 정무 제2장관에 올랐다.



물적 증거가 확실한 문인들 만이 5·6공의 정권 구축을 도왔던 것은 아니다. 전두환 정권이 당시 대표적인 저항세력이었던 대학생들을 호도하기 위해 벌였던 ‘국풍 81’에는 민속학계의 전문가들이 동원됐다.81년 5월28일부터 닷새동안 여의도에서 열렸던 이 국적불명의 ‘쇼’는 마당극계의 연출가 허규와 민속학자 임동권 등이 기획을 맡아 대학가의 5월 데모를 무마하고 국민들의 정치적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놀이마당으로 만들었다. 그 뒤 허규는 행사 직후인 8월 19일 국립극장장에 취임해 89년까지 9년동안 역임했고,임동권은 현재 문화재 전문위원장으로 있다.



80년대 ‘민중미술’권에 대한 혹심했던 탄압의 뒤에도 역시 전문미술가들이 있었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그림을 그렸던 ‘현실과 발언’ 동인들이 80년 10월 17일부터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려던 창립전은 서양화가 권옥연 등이 위원으로 있던 '전시회 운영위원회’의 일방적인 대관취소 결정으로 개막도 하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또 82년부터 87년까지 민중미술 작가들을 투옥하고 작품을 압류하는 등 군부정권이 미술계를 단속하는데 쓰인 이른바 ‘미술인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사람이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인 이경성과 전문위원이었던 오광수였다.



음악인들 가운데선 72년부터 85년까지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군부정권을 찬양하는 협회 이름의 지지선언서를 낸 성악가 조상현이 있다. 그는 이사장을 사퇴한 85년에 민정당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입신했다.



이들은 대부분 우리 문화예술계의 원로로서 각계 고문으로 있으면서 아직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친일부역 문인·예술인들을 뿌리 뽑지 못해 당했던 일제잔재의 문화체험을 독재잔재의 문화체험으로까지 확장시키며 21세기를 맞는 불행한 국민이 될 지도 모른다.



<문화부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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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의 친일시



[한겨레신문 96년 03월 27일자 14면]



선운사 시비가 부끄러운 어두운 시대 변절

/가미가제 찬미 ‘마쓰이오장 송가’등 일제말엽 발표… 생가 돌보는이 없어 스산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막걸릿집 여자의/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서정주 ‘선운사 동구 ’ 전문)

선운사 동백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애초에 그것을 보러 간 길도 아니었다. 동백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4월말이나 되어야 만개한다는 사실쯤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조선젊은이 희생 미화

선운사에서 지척지간에는 미당 서정주(81)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가 있다. 한글로는 표기가 같고 거리도 가까워 혼동하기 십상이지만, 선운사와 선운리의 한자표기는 엄연히 다르다.

당연한 이치로, 정읍과 고창의 중간지점으로 이 일대 교통의 요지인 흥덕에서는 선운사행 버스와 선운리행 버스가 따로 있다.흥덕에서 서쪽으로 출발한 버스가 부안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방향을 틀어 변산반도가 마주 보이는 줄포만의 해안 마을을 훑으며 얼마쯤 달리다가 멈추어선 종점이 선운리. 이곳 사람들이 질마재 부락이라 부르는,미당의 고향이자 그의 여섯번째 시집 〈질마재신화〉의 무대가 되기도 한 곳이다. 산자수명하고 양광과 인심이 다같이 따사로운 이곳에 와서 시인 미당의 흠집을 들추어야 하는 객의 심회는 착잡하기만하다.

〈안 잊히는 일들〉이라는 제목의 미당 시집도 있거니와, 그가 스스로 “내 생애의 가장 창피한 일들”이라 지칭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그가 일제 말엽에 발표한 몇편의 친일시와 산문을 일컫는 것이 다. 그의 친일시는 지난 85년 〈실천문학〉 여름호에 소개된 뒤 다른 문인들의 작품과 함께 두권짜리 〈친일문학작품선집〉으로 묶여나 오면서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선집에는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등 한국 신문학의 개척자들을 필두로 주요한 박종화 박영희 김팔봉 이효석 유치진 모윤숙 노천명 조연현 등의 기라성 같은 이름들이 아예 한국문학사를 통째로 옮겨다 놓은 양 포진하고 있었다.



