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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자료실

작성자 한 빛
작성일 2002-10-02 (수) 00:21
ㆍ추천: 0  ㆍ조회: 3769      
이북의 국가와 국기(北 애국가 1, 2절 최초공개 )

월간중앙 (200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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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애국가 1, 2절 최초공개"


“월북작가 박세영이 작사, 1947년에 제정된‘애국가’
분단책임 피하려 1년 뒤에 보급했다”



김연갑 국가상징연구회 이사


6·25 이후 대한민국 땅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북한의 인공기가 펄럭이게 됐다. 정부는 9월29일 개막하는 제14회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석하는 북한 응원단에 북한 國旗의 사용을 허용하기로 했다. 북한선수가 금메달을 딸 경우 국제 관례대로 국가도 연주될 예정이다. 북한의 國歌와 國旗 사용과 관련, 찬반논쟁이 뜨겁게 제기되는 가운데 북한의 국가, 국기에 얽힌 제정 배경과 유래, 그리고 비화를 긴급 소개한다.<편집자주>

■ 가사와 곡이 다른 남북의 ‘애국가’
■ ‘조선음률’‘계급성’ 강조한 김일성의 4대 교시
■ 남북 애국가 노랫말 7개가 같아
■ 인공기 공식 명칭은 ‘홍람오각별기’
■ 5각형 별모양에 담긴 비밀


부산 아시안게임에 등장하는
북한의 國歌·國旗는 언제 어떻게 제정됐나?

‘인공기’. 북한의 국기(國旗)를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북한 국기의 정식 명칭은 ‘홍람오각(紅藍五角)별기’다. 낯선 이름의 북한 국기가 대한민국 땅에서 펄럭이게 됐다. 9월29일 개막하는 제14회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다. 인공기가 공식 게양되는 것은 물론 북한 응원단이 소형 인공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것도 허용하기로 했다. 또 북한 선수가 금메달을 딸 경우 국제 관례대로 북한의 국가(國歌)도 연주될 예정이다. 우리는 북한의 국가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 가사나 곡조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 국가상징은 ‘紅藍五角별旗’와 ‘애국가’

그렇다면 북한의 국가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북한 국가의 제목도 우리와 똑같은 ‘애국가’다. 물론 가사와 곡조가 우리의 ‘애국가’와는 전혀 다르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국제적인 체육 행사라는 특수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분단 이후 금기 중의 금기였던 북한의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를 정부가 허용한 것은 남북관계사에 전례 없는 커다란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남북 간에 이러한 합의가 이뤄지기 전에 북한의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를 두고 국내에서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던 데서 알 수 있듯, 이는 일부 국민들에게는 충격이고 당혹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북한의 국기와 국가의 유래나 의미 등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북한의 국기와 국가가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갑자기 우리 눈앞에 공식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제는 마냥 덮어둘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대해 국민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불필요한 논란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북한의 국기와 국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남북 간에 국가상징(國家象徵), 특히 국가와 국기에 대한 시비와 경쟁은 체제 경쟁과 그 궤를 같이한다. 지난 50여 년 간의 경쟁이 대개 국제무대에서의 국가 정통성이나 체제 우위성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표면화될 수 있는 것이 국기와 국가에 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번 부산 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참가함으로써 북한의 국기와 국가를 둘러싼 시비와 논쟁은 종래의 ‘접촉’ 수준에서 빚어진 상황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과거에는 북한의 국기와 국가가 해외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간접 노출’에 해당됐지만, 이번에는 한국 내에서 사용됨으로써 우리 국민들에게 ‘직접 노출’ 된다는 점에서 우선 크게 다르다. 더구나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사용될 12종류의 북한기를 우리 손으로 직접 제작해 걸어주고, 북한의 국가 또한 우리가 직접 연주해주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북한의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에 대해 엄격한 조건을 달고 여러 가지 제한을 가하고 있다. 특히 남한 국민들이 북한 국기를 들고 응원하는 것을 불허하는 것이 대표적 예다.
북한 국기와 국가를 우리가 현실에서 직접 맞닥뜨린 것은 6·25전쟁 기간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들에게 북한의 국기와 국가는 단순한 적국의 상징물이 아니었다. 북한이 점령한 곳에서는 목숨을 구하는 방편이 되었고, 남한이 수복한 곳에서는 자칫 죽음을 부르는 운명의 표지판이 되었다.



