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board
한빛자료실

작성자 한 빛
작성일 2020-10-21 (수) 10:58
홈페이지 http://www.hanbitkorea.com
첨부#1 箕子朝鮮說의_사회학적_검증과_‘犯禁8條’의_실체.pdf (1,883KB) (Down:10)
ㆍ추천: 0  ㆍ조회: 138      
기자조선설의 사회학적 검증과 ‘범금8조’의 실체

箕子朝鮮說의 사회학적 검증과 ‘犯禁8條’의 실체


신용하**


一. 머리말: ‘기자조선설’의 문제

二. 孔子의 箕子와 古朝鮮觀

三. 『管子』에 기록된 古朝鮮

四. 春秋戰國시대 기타 중국고문헌에 보이는 箕子와 古朝鮮

五. 箕子朝鮮說의 형성과정

六. 箕子의 실체와 유적 箕子墓

七. 기자시대의 동북아시아 정세

八. 犯禁8條의 실체

九. 맺음말: 기자조선설의 허구성



一. 머리말: ‘기자조선설’의 문제



고조선과 동아시아의 고대사회 연구에서 증거가 없으면서도 오랫동안 확고하게 학설의 하나로 자리잡아서 마치 역사사실처럼 일부에서 논의되어 오고 있는 것이 있다. ‘기자조선설’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 25왕조사의 하나인 반고(班固, AD 32~92)의 『한서(漢書)』는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가서 조선에 예의와 농경・양잠을 가르쳐 주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은(殷)의 도(道)가 쇠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누에치기를 가르쳤다. 낙랑조선 주민에게는 범금8조(犯禁八條)가 있었는데, 사람을 죽이면 바로 죽음으로써 보상하고,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보상하며,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재물로 배상하여 죄를 면하고자 하는 자는 각자가 50만을 바쳐야 한다」1)



그후 진수(陳壽, AD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와 범엽(范曄, AD 398~445)의 『후한서(後漢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후(朝鮮侯)로 봉(封)하였고, 기자는 조선에 가서 예의・농경・양잠을 가르쳐주고, 율령과 같은 위반을 금하는 8조의 가르침 즉 ‘범금8조’(犯禁八條)를 제정하여 문명생활을 가르쳐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후한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예의와 농사와 양잠을 가르쳤다. 또한 8조의 교(八條之敎)를 제정하니, 그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아니하고, 문을 잠그지 아니하며, 부인들이 정절을 지키고, 음식은 변(籩: 대나무로 만든 큰 그릇)과 두(豆: 나무로 만든 그릇)를 사용하여 담아 먹었다」 2)



『후한서』의 이 기사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을 그대로 따라 수록한 것이었다. 3)

이러한 중국 고대의 ‘기자조선설’은 그후 다음과 같은 주장을 되풀이 하였다.



① BC 11세기 경에 고중국 周(주)의 무왕이 은말주초의 중국인 기자(箕子)를 조선후(朝鮮侯)에 封하였다.

② 기자는 이에 조선으로 가서 조선왕(朝鮮王)이 되어 조선사람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양잠을 가르쳤다.

③ 기자는 또한 조선왕으로서 8조목의 범금(犯禁)하는 조문을 가르치니, 마침내 사람들이 서로 도둑질하지 아니하고, 문을 잠그지 아니하며, 부인들은 정절을 지키고, 음식은 그릇을 사용하여 담아 먹었다. (즉 기자가 고조선에 새로이 문명을 가르쳐서 만들어 주었다.)