“마쓰이 히데오!/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사람/인씨의 둘째아들 스물 한 살 먹은 사내//마쓰이 히데오!/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귀국대원”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비롯된 태평양전쟁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4년 12월 9일 〈매일신보〉에 게재된 미당의 시 ‘마쓰이오장 송가’는 다름아니라 저 악명 높은 일본 군국주의의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를 찬미하고 있다. 게다가 그 무모한 전술에 한낱 군수품으로 동원된 생때같은 목숨인즉 인씨 성을 가진 엄연한 조선 젊은이의 것이다.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같은 미국 군함!//(…)//장하도다/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중일전쟁에 이은 태평양전쟁의 도발, 38년부터 시행된 국가총동원법과 육군특별지원병령 등 파쇼 일본이 조성한 발악적인 전쟁 분위기 ,그리고 그에 발맞추어 1939년 발족한 친일 조선문인협회(회장 이광수)의 등장은 미당이라고 해서 뒷짐을 지고 사태를 관망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서전에서 밝힌 대로
“정치와 전쟁세계에 대한 내 무지와 부족한 인식”으로 친일시며 산문을 쓰고 있는 동안, 총독부를 등진 집에서 시래기죽으로 연명하던 만해는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었고, 이육사와 윤동주는 각각 베이징과 후쿠오카의 차가운 감방에서 외로운 최후를 맞았다.

이처럼 죽음으로써 일제 통치에 항거한 이들 말고도 현진건 조지훈 정인보 황순원 김영랑 김동명 변영로 신석정 등이 은둔하거나 아예 붓을 꺾는 방식으로 굴욕적인 부일협력을 피했다

전두환대통령 지원연설도 이렇듯 때로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선비의 양심과 민족적 자존을 지키고자 한 동료들을 놓고 보면 미당의 친일시는 진정 안타까운 과오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그가 “부족 방언의 요술사이자 시인부락 족장”(유종호)이라거나 “시 쓰는 일에 있어서 백 년에 하나 나올까말까 한 인물”(김재홍)로까지 추앙받고 있는 만큼 더욱 그러하다. 미당은 지난 81년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한 텔레비전 지원연설에 나섬으로써 예술적 재능과 정치적 판단 및 도덕적 선택 사이의 상관관계에 관해 다시한번 성찰해 보도록 만들었다.

질마재 부락의 미당 생가는 6년째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폐가의 몰골을 하고 있다. 선운국민학교에서 봉암초등학교 선운분교로 바뀐 데 이어 그마저도 폐교 위기에 놓여 있는 동네 학교의 형편에서 보듯 마을 인구가 자꾸 줄어드는 상황을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 이 집 앞에는 철쭉이며 홍도화며 영산홍 따위의 꽃나무 수백주가 잘 가꾸어져 있다. 그것들은 생가 옆집에 홀로 살고 있는 미당의 동생 정태(73)씨가 사다 심은 것이다. 그 자신 시인이자 언론인 출신인 정태씨는 홍진과 세파를 피해 지난 89년 낙향한 뒤 부락 뒷산인 소요산이며 선운산 자락을 훑으며 난을 캐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다.

생가에서 바라다 보이는 동산에는 미당의 양친과 조부모 등의 무덤이 있어 미당은 한식과 추석을 전후해 1년에 두번쯤 내려온다. 그럴 때면 자신의 시비가 두개나 서 있는 선운사 앞 동백 호텔에서 묵는다고 한다. 정태씨는 미당이 16, 7세 무렵 대지주 인촌 집안의 마름으로 있던 부친에게 “그만두라”고 하자 부친이 선뜻 받아들였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형님도 형님이지만 아버님도 예사 분이 아니셨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의 말은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미당의 시 ‘자화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듯싶었다.

미당의 생가와 〈질마재신화〉의 무대를 찾아서는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독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1백70년 전에 지어져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생가는 시간의 무게와 함께 무심한 인정에 대한 탄식을 불러일으킬 법하다.