한국전쟁 기간중 강원 정선 지역 산간 마을에서 사용하기 위해 급조한 인공기 모형.발굴 당시에는 북한기 겉에 태극기 모형이 덮혀 있었다.국가상징연구회 소장.
북한의 국기·국가 대면 6·25 이후 처음

그래서 한국전쟁은 곧 국기와 국가의 전쟁이기도 했다. 1993년 ‘한 역사학자의 6·25 일기’라는 부제로 출판된 김성칠(金聖七 1913∼1951) 교수의 ‘역사 앞에서’라는 책에는 이같은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1950년 7월3일과 8월22일의 일기 내용은 당시 북한의 국기와 국가가 갖는 의미와 이를 대하는 국민들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집집마다 인민공화국기(人民共和國旗)가 나부끼고 있다. 혁명(革命)과 해방을 상징한다는 붉고 푸른 바탕 속에 붉은 별이 반짝이는 이 기폭이 얼마나 많은 우리나라 젊은이의 동경의 표적이었던가, 또 증오의 과녁이었던가. (중략) 이 꿈 같은 이야기는 이제 엄연한 현실로 나타나서 포효(咆哮)하는 대포 소리가 우리의 귓전을 울리고 있지 않은가.

나도 붉은 잉크를 내어놓고 공화국기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우리 집 대문간에 달기 위해서다. 윗집 기가 혹시 격식에 틀리지나 않았을까 해서 일부러 동회 앞까지 가서 눈여겨보고 와서 그렸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서로 보고 멋없이 웃었다. 아침저녁으로 국기를 고쳐 그려야만 하는 우리 신세를 자조(自嘲)함에서였다.’
1950년 7·8월이라면 김성칠 교수가 서울대 사학과에 재직중이었던 때다. 그러니까 김교수가 그리고 있는 상황은 소위‘적 치하 90일’의 초입으로 서울에서 겪은 일이다.

동사무소에 북한 국기가 게양된 상황이니 살기 위해 태극기와 북한 국기를 번갈아 바꿔 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그린 내용이다.8월22일자 일기는 국가때문에 빚어진 일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양식을 구하러 여주·이천 지역을 다녀온 ‘불문학자 손(孫)선생’으로부터 남한의 ‘애국가’ 때문에 한 마을 사람들이 참화를 당했다고 들은 얘기를 그대로 기록한 대목이다.

‘인민군이 변복한 때문에 생긴 비참한 이야기 한 가지는 광주(廣州) 어느 산골길에서 피난민들이 보여서 애국가를 불렀거든요. 아니 ‘아침은 빛나라 이강산/은금에 자원도 가득한’(북한 국가의 제 1절 첫 소절 가사-편집자) 하는 것 말고 ‘동해물과 백두산’을 말이오. 그럴 수가 있느냐구요. 있다마다뿐 입니까. 백성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이 오늘날과 같이 불타오른 건 일찍 없었을 겁니다. (중략)
어느 한 사람이 ‘동해물과 백두산이’하고 목청을 돋우면 아무 것도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모두들 따라 합창하고, 그리고 마지막엔 통곡으로 변한다거든요. 한번은 이러한 장면을 변복(變服)한 인민군이 목도하고 갑자기 자기 권총을 내어서 난사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구요.’

아마도 이같은 상황은 전쟁기간 내내 전국에서 허다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실제 지리산 일대에서는 ‘낮 대한 밤 조선,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라는 말이 휴전이 성립된 뒤에도 한동안 통용되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에게 북한 국기와 국가는 곧 전쟁의 상흔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물인 것이다. 그래서 쌀을 보내는 등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또 이번 아시안게임 참가를 오히려 우리측이 적극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연주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를 삼게 되는 것이다.


국가상징은 체제경쟁과 갈등의 代理物

종전(終戰) 이후, 남북 간의 체제경쟁에서는 국가 상징을 내세운 대리전 양상이 적지 않게 벌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1954년초 비무장지대 안 인근 마을인 남한측 대성동과 북한측 기정동 마을 사이에 벌어진 ‘국기 높이 달기’ 싸움이다.1954년말 북측 기정동 마을에 30여m 높이의 깃대가 서고 그만큼 큰 북한 국기가 걸렸다. 이에 따라 게양과 하기식 때의 국가를 연주하는 확성기 소리 역시 점점 커졌다. 이에 맞서 우리 측 대성동 마을에서는 이듬해 그보다 18m가 더 높은 48m짜리 깃대가 섰다. 다시 2년후 기정동에 80m짜리 깃대가 서자, 그로부터 3년후 대성동에는 99.8m 높이의 깃대가 세워졌다. 다시 4년후 기정동에는 158m 짜리가 세워졌다.

장장 14년간의 경쟁이었다. 그 결과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깃대가 비무장지대 내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로, 과거 행정구역이 같았던 두 마을이 휴전후 남북으로 갈리면서 상호 체제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 이런 싸움은 너무도 똑같이 판문점 회담장 테이블용 깃발에서도 여러 차례 재연됐다. 그야말로 ‘기(氣)찬 기(旗)싸움’이었던 것이다.