특히 문제가 심각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고대의 ‘기자조선설’을 이어받아서, 최근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은 “고조선은 BC 11세기경 중국인이 조선에 가서 왕과 지배층이 되어 세워 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요지의 주장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민족의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을 고중국의 속국 또는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 이러한 각종 ‘기자조선설’은 한국민족에게는 치명적인 매우 중대한 역사해석상의 도전이기 때문에, 한국민족은 그 진위여부를 반드시 과학적으로 검토하고 넘어가야 할 연구주제로 되어 있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이미 구한말 1908년에 단재 신채호 선생이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기자1읍수위설(箕子一邑守尉說)’을 제시한 이래,4) 일제 강점기에도 소수 연구자들에 의해 부정과 회의가 이어졌다.5) 광복후에는 다수 연구자들에 의하여, ‘기자조선’ 인정,6) 또는 고조선영역 내의 요서지역의 ‘기자국’을 인정하는 견해와,7) ‘기자조선’ 부정의 견해들이8) 논쟁적으로 발표되면서 연구업적이 축적되어 나가고 있다.9)

이 논문은 ‘기자조선설’의 사회학적 검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학적’이라 함은 방법론에서 ‘사회학적 실증주의’의 방법을 적용하고,10) 해석에서 ‘지식사회학’의 해석이론을 적용하는 것이다.11) ‘기자조선설’에 대한 사회학적 검증은 ‘기자조선설’의 본질의 보다 명료한 파악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二. 孔子의 箕子와 古朝鮮觀


1) 『尙書』에 기록된 箕子


중국에서 만들어진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우선 고문헌 기록자료로서 공자(孔子, BC 552년~BC 479년)가 편찬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 최초의 역사서인 『상서(尙書)』의 이 부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자가 편찬한 『상서』는 중국의 우(虞)・하(夏)・상(商)・주(周) 시대의 중국 고대정치사를 공자의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저술한 중국고대사의 사실상 최초의 역사서이다. 유교 교육과정에서 5경 및 13경의 하나로 매우 중시되었으므로 송나라 시대부터 『서경(書經)』이라는 호칭이 확립되었으나, 원책명은 『서(書)』 『상서』이다. 기자는 상말주초(商末周初)의 인물이므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역사상 실재했다면, 이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당연히 공자의 『상서』에 반드시 수록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12)

공자의 『상서』에는 ‘기자’는 비교적 상세히 서술되어 있는데, ‘기자조선(箕子朝鮮)’이나 ‘기자동래(箕子東來)’ 또는 ‘기자조선후분봉(箕子朝鮮侯分封)’은 단 한마디나 한 글자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참으로 주목해야 할 점이다.

『상서』에서 ‘기자’가 실재인물로 나오는 부분은 주서(周書)에서 무왕(武王)이 무왕 13년(BC 1,050년경) 기자를 방문하여 정치를 질문하자 ‘홍범(洪範)’을 강론해 준 것을 상세히 기술한 것이다. 좀 지루하지만 그 앞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무왕) 13년에 왕이 箕子를 방문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오오, 箕子여, 하늘은 백성을 보호하고 서로 협력하여 살도록 했는데, 나는 그 일정한 윤리의 체계를 모르고 있소”

기자가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옛날 鯀(곤)이 홍수를 잘못 막아서 오행(五行)의 서열이 어지럽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크게 노하여 ‘홍범구주’(洪範九疇: 큰 규범 9개 범주)를 내려주지 않아서 일정한 윤리가 붕괴되었습니다. 곤은 죽임을 당하고, 禹(우)가 뒤이어 일어나니 하늘은 ‘홍범구주’를 내려 주시어, 일정한 윤리 체계를 정하였습니다.

그 첫째는 五行(오행)이오, 둘째는 五事(오사)의 공경하게 시행함이오, 셋째는 八政(팔정)의 힘써 행함이오, 넷째는 五紀(오기)의 조화로운 시행이오, 다섯째는 황극(皇極: 임금의 법칙)을 세움이오, 여섯째는 三德(삼덕)을 사용한 다스림이오, 일곱째는 稽疑(계의: 의문)를 명료하게 밝힘이오, 여덟째는 庶徵(서징: 여러 가지 징험)을 고려하여 시행함이오, 아홉째는 五福(오복)을 누리고 六極(육극: 여섯가지 형벌)의 권위있는 시행입니다”13)



기자는 이어서 주의 무왕에게 ‘홍범구주’의 위의 내용 체계를 상당히 상세하고 깊게 설명하였다. 만일 주의 무왕이 이 때의 기자의 ‘홍범구주’의 강론과 현명함에 감사하여 그를 조선후(朝鮮侯)로 봉한 사실이 있었다면, 공자는 『상서』의 이 부분 바로 뒤에나 어디에서 이를 반드시 언급했을 것이다.