고향 질마재마을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자 시집 〈질마재신화〉의 무대이기도 한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부락의 전경. 줄포만 너머로 건너다 보이는 곳이 변산반도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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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시세계 마땅히 기려야


그릇 큰 시인을 가늠하는 척도는 무엇일까?


첫째, 풍요한 작품량

둘째,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언어구사

셋째, 독자적인 세계 이해나 통찰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화사집』에서 『늙은 떠돌이의 시』에 이르는 14권의 시집을 보여준 미당 서정주 선생이 20세기 최대의 한국시인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풍요한 생산량이 졸속적 대량생산의 소산인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미당의 경우 끝자락의 『산시(山詩)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서는 한결같이 높은 수준과 균질성을 유지하고 있다. 언어의 창의적 구사는 독자에게 새로운 인지의 충격을 가하게 마련인데 그러한 사례는 미당 시 곳곳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미당의 시력 65년은 정상에서의 끊임없는 모색과 변모와 성취의 눈부신 기간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란 도전적인 선포로 시작되는 '자화상' 에서 엿볼 수 있듯이 청년기의 미당에게서는 '저주받은 시인' 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자임이 보인다.

징그러운 뱀과 문둥이와 보리밭의 야외 정사 등 통념상의 비시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자학과 오뇌의 미학을 보여준 것이 초기의 특징이었다. 소재가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만큼 언어 표현에서는 상대적으로 무잡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후의 제2시집 『귀촉도』를 전후해 그는 귀향자의 모습을 뚜렷이 하면서 언어구사면에서도 한결 세련되고 치밀해진다.

훌륭한 시는 소리와 뜻의 서정적 통일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음률성은 기억촉진적이기도 하다.

소리와 뜻의 조화란 관점에서 보면 『귀촉도』에서 제3시집 『서정주시선』에 이르는 시절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모든 유럽국가가 187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전통' 을 대량 생산했다고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지적하고 있다. 문학적.개인적 차원에서 '전통' 창제를 시도한 것이 시집 『신라초』 『동천』의 세계다.



그것은 독자적인 신라정신의 구축이지만 현실과의 괴리를 불가피하게 했고, 독자에 따라 찬.반과 호.불호가 크게 갈리기도 했다.



갑년을 전후한 시기에 미당은 대담한 산문 지향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연 『질마재신화』를 선보인다. 전통적 농경사회와 그 기층민 문화의 시적 탐구인 이 걸작 산문시집은 가장 독자적이고 성공적인 민중문학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미당은 우리 역사에서 취재한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와 시로 쓴 자서전 『안 잊히는 일들』을 선보여 다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아무거나 붙들고 무슨 말을 해도 시가 되는 것을 두고 득도의 경지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쿤데라가 독특한 의미를 붙여 전파시킨 키치의 유혹에 넘어간 적이 없다. 넓이와 깊이를 아우르고 있는 미당 시는 부족방언의 세련이 거둔 매혹적인 시적 승리다.



미당의 빛나는 성취에는 타고난 천분과 뼈깎기 노력 이외에도 개인적 행운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장수와 함께 8.15 해방을 서른 초입에서 맞았다는 사실, 시인으로서의 원숙기가 경제성장기와 겹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연조차도 강자의 편을 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장수 또한 의지와 노력의 소산임을 그의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어디서나 뛰어난 재능은 희귀한 법이다.



살아 있는 고전이 영세한 우리 터전에서 전범에 값하는 미당의 시는 현대의 고전으로 숭상돼야 마땅하다. 미당시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한국어의 마스터는 불가능하다.


유종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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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유종호님에게 - 서정주는 시인이 아니다

글쓴이 나정욱




유종호님이 쓴 미당예찬론을 반박해 보겠습니다.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글의 인용문은 '창비무명인'님이 링크한 부분을 클릭하여 읽고 가져왔습니다. 이 기회에 '창비무명인'님의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한 가지 우려할 점은, 괜히 서정주가 '창비무명인'님의 글로 인해 엉뚱하게 후광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되겠습니다. 어떤 치들은 그런 농간을 잘 부려, 비판의 의미를 역이용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여 하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평소에 갖고 있던 서정주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쉽게 드러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띄우고,글을 쓸 수 있도록 그 논거를 제공해 주신 분은 역시 '창비무명인'님입니다. 감사의 말씀 드리면서,





('>'다음의 글은 유종호님의 글이고,'==>'이후의 글은 제 글입니다.)