이런 소모전은 또 다른 무대에서도 계속되었다. 바로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 때부터 시작된 남북 단일팀 결성 논의 과정에서 국가 상징 통일 문제가 제기돼 국기와 국가 문제로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때 우리는 단가로 ‘아리랑’을 제안했으나 북한은 두 나라의 국가를 25초씩 이어붙여 50초짜리 ‘짬뽕 국가’를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국가 문제는 결국 ‘아리랑’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국기 문제는 끝내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당시 북측은 양면에 남북한 각각의 국기를 그려넣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우리측은 ‘절대 불가’의 입장을 정하고 북한의 제안을 거부해 결국 결렬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1979년 제35차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동서 진영으로 양분돼 치러진 1984년 LA올림픽, 같은해 12월 따로 치러진 모스크바올림픽을 앞두고 남북이 단일팀 구성을 논의할 때도 국기와 국가 문제로 논란을 빚다 불발로 그쳤다. 우리로서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임을 내세워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연주를 북한이 거부하는 것에 대해 국가 정통성 침해로 보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은 북한대로 나름의 체제 우월성을 국제사회에 내세우고 싶어 끝까지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한국 올림픽 위원회(KOC·Korea Olympic Committe)는 만일 북한이 참가한다면 국기와 국가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획기적 제안을 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의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를 허용한 유사한 선례였으나 북한의 불참으로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 출전을 위한 회담에서 남북은 드디어 국기와 국가 문제에 관한 획기적 진전을 이룬다.

단일팀의 호칭은 ‘코리아’, 깃발은 ‘한반도기’, 단가는 ‘아리랑’으로 합의했다. 이는 적어도 체육 분야에서만큼은 국가 상징 논란을 벌이지 말자는 합의를 한 것이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남북 선수들이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동시 입장하기로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지금까지도 남북 사이에 통용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합의 중 하나였다.



북한 역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전에는 남한과 마찬가지로 태극기를 국기로 삼았다. 북한의 인민위원회 성립 기념식장에 내걸린 태극기.
단일팀의 ‘한반도기’‘아리랑’은 임시변통

그러나 이는 체육 분야의 단일팀 출전에 한정된 ‘임시변통’이지 남북간 체제경쟁과 갈등을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다. 그런 대표적 사건 중 하나가 1992년 대학가의 소위 ‘인공기 게양 사건’이다. 이때 일반적인 여론은 6·25를 겪지 않은 학생들의 치기어린 행동이라며 맹비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95년 6월에는 쌀을 싣고 북한에 들어간 우리측 선박인 ‘씨 아펙스호’에 게양한 태극기를 내리고 북한기를 올려달라고 강요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후자의 사건은 남북관계에서 국기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직접 해결에 나섰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그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북한은 (1995년) 6월25일 쌀 제공 관련 계약서에 합의 서명했으며, 우리쌀 1차분 2,000톤을 실은 ‘씨 아펙스호’가 이날 오후 강원도 동해항을 출발해서 청진항으로 향했다. 우리의 국적선이 태극기를 달고 북한 영해를 항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씨 아펙스호’는 그러나 청진항 진입과 쌀 하역작업중 북한측의 위협으로 북한 인공기를 달았던 것으로 (6월) 29일 확인되었다.

국제적인 관례는 국제선박이 외국 항구에 입항할 때는 상대방 국기를 중앙에 달고 선미(船尾)에 자국기를 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경(베이징·北京)회담(대북 쌀 지원 관련 남북 실무회담)에서 쌀 수송선은 어느 쪽의 국기도 게양하지 않기로 구두로 양해했었는데, 북한은 ‘마스터에는 인공기를 달고 선미에 있는 태극기는 내리라’고 위협한 것이다.”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추가적인 쌀 지원의 전면중단 지시를 내렸다. 그만큼 파문이 큰 사건이었다. 우리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런 강제적인 행위는 태극기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라며 북한을 거세게 비난했다. 국기가 그 나라의 주권을 표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북한이라고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어떤 이유로든 태극기가 북한 영토 내에서 게양되는 것은 자신들의 국가상징 체계와 정통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해방후 1년만에 새 국가상징 준비

그렇다면 과연 북한의 국가상징은 어떤 배경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태어났을까. 이제 그 과정들을 살펴봄으로써 북한의 국기와 국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접근해 보기로 한다.
북한이 1945년 8월말 소련군 진주(進駐)를 환영하는 군중대회에서 소련기와 함께 내건 국기는 태극기였고, 국가는 ‘구 애국가’를 사용했다.‘구 애국가’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애국가’ 가사를 ‘올드 랭 사인’이라는 외국곡에 맞춰 부르는 것을 말한다. 북한 또한 정부 수립 이전이었으므로 정황상으로는 당연했다고 본다.

