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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이 좋을까, 외제가 좋을까.
2002-05-22 SBS 뉴스레터 '김수현의 문화가 산책' 안녕하세요? 화창한 봄날입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뭐 항상 비슷합니다. 취재 나갔다가 기사 쓰고 편집하고, 또 취재 나갔다가 기사 쓰고 편집하고, 기삿거리 떨어지면 어디 없나 찾아다니고, 이곳저곳 전화해보고, 그러다 거리가 생기면 또 나가고, 그렇습니다. 오늘도 기삿거리를 찾아야 하는 날이라, 사무실에서 컴퓨터, 전화 붙들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 저는 모스크바 국립 클래시컬 발레단의 공연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러 국립극장에 다녀왔습니다. 이 발레단은 한국을 처음 찾은 단체인데 '러시아와 세계 발레계에 다크호스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1966년 안무가 모이세예프가 창단했고, 1977년 예술감독과 발레 마스터로 블라디미르 바실료프와 나탈리아 카사트키나를 영입하면서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바실료프(71살)와 카사트키나(68살)는 볼쇼이 발레단 수석 무용수 출신으로, '인민예술가' 칭호까지 받은 발레의 대가들입니다. 이번에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바로 이 두 사람이 함께 안무해 1981년 초연한 작품입니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젊은이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셰익스피어의 원작은 여러 예술장르로 다시 태어나곤 했는데, 발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938년 키로프 발레극장에서 처음 발레로 공연됐고, 볼쇼이에서는 1946년에 올려졌으며, 이후 여러 안무가에 의해 끊임없이 개작됐습니다. (지지난해 국립발레단에서 공연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천재 안무가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가 안무한, 비교적 최근의 작품입니다.) 기대가 너무 컸을까...... 사실 한국에서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을 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1988년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내한공연 이후 키로프 발레단,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 등이 한국을 찾았지만, 손에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모스크바 국립 클래시컬 발레단'이라는 단체 이름은 좀 생소했지만, 예술감독이 저도 들어본 유명한 사람인데다, 해외 언론들의 평도 좋아, 본고장 발레를 본다는 기대를 안고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날 발레 공연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였을까요. 좋게 말하면 '너무나 고전적'이고 '정직한', 좀 심하게 말하자면 '뻔한' 동작이 반복되는 안무는, 예술감독 부부의 안무자로서의 재능이, 그들이 무용수 시절에 누렸던 명성만큼 빛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무대 장치나 의상은 평범했습니다. 몇몇 무용수들은 뛰어난 테크닉을 보여줬지만, 군무 장면은 앙상해 보였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2인무나 독무에는 긴장감이 부족했습니다. 이 발레단과 공연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예전에는 화려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낡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높아진 눈높이 공연장을 나오면서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작품을 몇 년 전에 봤더라면 아마도 이렇게 실망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최소한 국립발레단이 공연했던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도 괜찮게 볼 수 있었을 거라고요. 물론 마이요의 작품은 안무 자체도 혁신적이었지만, 이 작품을 소화해낸 국립발레단의 기량도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그만큼 우리 발레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겁니다. 질 좋은 국산을 쓰다 보니, 웬만한 외제에는 별로 눈이 안 가게 됐다고 표현하면 될까요. 국립극장은 이 단체의 공연을 월드컵을 앞둔 문화축제의 일환으로 추진했다고 합니다. 각국의 대사관을 통해 추천 받은 예술단체 중에 일정과 비용 등이 맞는 단체를 고르다 보니, 이 발레단이 공연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물론 문화교류 차원에서 해외 공연단을 초청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요즘 국내 발레의 성장으로 관객의 눈높이도 엄청나게 높아진 상황이니, 진짜 '최정상급' 단체를 초청하지 못할 바에는, 해외 발레단 대신 국내 단체들이 공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즘 국립이나 유니버설 발레단은 해외 공연에서도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까요. 기대되는 발레공연 유니버설 발레단은 바로 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레그 비노그라도프 예술감독의 안무로 공연할 예정입니다. 