공자의 상・주 역사연구와 기자연구에서는 기자는 상말주초의 ‘현자(賢者)’로 기록된 실재인물이었으나, 주목해야할 것은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하거나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거나 조선에 가서 조선왕이 되었다거나 하는 유의 기록이나 시사는 단 한 글자도 전혀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참으로 주목해야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공자의 『상서』의 기록을 4백년 후의 ‘기자동래설’ ‘기자조선후분봉설’ ‘기자조선설’과 대비해 보면, ① 『상서』에는 기자가 석방된 후 주 무왕 13년에 무왕이 기자를 방문했다고 했으므로, 기자는 조선에 망명해 간 것이 아니라 무왕이 방문할 수 있는 근거리 주나라 안에 은거하고 있었으니, 소위 ‘기자동래설’ ‘기자조선망명설’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② 또한 공자의 『상서』는 주무왕의 통치원리 질문에 대해 기자가 ‘홍범구주’를 설명해 주었다고 상세히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그 공로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다고 쓰지 않았으니, ‘기자조선후분봉설’도 역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③ 따라서 공자의 『상서』에서는 ‘기자조선설’은 성립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

공자의 『싱서』가 주의 무왕과 기자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면서도 ‘기자동래설’ ‘기자조선후분봉설’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論語』에 기록된 箕子

공자는 『논어』의 미자(微子)편에서 箕子를 미자와 비간(比干)과 함께 은(殷)나라의 3인자(仁者)의 하나라고 다음과 같이 높이 상찬하였다.



「(紂가 무도하므로) 微子는 떠나가 버리고, 箕子는 奴(종)가 되었으며, 比干은 諫(간)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은 나라에 3仁이 있다고 하였다.」14)



또한 공자는 ‘九夷’라고 표현했지만, 고죽국과 조선이 도덕 윤리가 갖추어진 당대의 문명국으로 잘 인지하고 있었다. 『논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자가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자 하니, 어떤 사람이 물어가로되, “누추한 나라에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하였다. 공자가 가로되, “군자가 그곳에 살았으면 어찌 누추하리오”라고 하였다.」 15)



즉 공자는 조선과 그 후국을 ‘구이(九夷)’이지만 문명을 갖춘 나라로 인지하고 있었다.

만일 기자가 주 무왕의 봉함을 받아서 조선왕이 되어 조선에 가서 예의・농경・양잠을 가르치고 범금8조의 율령까지 제정하여 백성을 교화시켰다면, 이 커다란 사건을 ‘기자’를 기록할 때나 ‘예의’를 논할 때나 ‘구이’를 언급했을 때 말하거나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공자가 『논어』에서 기자를 ‘인(仁)’자로서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가 주 무왕에 의해 조선후왕으로 봉함을 받았다는 류의 언급은 어디에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가 아는 한, 그러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3) 『周易』에 기록된 箕子


공자는 『주역(周易)』의 정리에도 관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주역』의 괘사(卦辭)에도 기자의 처신이 기록되어 있다.

『주역』의 64괘 중의 한 괘인 (坤上離下)괘는 ‘명이’(明夷) 괘라고 호칭하는데, 곤(坤, 어둠)이 위에 있고 리(離, 밝음)가 그 아래 있으므로, 아래의 밝음이 나아가면 “밝음(明)이 상(傷, 다침)하는” 괘이다. 여기서 ‘夷’는 ‘傷’(다침)의 뜻임을 모든 『주역』의 괘사에 설명되어 있다.