북한은 이후로도 1946년 2월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결성식, 평양 3·1절 기념식, 1947년 7월 평남 강동군 남녀평등권 법령 공포 1주년 기념식, 1947년 8·15 해방 2주년 기념식, 11월 헌법제정위원회 개최식, 1948년 인민군 창설식, 같은해 4월 남북정치협상회의, 1948년 5·1노동절 기념식에서도 태극기와 ‘구 애국가’를 국가상징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이처럼 북한은 적어도 남한이 단독정부 수립을 기정사실화한 1948년초까지 다수의 대외행사에서 태극기와 구애국가를 사용했다. 이를 근거로 일부 북한 문헌에서는 북한이 남북정치협상회의가 끝날 때까지는 북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지 않고 기다렸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북한은 대외적으로는 태극기와 ‘구 애국가’를 국가상징으로 내세우면서도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국가상징 제정을 나름대로 착실히 준비했음이 확인되고 있다.그런 단서는 북한이 이미 그때부터 태극기와 애국가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북한은 헌법제정위원회 위원장으로 실력자였던 김두봉을 통해 태극기의 부정적인 면을 본격적으로 제시하게 했다. 김두봉의 주장에 의하면 태극기는 ①미군정청이 권유하고 있으니 어울리지 않고 ②태극기의 근거인 주역이 비과학적이고 ③표준성도 없고 ④도형이 각양각색이어서 문제라는 것이었다. 이는 김두봉이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시절 태극기에 대해 일견을 피력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때 김두봉은 “오족의 영광은 세계 4방에 펼쳐야 했더니 4궤는 이를 시(示)함”이라고 하여 태극기의 4궤야말로 국위를 세계에 펼치는 표시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두봉은 1946년 7월18일 ‘북조선통신’과의 회견 형식으로 위와 같은 태극기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새삼스럽게 공표했다. 그리고 그해 8월20일에는 ‘신(新)국기의 제정과 태극기의 폐지에 대하여’라는 책까지 출판한다.북한에서 국기에 대한 규정은 애초 헌법 초안에 규정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948년 2월20일 헌법제정위원회의 헌법 초안 심의시 통과시켜야 했고, 4월28일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확정·규정화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국가는 당시 헌법 초안뿐 아니라 사회주의 헌법에서도 명시하지 않았다가 1992년 수정헌법 제170조에서 “국가는 ‘애국가’로 한다”고 성문화(成文化) 했다.


북 국가상징, 김일성 교시 영향 절대적

북한의 헌법에 국가가 국기보다 늦게 언급된 것을 근거로 북한에서는 국기가 국가보다 먼저 제정된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국가 제정이 더 먼저였다. 북한이 국기보다 국가를 먼저 제정하게 된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북한의 ‘애국가’ 작사자인 박세영(朴世永)은 월북한 직후인 1946년 6월27일 김일성을 만나 국가 제정 문제를 제기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애국가’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애국가’는 해방 전후에 불렸던 ‘구 애국가’를 가리킨다.

“인민들은 옛날에 부르던 낡은 노래를 그냥 부르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가사 내용이 우리 인민의 내용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보수적이며 곡도 남의 것을 따라 만든 것인데 그 곡 자체가 시원치 않습니다. 이 노래를 가지고서는 새 민주조국 건설에 일떠선 우리 인민을 애국주의 사상으로 교양할 수 없습니다.”
옛 것으로 가사가 보수적이고, 곡이 다른 나라 것이라고 문제삼은 것이다. 이는 ‘구 애국가’의 정통성을 새삼 문제삼은 것이어서 지금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그러나 후자는 ‘올드랭 사인’이 외국곡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인데, 사실 이 시점은 적어도 남측에서는 신곡보(안익태 곡)가 충분히 보급된 상황이어서 문제되지 않을 때였다. 그러면서도 외견상으로는 기존의 상징물(남측에서 쓰고 있는)에 모순이 있기 때문에 새로 제정해야 한다는 논리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이때 다음과 같은 ‘교시’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나라를 찾은 우리 인민들이 아직 애국가를 부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애국가를 곧 써야겠습니다. 여기에는 모든 작가들이 참가해야 하겠고, 작가가 아니라도 쓰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산들은 기세차고 장엄합니다. 전원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습니다. 또 우리나라는 지하자원도 무진장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민은 5,000년 유구한 력사를 가진 인민이며 찬란한 문화로 빛낸 인민입니다. (중략) 인민들이 부르면 자기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더욱 솟아날 것입니다. 인민들에게 속히 이런 애국가를 주어야 하겠습니다. 당당한 우리 조국의 노래를, 국가를 주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북한의 ‘애국가’에 대한 김일성의 제정 의도와 노랫말에 대한 배경을 알 수 있다. 특히 “속히 인민들에게 이런 애국가를 주어야겠습니다”라는 표현에서 사회주의 국가 제정의 일반적인 과정인 ‘공모­제정­공포­시행’이라는 절차를 거치되 속히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공모’란 이미 작사·작곡자를 내정한 상태에서의 형식적인 공개 참여를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남한이 애국가를 국가로서 법으로 규정화하지 않은 것을 염두에 두고, 통일 후까지 북한이 제정한 ‘애국가’에 국가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취지에서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 ‘애국가’ 작사자로 월북 문인 박세영을 내세운 것에서부터 다분히 이러한 의도가 엿보인다. 박세영은 월북 직전 남한에서 ‘새 애국가’ 제정을 주장했고, 그 실무 책임자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남북 ‘애국가’ 제정에 모두 참여한 월북 문인 박세영