>미당 시세계 마땅히 기려야



==>미당 시세계는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그래야 조국이 산다. 그래야, 이 민족이 더욱 건실해지며 미래가 있게 된다.





>그릇 큰 시인을 가늠하는 척도는 무엇일까?



==> 시인은 시인일 뿐,'큰 시인'이 어디 있습니까? 시인다운 시인이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억지로 미당을 '큰 시인'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두보나 태백이나 수영이나 동엽이나 만해나 육사나 브레히트 등등, 이런 분들은 '시인'일 뿐 앞에 '큰'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것 자체를 달가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첫째, 풍요한 작품량



==>  양이 질을 무조건적으로 규정해 주는 것 아닙니다.

시의 경우엔 양보다 질이 더욱 중요한 문학갈래로 생각됩니다.


서정주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제시해 주십시오. 그 한 작품 아래에 다른 작품들은 모두 일렬종대로 세우십시오. 시인의 문제는 얼마나 훌륭한 한 작품을 남겼는가가 더욱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창비게시판에서 창비무명인님의 노력으로 서정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국화옆에서'가 얼마나 사이비 시인지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첫째 조건은 '풍요한 작품량'이 아니라, 시인의 위대한 정신성입니다.

인간의 시원과 인간의 미래를 꿰뚫어보고, 긍정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삶을 노래하려는 그 웅혼한 정신이 그 첫째 조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서정주는 민족이나 민중의 무게도 짊어지기엔 허약한 의지의 소유자인데, 어찌 그를 시인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까?


시인은 '지상에 유배당한 존재' 내지는 '천형받은 존재'로 일컬어지는데, 서정주에게 그 어떤 것이 그를 그렇게 어렵고 괴롭게 만들었습니까? 그의 '자화상'에 나오는 '천치'와 '죄인'은 그리하여 그 스스로가 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 아닙니까? 그는 그 자신의 그릇 크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왜 옆에 있는 사람들은 그 작은 그릇을 큰 그릇이라 우기며, 우상화시키려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미당을 신격화시키려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의 신화시대는 이미 그의 죽음으로 역사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둘째,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언어구사



==>첫째조건이 빛을 바랜 상황에서, 둘째 조건의 가치는 반감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첫째조건이 산이라면, 둘째 조건은 그 산을 이루는 요소입니다. 그 산의 존재가 잘못되었다면, 분명 그 산을 이루는 요소들에게도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미당의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언어구사'가 과연 무엇을 지향하며 쓰여졌는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시가 목적이라면 그 언어란 것은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조심해서 써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예술인 시에 있어서 그 언어란 곧 목표자체가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시를 볼 때 그렇겠지요. 시인이 창작한 작품, 그 자체만 중시하는 입장은 비평의 입장에서 한 갈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설득력이 있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미당의 경우엔 시에 그 시인의 삶을 투영시킬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 시라는 것도 결국 사람의 범주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며, 세세손손 그 작품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그 사람들의 삶을 어떤 형식으로든 규정하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시는 주술적 노래가 되고 마는 까닭입니다. 그 주술의 힘이 사람들의 삶을 더욱 사람답게 만들 때만, 그 존재론적 비평이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서정주의 시는 그 주술력이 뛰어나지만, 그 주술의 결정적 힘을 이루는 작자의 정신이 왜곡되었기에 사악한 노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부족이든 주술사가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부족의 현재와 장래의 운명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정주를 우리 부족의 주술사로 만들었다간 사악한 분위기만 조성하고 마는 잘못을 범할 것입니다. 부분적 요소는 전체의 하위단계로서, 서정주는 전체의 전체인 '지향하는 바'가 잘못 설정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 독자적인 세계 이해나 통찰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 독자적인 세계 이해나 통찰도 앞의 둘째에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설득력은 있지만, 이런 각도에서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독자적인 세계이해나 통찰'이 관념의 수준에서 그칠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 관념이 육화된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관념이 곧바로 현실화되어야 하며, 꼭 그렇게 되는 것이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했을 경우엔 상상력의 영역인 '예술'의 영역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니까요.