이를 더 풀어 말하면 “위에 ‘어리석고 어두운 군왕’이 있고 그 ‘아래 현명한 신하’가 있는 것”이 ‘명이’(明夷)의 괘이고, 이 때 아래에 있는 현명한 신하가 벼슬이나 헌책에 나아가면 위의 어두운 군왕은 어리석으므로 반드시 현명한 신하를 죽이거나 상(傷; 夷)하게 하므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괘이다. 여기서 ‘夷’는 ‘傷’과 같고, ‘明夷’는 ‘明傷’, 즉 “밝음이 다친다”는 뜻이라고 괘사에 기록되어 있다. 16)

『주역』의 괘사는 ‘명이’ 괘에 대한 대책도 기록했는데, “명이에 대해서는 간고한 속에서 곧음(바름)이 이롭다”(明夷 利艱貞)고 하였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문제가 된 것은 “간고한 속에서 곧음(바름)이 이롭다”17)의 사례로 ‘기자’가 폭군 주(紂)를 간하다가 왕자 비간(比干)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거짓 미친척하여 죽음을 면하고 옥에 갇힌 사실을 든 것이다.

주역의 괘사는 “利艱貞은 그 밝음을 감추는 것이다. 안이 간고한데도 능히 그 뜻을 바르게 할 수 있으니, 기자가 그렇게 하였다. 이는 ‘기자의 명이(箕子之明夷)’이니 곧음(바름)이 이로운 것이다. 기자의 곧음(바름)은 밝음이 쉴 수 없는 것이다”18)고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공자는 『상서』 『논어』 『주역』 등에서 기자의 행적에 대해 여러 가지 기록을 하면서도 기자의 ‘조선후분봉’이나 ‘기자동래’, ‘기자조선’ 따위의 글은 어디에도 한 자, 한 마디도 쓰지 않았으니, 孔子의 박식이 인정되는 한, ‘기자조선’이나 ‘기자 조선후 분봉’과 같은 사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고대 중국의 최고학자 孔子는 그의 모든 학문체계에서 BC 11세기에 현인 ‘기자’는 실재한 인물이었지만, 그 후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기자동래설’ ‘기자조선후분봉설’ ‘기자조선설’ 등은 역사상 실재하지 않았던 가설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三. 『管子』에 기록된 古朝鮮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재상이 되어 큰 공을 세운 관중(管仲)의 언행을 기록한 『관자(管子)』에도 ‘조선’은 ‘발조선(發朝鮮)’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기자조선’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관자」 규탁(揆度)편에는 “진귀한 물건으로 화폐를 만드는 7가지 방법”을 묻는 환공의 질문에 대한 관중의 답변으로, 고조선(발조선)의 특산물인 ‘문피’(文皮: 무늬가 있는 범 또는 표범 가죽)가 齊나라에서는 황금처럼 화폐로 사용할 수도 있을 만큼 귀한 물품이었음도 알려주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음산(陰山)에서 나는 연민(礝䃉: 옥돌의 일종)을 사용하는 것이 한 방책입니다. 연(燕)의 자산(紫山)에서 나는 백금(白金: 은)을 사용하는 것이 한 방책입니다. 발조선(發朝鮮)에서 나는 문피(文皮)를 사용하는 것이 한 방책입니다. 여수(汝水)와 한수(漢水)에서 나는 황금(黃金)을 사용하는 것이 한 방책입니다. 강양(江陽)에서 나는 구슬(珠)을 사용하는 것이 한 방책입니다. 진(秦)의 명산(明山)에서 나는 증청(曾靑: 仙藥의 일종)을 사용하는 것이 한 방책입니다. 우씨(禹氏)의 변산(邊山)에서 나는 옥(玉)을 사용하는 것이 한 방책입니다.」 19)