1946년 1월 서울에서 발간된 월간 ‘인민’이라는잡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 대목이 나온다.
‘참으로 조선의 애국가를 창조해 내자는 계획이 구체화하고 있다. 작사는 예술동맹의 권 환·박세영, 문학건설본부의 임 화·김기림의 4씨가 담당하였다.’
박세영이 북한의 ‘애국가’ 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경력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한 ‘애국가’의 문제점을 충분히 검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세영이 직접 쓴 ‘애국가에 깃든 이야기’라는 글에서도 같은 맥락의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논의 시점이 6월 말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부터 북한이 그동안의 주장과 달리 단독정부 수립 의지를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그로부터 2개월 뒤 김일성의 다음과 같은 지시에서도 확인이 된다.

“이번에 8·15 해방 한 돌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국가를 부르지 않고 기념 보고회를 하고 보니 생각이 많습니다. 원래 그런 정치 행사 때에는 국가를 부르거나 주악하여야 합니다. 일제 때에는 우리나라가 식민지였기 때문에 모임을 하면 인민들이, 놈들이 시키는 대로 일본 국가를 불러야 했지만 이젠 주권을 우리 손에 틀어쥐고 새 조국을 일켜 세우고 있는데 우리 인민이 부를 수 있는 우리의 국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 글은 ‘조국에 대한 애국심 고취를 위해 국가가 필요함’을 역설한, 앞의 지시보다 한층 더 적극적으로 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8·15 해방 1주년 행사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고…’ 보고대회를 마쳤다는 기록에서 북한의 ‘애국가’ 제정 준비 시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김일성의 국가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을까. 이 의문은 북한 ‘애국가’의 전체적인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 기사에서 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란 나라의 노래, 조국에 대한 노래라는 말입니다. 모든 민족국가들에게는 자기 나라를 찬양하고 자기 나라 제도의 영원성을 노래한 국가들이 있습니다. 국가는 주권을 잡은 계급이 자기들의 계급적 지배를 튼튼히 다지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국가적으로 제정한 노래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예리한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인민들이 부르는 국가는 조국에 대한 그들의 열렬한 찬양과 숭고한 사랑을 담은 인민적인 노래로 되어야 합니다.”
‘주권을 잡은 계급이 자기들의 계급적 지배를 튼튼히 다지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국가적으로 제정한 노래’라고 매우 적극적인 해석을 한 것이다. 특히 김일성이 앞의 글과는 다르게 ‘애국가’ 대신 ‘국가’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이는 북한이 기존의 ‘애국가’(구 애국가를 지칭­편집자) 와의 절연의 의지를 담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북한의 국가 제목을 ‘애국가’로 붙인 것은 남한의 ‘애국가’의 문제점을 들어 ‘진짜 애국가’라는 의미를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북한의 ‘애국가’에 담으려 했던 내용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 김일성은 국가를 제정하는 것이 다른 가요를 창작·보급하는 것보다 중요한 사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했다.
“우선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과 유구한 력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것이 잘 나타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일제 침략자를 반대하여 장기간에 걸쳐 항일 무장투쟁을 벌렸으며 마침내 조국을 광복한 슬기로운 인민이라는 자부심이 잘 표현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또 해방된 우리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 긍지와 자부심, 새 민주조선 건설의 주인으로서 부강하고 문명한 인민의 나라를 건설하고 세세년년 행복하게 살려는 인민의 절절한 념원을 담아야 하며 자기 조국에 대한 애착과 사랑의 감정이 솟구쳐 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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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煉甲
1954년 충북 청원 출생
(주)문화정보 조사부장
국가상징연구회 연구위원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위원
저서 ‘애국가 작사자 연구’
‘국가 애국가 연구’ 등 다수


1948년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당시 김일성 국가주석(왼쪽에서 첫번째)과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태극기와 인공기를 걸고 있는 역사적인 사진이다.
‘조선 음악 선율’에 ‘예리한 계급적 성격’ 담아

이 발언을 분석해 보면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내용을 북한의 ‘애국가’에 담도록 지시한 것이다. ①유구한 역사와 문화 ②항일 무장투쟁으로 얻은 광복의 슬기와 그 자부심 ③해방된 조국의 주인은 인민이라는 사실 ④새 조국 건설과 조국에 대한 인민의 애착과 사랑하는 감정이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예리한 계급적 성격을 띄게 된다’는 지시와 상통하는 내용이다.