올레그 비노그라도프는 키로프 발레단의 예술감독을 23년 동안 지냈던 거장인데, 이 작품을 유니버설 발레단을 위해 새로 안무했습니다. 그러니 세계 초연이 되는 셈입니다. 유니버설 발레단은 요즘 한창 연습중인데, 안무도 안무지만, 무대와 의상에도 무척 공들였다고 합니다. '볼만한 작품'이 될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합니다.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문의 1588-7890) 국립발레단은 유니버설 발레단의 공연이 끝난 뒤 '돈키호테'를 무대에 올립니다. 경쾌하고 흥겨운 이 작품은 이미 국립발레단의 인기 레퍼토리이지만, 이번에는 무대와 의상을 모두 새로 제작해 새로운 모습을 선보입니다.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문의 1588-7890) 국립발레단은 또 앞서 말씀드린 마이요 안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올 가을에 다시 공연합니다. 제가 국내초연 당시 '호들갑을 떨며' 썼던 글(2000년 9월 4일 문화가 산책 '로미오와 줄리엣에 들뜬 이유')이 있으니, 관심 있으시면 한 번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 국내에서 세 개 버전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이 무대에 오르는 셈입니다. 먼저 공연된 러시아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나니, 국내 단체들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어떤지, 더더욱 궁금해집니다. 오페라도 재미있다! 생각난 김에 또 한 가지. 어제 저는 도이치 오페라 베를린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공연을 보고 왔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 중에 주인공이 오래된 레코드 한 장을 찾아 듣는 장면이 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 중의 '편지 2중창(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입니다.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울려 퍼지고, 죄수들은, '그 여자들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넘쳐나는 행복감과 평화를 느낍니다. 이 장면에 쓰인 음악은 칼 뵘 지휘로 도이치 오페라 베를린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것입니다. 소프라노 군둘라 야노비츠와 에디트 마티스가 노래했고요. 바로 그 오페라단, 독일 문화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도이치 오페라 베를린'이 '피가로의 결혼'으로 한국에 온 것입니다. 휴식 시간까지 합치면 무려 4시간이나 걸린 공연이었습니다. 나중에는 허리가 뻐근할 정도였지만, 보기를 잘 했다는 생각입니다. 오페라를 이렇게 재미있게 할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이 첫번째였습니다. 우스운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고, 아슬아슬한 장면에서는 관객들도 같이 숨을 죽였습니다. 국내 오페라를 보면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노래 실력도 실력이지만, 연기가 안돼서 보기 민망한 경우가 많습니다. 뻣뻣하게 서서 노래 부르는 게 끝나면 연기 들어가고, 연기 끝나면 다시 노래 시작하고, 이런 식으로 노래 따로, 연기 따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죠. 그러니 이런 공연을 보면서 오페라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럴 땐 '외제가 역시 좋다' 그런데 이들은 노래와 연기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누워서, 뛰어다니면서 노래하면서도, 발성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엎치락뒤치락 하는 소동이 생생하게 펼쳐지면서 재미난 연극 한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고, '편지 2중창' 뿐 아니라 유명한 아리아가 쉴새없이 나오고,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는 선율로 가득 차 있으니, 모차르트가 역시 천재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됐습니다. 오랜만에 수잔나 역으로 출연한 소프라노 신영옥씨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월드컵 시즌이 아니었다면 이런 조합(신영옥+도이치 오페라 베를린)의 공연을 보기 힘들었을 겁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도, 무대도, 의상도, 모두 제가 이전에 보던 수준을 한 단계 뛰어넘은 것이었습니다. (어제 개막됐지만, 오늘은 공연이 없고 23~25일 공연됩니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 문의 02-780-6400. 신영옥씨는 더블 캐스팅이라 24일에 출연합니다.) 이럴 땐 '역시 외제가 좋긴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외제' 중에도 아주 수준 높은 '외제'이지요. 이번 공연으로 오페라 관객들의 눈높이도 한층 높아질 테지요. 안 그래도 요즘 국내 오페라단의 공연 중에 만족스러운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국산 만드는 사람들이 이렇게 좋은 외제를 따라잡으려면 한참 노력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김수현 기자 shkim@sb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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