이 기록은 BC 8세기~BC 7세기의 일을 알려주는 것인데, 관중은 고조선을 ‘발조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발조선’은 ‘밝달조선’의 ‘밝’을 발음대로 한자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만일 ‘기자조선’(BC 11세기~BC 3세기)이 실재했다면, 바로 이 시기는 ‘기자조선’의 시대였을 것이므로 ‘기자조선’ 또는 ‘기씨(箕氏)조선’으로 기록했을 터인데, 관중은 ‘발조선’(밝달조선, 즉 단군조선 계통의 조선)으로만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관자』의 기록에서도 ‘밝달조선’(發朝鮮)은 실재했지만, ‘기자조선’은 실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관자』 경중(經重) 갑(甲)편에는, 사이(四夷)가 복종하지 않고 중국에 반대하는 정책을 펴 제나라를 상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환공이 그 대책을 묻는 질문에 대해 관중의 다음과 같은 답변에서 ‘발조선(發朝鮮)’을 기록하고 있다.



「오(吳)와 월(越)이 입조(入朝)해오지 않으면, 청컨대 (그곳에서 나는) 구슬(珠)과 상아(象牙)를 화폐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발조선(發朝鮮)이 입조해오지 않으면 청컨대 문피(文皮)와 타복(毤服: 아름다운 털옷)을 화폐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씨(禹氏)가 입조해오지 않으면 청컨대 흰옥(白璧)을 화폐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 한 개 표범 가죽은 금과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금입니다. (그것을 화폐로 사용한) 연후에 8천리 밖의 발조선이 입조해 올 것입니다. (…)」 20)



이 기록은 ① 발조선(고조선)이 제나라로부터 약 8천리 밖의 먼 거리에 있는 나라이고 ② 제나라에 입조(入朝) 오지 않는 완전한 ‘독립국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물론 이 기록의 8천리밖의 거리는 ‘매우 먼 거리’의 중국식 표현일 수 있다. 또한 ‘朝’는 당시 조공제도가 없던 시기이므로 여기서는 ‘예방’ ‘방문’의 중국식 표기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기록에서 명백한 것은 관중(管仲)의 시대(BC 8세기~BC 7세기)에 ‘고조선’은 명백하게 ‘발조선’(밝달조선: 단군조선 계통)이었으며, 전혀 ‘기자조선’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발조선’은 제(齊)나라와 공식적 교역관계가 아직 없는 통칭 8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별도의 완전한 독립국가였다는 사실이다.

『관자』의 기록들에 의거해 보면, 고조선의 별칭인 ‘발조선’이 BC 8세기~BC 7세기에 실재했던 ‘고조선’이었고, ‘기자조선’은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볼 수 있다.



四. 春秋戰國시대 기타 중국 고문헌에

보이는 箕子와 古朝鮮


중국에서 말하는 이른바 ‘춘추전국시대’의 『관자』 이외의 주요 고문헌들에서 기자와 고조선이 어떠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나오는가를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呂氏春秋』에 기록된 武王과 箕子


『여씨춘추(呂氏春秋)』는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재여부를 판별하는데 참고가 되는 고문헌자료이다. 「여씨춘추』는 군주가 현명한 판단력을 갖지 못했을 때 충신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 거짓 미친척하거나 곤궁하게 지낸 사례로 ‘箕子’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밖의 사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군주가 신하의 충성을 믿지 않았으므로) 龍逢(용봉)은 주살되었고, 比干(비간)은 육시를 당하였으며, 箕子(기자)는 거짓 미친척하였다. 그리고 惡來(악래)는 피살되었으며, 桀(걸)과 紂(주)는 망하였다.」 21)

「군주로서 도량이 없는 사람은 이것을(충신 해함을) 알지 못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比干(비간)과 萇弘(장홍)은 이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고, 箕子(기자)와 商容(상용)은 이로 말미암아 곤궁에 처하였다.」 22)