이 지시에 이어 음악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김일성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조선 음악 선율’등을 들어 지시하고 있음은 자신의 뜻대로 이미 작곡 방향을 정한 것이나 다름 없다.
“조선에 대한 사랑의 노래인 ‘애국가’는 새 민주조선의 국가로서 중요한 노래인 것인 만큼 깊이가 있고 장중한 맛이 나게 지어야 합니다. 곡도 조선 음악 선율이 잘 나타나고 조국을 사랑하는 인민들의 사상 감정이 승화되게 형상을 해야 합니다. 슬기로운 우리 인민의 기상, 조선의 기상이 잘 나타나게 하며 참된 인민의 나라를 대대손손 빛내여갈 불타는 결의와 엄숙한 맹세가 그대로 표현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 작사는 박세영, 작곡은 김원균이 주축이 되어 진행했다. 그 결과 작사는 1947년 5월, 작곡은 같은해 6월27일 완성되었다. 그리고 형식상 공모에 응한 작품들과 함께 김일성이 참관한 가운데 ‘시청회’(試聽會)가 있었고 이 자리에서 곡조에 대한 일부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원안대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북한 국가인 ‘애국가’는 박세영 작사·김원균 작곡의 전 2절로 다음과 같다.

1)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래 력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2) 백두산 기상을 다 안고 근로의 정신은 깃들어
진리로 뭉쳐진 억센 뜻 온 세계 앞서 나가리
솟는 힘 노도도 내밀어 인민의 뜻으로 선 나라
한없이 부강하는 이 조선 길이 빛나세

그런데 노랫말에서 ‘인민’이란 표현을 제외하면 여타의 혁명 송가와는 가사가 사뭇 다르다.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강조하라”는 지시에 의해 쓰게 된 ‘김일성장군의 노래’의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과 같은 노랫말에 비하거나 ‘조중친선의 깃빨’이나 ‘승리의 깃빨’ 같은 작품과 비교해도 그렇다.
그러나 더욱 주목되는 것은 북한 애국가의 노랫말과 우리 ‘애국가’ 4절을 비교할 때 의외로 같은 단어가 꽤 많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 ‘애국가’의 1절의 ‘백두산’과 2절의 ‘기상’이 북한의 ‘애국가’ 2절 첫 부분에서 쓰이고 있고, 우리 ‘애국가’의 후렴인 ‘삼천리’와 ‘강산’은 북한의 ‘애국가’ 1절에 나오고 있다. 여기에 우리 ‘애국가’의 ‘화려’란 단어를 북한의 ‘애국가’ 1절의 ‘아름다운’으로 보고, 우리 ‘애국가’의 ‘길이 보전하세’를 북한의 ‘애국가’ 1절의 ‘길이 받드세’와 같다고 볼 때, 결국 두 국가 간에는 7개의 노랫말이 공통으로 쓰였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이 시기 북한 문헌에서는‘백두산’을 ‘장백산’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은데, 북한의 이 ‘애국가’에서는 유독 ‘백두산’이라고 쓰고 있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작사자 박세영이 월북 전에 남한에서 ‘새 애국가’ 제정 작업에 앞장섰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하다. 말하자면 박세영이 남한에서 준비했던 ‘새 애국가’의 주요 술어를 은연중에 다시 사용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박세영이 작사한 북한의 ‘애국가’ 가사는 극단적으로 말해 월북 직전에 이미 남한에서 준비했던 것일 수 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처럼 일찍 제정은 했지만 북한에서 이 ‘애국가’의 보급 시기는 이보다 1년쯤 늦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허 헌(許憲)의 장녀로 1948년 문화선전상을 역임한 허정숙이 쓴 ‘민주 건국의 나날에’라는 글에서 시청회 이틀 뒤인 1947년 6월29일 국가로 공식 확정해 보급했다고 기술했으나, 북한측의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이와 관련, 김일성의 교시 ‘애국가와 인민군행진곡을 창작할데 대하여’라는 자료를 검토해보면 그 이유가 확인이 된다.

“지금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 도당이 민주주의적인 통일적 중앙정부의 수립을 가로막고 남조선에서만이라도 지주 자본가들의 제도를 유지해 보려고 날뛰고 있습니다. 놈들은 저들의 음흉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유엔에 조선 문제를 끌고 갈 꿍꿍이를 하는 한편 우리를 걸고 들을 구실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애국가’를 보급하고 쓰기 시작하면 놈들이 북조선에서 독립정부를 세우려고 국가까지 제공해 공개하였다고 떠벌일 것입니다.
이것은 통일적 중앙정부 수립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에 복잡성을 조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제와 리승만 괴뢰 도당에게 절대로 언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복합적인 이유로 대외적인 공포가 생략되었고, 사용 또한 늦춰진 것이다. 나아가 1948년 북한의 ‘인민민주주의헌법’에도 성문화하지 않았다. 그러다 남측에서 통일 후의 국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에 대비해 ‘아리랑’이나 ‘애국가’와의 정통성 문제를 고려하여 1992년 수정헌법에 명문화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 국기의 공식 명칭은 ‘인공기’가 아니라 홍람오각별기’다. 또는‘남홍색공화국국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은 자신들의 국기에서 ‘홍남색의 오각별’을 강조한다. 아닌게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 별이 들어간 외국 국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별 모양이 오각형이 아니라 육각형이 대부분이고, 그것이 훨씬 일반적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홍람색’이란 색깔과 오각형 별 모양에 담긴 비밀은 무엇일까.



