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라이 에이치의 망향가
2002-05-03 SBS 뉴스레터 '김수현의 문화가 산책' 재일동포 가수 아라이 에이치 안녕하세요? '계절의 여왕' 5월입니다. 어제까지 하늘이 그렇게 푸르기만 하더니, 오늘은 비가 내립니다. 어린이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내일과 모레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지금쯤 어린이날 놀러갈 계획에 가슴 설레고 있을 어린이들이 많을 겁니다. 저희 딸은 아직 어려서 어린이날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는 것 같은데, 근처 할인점에서 온 어린이날 선물 광고전단은 손에서 놓지 않고 들고 다닙니다. 장난감이 그려져 있으니까 제 눈에도 좋아 보였나 봅니다. '엄마, 이거 한번 같이 보자' 하면서 동화책 보듯이 읽어달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장난감 하나 사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참입니다. 이번주에는 개인 사정으로 편지가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편지 기다리셨나요?^^) 지난주에 저는 짧은 지방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재일동포 가수 아라이 에이치 씨의 부산 공연을 취재하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이미 지난주 목요일 8시 뉴스에서 '테마기획'으로 보도한 바 있습니다만, 너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서 힘든 리포트였습니다. 넘쳐나는 이야기들을 단 2분의 리포트로(그나마 다른 리포트보다는 훨씬 긴 시간을 배당 받은 것이었습니다만) 압축한다는 게 막막해, 이 리포트에는 다른 때보다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렸습니다. '뿌리'를 노래하는 재일동포 가수 아라이 에이치 씨는 현재 일본에서 꽤 유명한 블루스 가수입니다. 그의 음반은 일본 음반대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고, 해마다 카네기 홀에서 초청공연을 할 정도로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백만금을 준다 해도 노래하지 않습니다. 길거리와 탄광촌, 절, 학교, 종군위안부 유적지. 그는 이런 곳을 찾아다니며 노래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일본어 노래의 공연이 금지됐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특별한 것은 '뿌리'와 '고향'을 찾고, 노래하는 가수라는 점입니다. 그는 1950년 한국인 아버지와 한일 혼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북 영일군 청하면이 고향인 그의 아버지는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왔고, 중노동 끝에 얻은 결핵으로 아라이 씨가 태어나자마 자 요양소로 떠났습니다. 고물상을 하던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훔친 물건을 샀다는 죄명으로 형무소에 끌려갑니다. 이 사실이 지방 신문에 실리면서, 그는 학교 친구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울분을 풀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는 소년이 되어 갑니다. 15살 때 가출한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미군부대의 술집에서 일하게 됩니다. 재즈와 블루스, 컨트리 뮤직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던 그는 21살 되던 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이 때쯤 한 많은 삶을 살아온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납니다. 함께 살지 않아서였는지 그는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미국 땅에 건너가, 눈이 파란 외국인들의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코리안 재패니즈'이다, '아시아의 피를 잇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인종의 도가니 뉴욕에서 식당 일을 하고 싸구려 술집에서 음악을 듣는 생활 4년만에 그는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음악을 하고 싶어 가수로 데뷔했지만, 그리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은 1986년에 찾아옵니다. 가수의 길이 순탄치 않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절망에 빠져 있던 그는 어느 날, 무작정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나섭니다. '아시아의 넓은 땅 보고 싶어서' 나선 길, 부산항으로 배를 타고 와서 버스 타고 찾아간 아버지의 고향 청하. '이제사 왔냐'고 반가이 맞아주던 시골 마을과 고향 사람들. 그는 자신의 이름 아라이 에이치(新井英一), 한국명 박영일이 '아리랑'의 '아라리요'와 영일만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뿌리를 깨닫습니다. 가슴 밑바닥에 깔려있던 한과 울분, 분노도 날려버리고, 흐리기만 했던 그의 마음은 개인 하늘처럼 맑아집니다. 이 여정은 9년간의 작업 끝에, 아리랑과 블루스가 어우러진 48절의 대작 '청하의 길'(1995년)로 태어납니다. 고난과 방황 속에 보낸 젊은 시절, 음악에 대한 열정,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해답이 담겨있는 이 노래는 그 자체로 그의 인생의 행로요, 한 편의 시와 같습니다. 좀 길지만 이 노래의 가사를 일부 적어보겠습니다. 이 노래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설명도 필요 없어 보이니까요. (이 노래의 한국어판은 1999년에 발표돼 국내에 나와있습니다. 