『여씨춘추』가 주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참고가 되는 것은, 주의 무왕이 상(殷)을 이긴 후, 상(은)의 충신현인을 포섭하려 제후로 봉하는 명단에는 기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기자는 상(은) 충신의 명단에 나오고, 무왕이 기자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여 그가 살던 집(궁실)을 청결하게 관리토록 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武王(무왕)은 殷(은)을 이긴 후 은나라에 들어가자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바로 명하여 黃帝(황제)의 후예를 鑄(주)에 封(봉)하고, 帝堯(제요)의 후예를 黎(여)에 봉하고, 帝舜(제순)의 후예를 陳(진)에 봉하였다. (그 후) 수레에서 내려 명하여 夏后(하후)의 후예를 杞(기)에 봉하고, 成湯(성탕)의 후예를 宋(송)에 세워 桑林(상림)을 받들어 제사하게 하였다. (…) 比干(비간)의 무덤을 받들게 하고 箕子(기자)의 궁실을 깨끗하게 관리시켰으며, 商容(상용)의 마을을 표창하여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걷고 수레를 탄 사람은 내려서 걸어가게 하였다.」 23)



즉, 위의 기록을 참조하면 주의 무왕은 명문의 후예들에게 제후의 지위와 영지를 봉하면서 ‘기자’는 제후에 봉하지 않은 것이다.

무왕이 ‘기자’에게 베푼 배려는 기자의 상(은)에 대한 충성을 기리어 기자가 살았던 궁실을 청정하게 관리시킨 것이다. 그 후 무왕의 제후의 추가 분봉은 상(은)의 충신이 아니라 무왕 자신의 상(은) 정복에 무공으로 도움을 준 자기의 충신(참모들)에게 내린 것임을 “함께 상 정복을 도모한 인사들(與謀之士)을 제후로 봉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24) 箕子는 주의 무왕의 商정벌을 무왕의 참모가 되어 함께 도운 ‘여모지사(與謀之士)’는 전혀 아니었다.

만일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분봉한 일이 있었다면 주 무왕의 분봉과 箕子를 기록한 이 부분에서 그 중요한 기사를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여씨춘추』는 기자가 상말주초의 실재인물이었고 상의 충신으로서 존경받았지만, 주의 무왕이 기자를 제후의 하나로 분봉한 일은 없었음을 명료하게 알려주고 있다.



2) 『春秋左氏傳』에 보이는 箕子와 箕國(邑)


공자가 노(魯)나라 역사서로서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별세한 후,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인 좌구명(左丘明)이 공자의 『춘추』에 해설을 붙였다고 전해지는 것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춘추좌씨전』에는 ‘기자’와 ‘기국(箕國)’은 나오는데, ‘기자분봉설’이나 ‘기자동래설’, ‘기자조선설’은 없다.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15년조에는 진(秦)의 군주의 말로 (옛날 周 武王에) 의하여 “당숙(唐叔)이 제후의 하나로 분봉을 받았을 때 기자가 말하기를 ‘그의 후손은 반드시 왕성하여 크게 번성하리라’고 말했다”25)는 언급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주공의 아우 당숙이 위(衛)나라의 후(侯)로 봉해진데 대해 당숙의 후손들이 크게 번영하리라고 말한 기자의 논평을 기록한 것 뿐이지, 기자가 조선후로 봉해졌음을 간접적으로라도 시사한 것은 전혀 아니다.

『춘추좌씨전』에 기자에 관한 기록은 위의 기록밖에 없으나, 기국(箕國, 邑)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몇 개 나온다.



① 「晉나라 사람이 箕에서 오랑캐(狄)에게 패하였다.」26)

② 「오랑캐(狄)가 晉을 정벌하여 箕에 이르렀다.」27)

③ (秦이 晉을 공격하여) 「우리의 箕・郜를 불태웠다.」28)

④ 「叔孫이 매일 아침 일어나서 기다리므로 마침내 그를 箕에 머물게 하였다.」29)

⑤ 「晉나라의 士彌牟(사미모)가 叔孫을 만나러 箕로 갔다.」30)



위의 기록에서 ‘기(箕)’는 춘추시대 진국(晉國)에 속한 한 개 성읍임을 알 수 있다. 진(晉)은 지금의 산서성 일대에 있던 나라였다. ‘箕’는 지금의 산서성 포현(蒲縣)의 동북쪽에 있던 예문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춘추좌씨전』에도 기자는 주무왕 때의 실존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후분봉설’이나 ‘기자동래설’ ‘기자조선설’ 등은 전혀 기록의 흔적도 없다.