올해 8월 스리랑카에서 열린 제14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여자 5,000m 경기에서 우승한 북한의 함봉실 선수가 인공기를 들고 트랙을 돌고 있다.이번 부산 아시아게임에서도 이같은 모습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오각형 별 모양에 담긴 비밀

북한에서 이 국기의 제정을 논의한 시점은 1947년 11월 중순으로, 제3차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 발족과 함께 시작되었다. 북한의 국기 제정 과정의 실무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주경의 기록 ‘우리나라 국장과 국기에 깃든 이야기’에 의하면 홍람색이나 오각별은 하루 아침에 선택된 단순한 색깔이나 별 모양이 결코 아니었다.

이는 다음의 김일성 교시에서 확인이 된다.
“우리나라 국기와 국장은 어느 나라 것과도 다른 완전히 새롭고 조선적인 것으로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기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손에 무장을 들고 오랜 기간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여 영웅적으로 싸운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숭고한 애국주의 정신이 깃들어 있게 하며 조선 인민이 당의 주위에 굳게 단결하여 조국의 통일독립과 번영을 위한 투쟁에 몸 바쳐 싸우려는 애국적 열의와 혁명 승리의 불패의 위력을 표현하여야 합니다.”
이 첫 교시는 제정에 참여한 미술가들에게 국기 도안의 기본 방침을 제시한 것이다. 앞의 김주경의 기록에 따르면 이 교시가 ‘국장과 국기 초안을 안타깝게 모색하던 눈을 확 트이게’ 하여 국기에 담아야 할 사상 내용과 방안을 학습하여 본격적으로 착수해 갔다.

북한의 국기에 대한 첫 안(案)이 한 달 후쯤 제시되었는데, 그 바탕에 대한 도안 중 하나는 한가운데를 붉은 색깔로 한 것이다. 이 색깔이 안으로 제시될 때는 북한의 물리학자까지 동원해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대학 물리수학부장 도상록의 ‘새 국기에 대한 감상담(4월17일 ‘민주조선’)’이 그중 대표적인 것이다. 도상록은 붉은빛, 푸른빛, 흰빛에 대한 물리학적 설명과 의미를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붉은빛은 프리즘을 통해 나타나는 빨강·주황·노랑·초록·파랑·남색·보라색 중에서 파장이 가장 긴 것으로, 파장이 긴 색광일수록 에네르기가 강하다는 원리대로 붉은빛은 에네르기가 가장 강하다. 새 국기에 붉은 빛이 중앙에 비교적 넓은 면적으로 들어 있는 것은 광범한 인민대중의 민주역량이 강렬하며 위대하여 그 기반 위에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하고 또한 건립한 국가를 길이 길이 보위할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붉은 별은 민족의 진로와 역사적 방향을 힘차게 계시하는 것을 상징한다.

위 아래 푸른빛은 에네르기는 붉은빛보다 모자라나 시신경을 자극하는 힘은 붉은빛과 같은 정도이다. 이 푸른빛은 고요한 바닷물빛, 맑은 하늘빛으로 평화 애호와 화평을 확보하는 상징이 된다. 흰빛은 만물을 비춰 주는 햇빛처럼 광명과 희망을 상징하는 색이다. 또 흰빛은 모든 색이 종합되어 나타나는 통일적 현상인 만큼 전체 인민의 통일을 상징하는 것도 된다.”


백두산, 해, 보습 대신 오각별 선택

이같은 의미를 담은 색깔을 바탕으로 아래 위 흰색과 푸른색을 칠하고 가운데에 흰 동그라미를 그린 안이었다. 그렇지만 이 동그라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유사한 안을 가지고 다시 심의에 올렸다.그 결과 김일성은 첫 안을 가지고 흰 원(圓)안을 국기의 핵심으로 처리하라고 교시했다. 이에 따라 미술가들은 그 핵심을 ①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전통 ②수령의 혁명사상 ③인민의 미래상을 넣기로 했다. 이런 배경 아래 원 안에는 검토 과정에서 백두산이 자리하기도 했고, 해(태양)를 넣기도 했고, 보습도 넣어봤다.