그러나 무릇 예술의 상상력과 관념이 중요한 이유는 그 작품을 감상한 사람들의 정신을 감염시켜, 작자의 정신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모든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으로 '세계를 자아화'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색깔로 세상을 수놓으려는 그런 욕구도 없이 작품 활동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의식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는 하겠지만, 따져보면 결과론적으로 그런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정주 역시 그런 경우에서 예외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과연 어떤 색깔의 영혼의 소유자였느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그가 아무리 '독자적인 세계 이해나 통찰'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고 그것이 관념의 영역에 머무는 정도라면 그것은 그리 가치가 없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의 성취로 이룩한 그것들이 현실화되기엔 맞지 않는 세계관에 불과하다면 그 역시 가치가 없습니다. 과연 서정주가 이룩한 그 '독자적인 세계이해나 통찰'이라는 것이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인 세계라면, 당연히 그 작품들로 인해 서정주의 정신은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인, 우리가 우러러 받들어야 할 가치로 부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의 작품 속에서 귀납할 수 있는 그의 세계가 우리민족이나 인류가 지향해야 할 그런 보편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요? 혹, 보수적이고 퇴행적이며 역사가치가 제거된 반동적 회귀본능적 세계가 아닐까요? 서정주가 나의 손을 잡고,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가서 살자고 나를 유혹하여도 나는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서정주가 없어도, 또한 그의 작품이 없어도 좋은 이 땅에서, 또한 서정주보다도 더 웅혼한 시를 쓴 사람들의 작품이 있는 이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서정주의 시작품 하나 하나를 면밀히 분석하면 그의 정신의 구조를 구성할 수 있으며, 그 구성된 모습은 아마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시선'에 불과할 것입니다.그 것이 시와 시인과 시인의 삶과 우리의 역사적 삶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화사집』에서 『늙은 떠돌이의 시』에 이르는 14권의 시집을 보여준 미당 서정주 선생이 20세기 최대의 한국시인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20세기의 부분과 21세기의 초입을 살고 있는 나는 유종호님의 입장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서정주의 신화는 그의 죽음으로 마감되었으며, 그의 신격화는 단호히 배격하고 막아야 하며, 그의 신화의 허구성은 그의 죽음이 있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곳저곳에서 굉음을 내며 붕괴되고 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글이 '고은'님의 글입니다. 어디 고은님이 허투로 글을 쓰는 분입니까? 또한 이곳 창비게시판에서도 그의 죽음 전후로 하여 폭풍같은 그에 대한 비난이 있지 않았습니까?

다만 그것을 막아보려는 사람들에 의해 그 힘이 차단되고 있을 뿐이지요. 유종호님의 이런 글도 그 힘을 차단해 보려는 목적이 분명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내버려두세요. 서정주상이다 뭐다 하지 말고 죽은 사람 그냥 내버려두면 어디 덧납니까? 하기야 죽은 사람 가지고 무슨 상 무슨 상 제정하고 심사위원 되고, 그 덕에 삶의 재미를 보려는 살아있는 자들의 농간도 없으면, 이 세상이 좀이나 심심하겠습니까마는.



이후의 글에 일일이 답을 주는 것은 읽는 분이나 글을 치는 사람이나 따분할 따름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위에서 대강했으니, 이후의 처신은 유종호님께 맡기겠습니다. 까마득이 어린놈이 짓까불고 짓바순다 생각하지 마시고, 후배 놈들 생각에 이런 생각도 있구나 하시고, 혜량 있으시길 바라옵니다. <이하 생략>    




한 빛: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 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내 자신에 대하여-승리했을 뿐이다."  - 김산 (장지락) -  [05/30-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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