노래 한 곡이 CD 한 장입니다.) 청하의 길 제 1장 (여행길) 1. 아시아의 넓은 땅 보고 싶어서 나는 혼자서 길 나섰네 현해탄을 배로 건너 부산항구를 바라보면서 날이 새는 것을 기다렸었네 2. 부산의 부두에서 버스를 타고 해운대 바다 보았네 이곳이 아버지의 고향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그리웠던 기분이 든다. 3. 우리말을 못하는 슬픔에 손짓 발짓으로 얘기했지 나는 이곳에 가고 싶다고 한반도 지도를 펴놓고 경상북도를 가리켰었네 4.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서 겨우 경주로 왔었지 짐을 등에 메고 사람 파도 속을 우왕좌왕 헤맸었네 가슴에는 아득한 노스탤지어 5. 하도 배가 고파서 뛰어들어간 한글 간판의 식당에서 남들이 맛있게 먹고 있던 '저것하고 같은 걸 주이소'라고 뭔지 미안한 마음으로 살펴보았네 6. 아버지의 태생은 청하라서 아직도 여기서는 먼 동네 또다시 버스를 올라타고 산을 몇 갠가 넘어섰을 때 드디어 청하에서 내려섰다. 7. 하염없이 이어진 기나긴 길 저기 저 멀리 산이 보이네 아버지도 그 옛날 이 길을 걸어서 오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서서히 뜨거워지네 8. 이제사 왔냐고 내 고향이 두 손 벌려서 기뻐하며 반가이 맞아주는 기분이 나는 사랑스런 대지에 바람이 불어 혼자서 걸어가는 청하의 길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나는 간다. 제 2장 [고향] 9. 면사무소로 달려가서 아버지의 호적을 찾았지 일본말이 통하는 아주머니가 친절히 통역을 해주어서 아버지 호적을 찾아내었소 10. 그 속엔 내 이름도 적혀져 있어 어쩐지 반갑고 흐뭇한 기분 아버지 태어난 곳 가고프다고 한번만 그 마을 보고싶다고 아줌마께 졸라서 함께 가봤소 11. 마을에서 떨어진 강기슭에 외로이 서있는 집 한 채 그 집에 살고있는 주인을 찾아 옛날 이야길 물어봤더니 예가 바로 박씨네 집이었다오 12. 아버지 태어난 이 땅에 마침내 나는야 돌아왔구나 걸음을 멈추고 온종일을 여기서 묵묵히 있고싶었지 산에는 아직 눈이 남아 있었네 13. 친절히 대해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방금 오던 길 다시 되돌아 홀로 천천히 걸어갔다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14. 마을을 나서니 나의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바다 저 바다 이름은 영일만이래 나의 이름도 영일이라 같은 이름이란 걸 처음 알았네 15. 나라에 국경이 있다하여도 부자간엔 그런 것 있을 수 없지 이제까지 흐려서 보이지 않던 눈앞이 트이고 맘은 환해져 안개개인 하늘처럼 맑아졌다오 16. 슬픈 시대가 있었음을 나는 잊지를 않고 있지만 과거에 매달려 사느니보다 내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게 인생의 길인 줄 알았다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나는 간다. (중략) 제 6장 [가족] (중략) 45. 밤기차에 흔들리며 부산까지 오는 동안 내 인생을 생각했지 내가 이제부터 돌아가는 곳 이웃의 일본이라 하는 나라 내가 나서 자라난 나라일세 46. 부산항에서 잠시 멈추어 돌아가는 배를 기다렸었네 이윽고 뱃전에 올라타니 서서히 항구가 멀어진다 아버지의 나라가 멀어져간다 47. 긴 여행 끝에 내 집에 와서 마중 나온 우리 가족을 보니 모두의 환한 얼굴 반기면서 가족들이 우리들의 나라라고 처자들을 부둥켜 안았다오 48. 나의 뿌리는 대륙이요 조선반도라고 불리는 곳 나의 아버지는 그 옛날에 바다를 건너서 왔소라고 자자손손 대대로 전해 주리라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나는 간다. 청하 하늘에 울려퍼질 그의 노래 저는 부산 공연을 취재하고 그의 노래에 반해버렸습니다. 처음 서는 한국의 무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하는 그의 얼굴에는 단단한 의지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노래에는 영혼을 두드리는 울림이, 강렬한 에너지가 숨쉬고 있었습니다. 그가 겪어온 세월이 그대로 듣는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고난과 시련 속에서 찾아낸 희망이 느껴졌습니다. 부산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열린 이 공연에는 일본에서 온 팬들을 포함해도 50명 남짓한 적은 관객들이 모였지만, 그리 크지 않은 이 공간에는 벅찬 감동이 가득했습니다. 그의 한국 공연을 성사시킨 사람들은 이렇게 그의 노래에 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상업적인 공연기획사 사람들이 아니라, 아라이 씨의 음악을 사랑하고, 재일동포의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들입니다. 부산을 시작으로 광주, 서울, 경주에서 열린 아라이 씨의 공연은 이들 '아라이 공연 실행 위원회'의 헌신적인 '자원봉사'로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아라이 씨도 공연 개런티는 생각도 않고 기꺼이 한국으로 달려왔습니다. 그의 공연 일정은 5월 4일, 아버지의 고향 청하에 있는 청하 중학교 운동장에서 끝을 맺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에서 울려퍼질 그의 노래, '청하의 길'. 이제까지 '청하로 가는 길'을 걸어왔던 그는 이제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청하에서 다시 시작되는 그 길은 그의 인생의 길이기도 합니다. 부산 공연에 왔던 한 관객은 그의 노래를 처음 듣고 너무 감동해서, 청하를 직접 찾아가 봤다고 했습니다. 저도 청하에 가보고 싶습니다. 고향 마을에서 울려퍼지는 그의 절창을 다시 한번 듣고 싶습니다. (이번 주에는 정보 차원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볼 만한 공연을 소개해 드리려고 했었는데, 아라이 에이치 씨 이야기를 먼저 보내드립니다. 곧 다른 소식도 정리해서 보내드릴게요.) 김수현 기자 shkim@sbs.co.kr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