이때 격렬한 논란이 일었는데,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보습을 넣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보습을 넣자고 주장한 이들은 이것이 농민을 중심에 둔다는 의미라고 했다. 반대자들은 이 보습이 후진적인 농기구이기 때문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결국 상대방을 ‘반당종파분자’로 몰아가는 것으로 확대되어 김일성이 위의 세 가지가 아닌 전혀 다른 오각별을 넣으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이때 김일성은 오각별의 상징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영광스러운 항일무쟁투쟁의 빛나는 혁명전통을 계승한 우리 당의 영도 하에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장래 번영을 위하여 힘차게 나아가는 조선인민의 빛나는 승리의 전망을 상징한다.”
이에 김두봉도 이렇게 별을 넣은 것은 “전도양양한 신흥 국가의 상징”이라고 격찬하며 지지하고 나섰고, 미술가들도 한결같이 구도학적으로도 완벽하다고 응수함으로써 국기 안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하여 국기에 대한 최종규정은 1948년 2월 초순 홍색과 남색 선 도안에 오각 별을 넣는 것으로 정해 4월28일 북조선인민회의에서 헌법 조문 제 100조에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는 횡으로 가운데가 붉고 아래 우로 희고 푸른 새 빛의 기폭에다가 깃대 달린 편 붉은 쪽의 흰 동그라미 안에 붉은 오각별이 있다. 기폭의 종횡 비례는 1대 2로 한다.’
북한의 국기와 국가는 이런 배경과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이후 1947년 11월 북조선 임시헌법제정위원회, 1948년 4월2일 인민회의 특별회의, 7월10일 헌법 공포,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성립,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선포 등의 역사성과 소련으로부터의 정부 승인 이후 유엔 동시가입과 같은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국가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의 국기인 ‘홍람오각별기’와 ‘애국가’ 처리 문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단순히 북한에 대한 대결 논리나 감상적인 차원에서의 대응이 아니라 우리 국기와 국가의 역사성과 정통성과도 비교해야 하고, 특히 통일 후의 상황에도 대비한다는 자세여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양국의 국가상징 체계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여기서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반드시’라는 전제가 포함된 것으로, 1950년의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에 대한 배려다. 사실 우리가 올림픽과 월드컵 경기 등에서 수많은 외국 국기와 국가를 접한 경험에서 확인했듯 국가상징이란 단순히 ‘한 나라를 기호나 문양 그리고 음악으로 나타낸 표식’ 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폈듯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안고 있는 우리로서는 북한의 국기와 국가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정통성 문제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제한적’이란 역사성, 정통성 문제와 관련해 과연 어느 정도까지를 말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포괄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렇다. 단적으로 말해 역사성이란 3·1운동과 그 전후의 민족운동 현장에서 태극기와 애국가가 어떤 역할을 했느냐에 대한 것으로, 이에 대한 민족사적 의의를 무엇으로 상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 국가는 이런 점에서 역사성이 없는 것이다.

정통성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법적 논리로써의 정통성 문제는 양측이 서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논의의 여지조차 없다. 그러나 국제 체육행사에서 ‘단일팀’ 또는 민족 통합을 전제로 한다면 간단하다. 즉, 제도적 차원에서의 정통성은 우리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이니 문제가 없고, 북한은 김일성의 의사가 지배적으로 작용했지만 나름의 절차를 밟아 공포, 사용한 것이니 문제가 없다.

다만 정서적인 정통성 문제에서는 국가에 한정해 보면 내용과 작사, 작곡자의 문제가 있게 된다. 즉, 내용이 민족 통합에 저해되거나 부적합한 것이 없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애국가’의 경우 특정 종교의 술어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보수적이라는 내용 시비, 그리고 민족음악 어법에 의한 것이냐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북한 역시 ‘인민’과 같은 술어의 적합성 여부와 음악성의 문제가 똑같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작사, 작곡자의 친일성 문제일 것이다. 모두 일제말 격변기를 거친 인물들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양측의 국기와 국가 모두 어느 정도는 논리적 흠결을 지니고 있다. 이는 통일후 국기와 국가의 새로운 제정을 요구하는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현재 남북의 국기와 국가는 말 그대로 통일이 될 때까지 남북에서 한시적으로 사용하고, 통일에 대비해 새로운 국가상징 제정을 위한 남북간의 공동 논의와 연구를 지금부터라도 시작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남북 단일팀을 나타내는 한반도기부터 공동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남북 사이에 국기와 국가를 둘러싼 끊임없는 논쟁과 갈등이 계속되는 시점에서 이 방안이 어쩌면 유일한 현실적 대안(代案)이 아닐까 싶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이번 부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북한 국기와 ‘애국가’를 국민들의 관심사 속에 일정 거리나마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북한의 국가상징이 우리 국민들에게 직접 노출되는 이상 금기와 터부의 대상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제정 배경과 의미를 설명해 주고 국민들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외면한다면 국민들 사이에 ‘무조건 수용’, 또는 ‘무조건 거부’ 식의 극단적 감정싸움만이 지리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북한의 국가상징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력과 방어력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번 아시안게임에 북한의 참여를 극구 요청했던 것도 민족 통합을 앞당기는 한 방안으로 생각했다면, 북한의 국가상징을 대하는 자세에서도 우리 정부나 국민 모두 보다 성숙한 의식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한민족 아리랑연합회'

이름아이콘 장미주
2009-09-15 17:54
아 김대중 전대통령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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