단지 진(晉)나라에 속한 ‘箕’(國)가 나오는데, 이 작은 성읍이 기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山海經』에 기록된 古朝鮮


『산해경』에는 해내북경(海內北經)과 해내경(海內經)의 두 곳에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① 「朝鮮: 조선은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海)의 북쪽이고 산(山)의 남쪽이다. 열양은 燕에 속한다.」31)

② 「朝鮮: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을 朝鮮天毒(조선천독)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물에서 살고 (다른) 사람을 아끼고 사람을 사랑한다.」32)



위의 문헌기록 ① 『산해경』 해내북경에서 ‘열양(列陽)’은 지역(도시) 이름이다. 『산해경』이 편찬된 산동성과 산서성 일대를 기준으로 할 때, 海(바다)는 북해(北海, 발해)이고, 山(산)은 의무려산(醫巫閭山)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문제는 ‘列陽’이라는 성읍인데, 이 성읍은 연(燕)에 속한 곳이라고 하였다. 진(晉)의 곽박은 자기시대에 지금의 요하를 ‘洌水(열수)’라고도 했으므로 ‘列’은 ‘洌’과 같고 수명(水名)이며 대방군(帶方郡)에 열구현(列口縣)이 있으므로 ‘列口’가 곧 ‘列陽’이라고 하였다.33)

이에 대하여 이지린은 곽박의 해석을 반대하면서, 列陽은 지명이 아니라 ‘列水의 북방’이라는 뜻이고, 燕에 속한다고 했는데 연이 조선영토의 일부를 빼앗은 BC 3세기 이전에는 난하 이서에 있었기 때문에 ‘열양’은 ‘난하 이동’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34)

필자는 “列陽은 燕에 속한다”는 기록이 ‘열양’을 찾는 열쇠가 된다고 본다. 필자는 ‘列’이라는 부족이 있었기 때문에 ‘列’과 ‘洌’은 반드시 동일하다고 볼 수 없으며, ‘列陽’이 ‘列人의 땅’이라는 뜻의 표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BC 3세기 이전의 燕은 지금의 만리장성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BC 8세기~BC 3세기의 연의 영토에서 ‘列陽’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진(秦)이 燕의 영토를 빼앗기 이전에 ‘列陽’이 있었고, 漢이 그 秦의 영토를 빼앗은 후에 ‘列人縣(열인현)’이라고 개명한 곳이 있다. 당의 두우(杜佑)는 『통전(通典)』에서 광평군(廣平郡) 비향현(肥鄕縣)이 한(漢)시대의 ‘列人縣’을 개명한 것이며, 비향현 동북에 ‘고성(故城)’이 있었고 또 장수(漳水)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35)

필자는 지금의 하북성 비향현의 동북쪽에 있던 ‘列人’이라는 고성이 ‘列陽’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고본죽서기년(古本竹書紀年)』에도 나오는 전국시대의 유명한 고성이었다.

다음 ② 『산해경』 해내경에 나오는 기록인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한 나라가 있다는데 조선천독(朝鮮天毒)이다”라고 한 ‘동해(東海)’와 ‘북해(北海)’이다. 이 때 ‘동해’는 ‘황해’이고 ‘북해’는 ‘발해’임은 용이하게 알 수 있다.

문제는 이곳에 ‘朝鮮’만 기록하지 않고 ‘朝鮮天毒’이 있다고 기록한 것이 문제이다. 곽박(郭璞)은 ‘天毒’을 ‘천축국(天竺國)’이라고 주석하였다.36) 그 이래 모든 주석가들이 ‘天毒’을 ‘天竺國’ 즉 오늘의 인도(印度)라고 해석해오고 있다. 그러나 ‘인도’는 저 멀리 남아시아에 있는데, 발해 북안에 ‘인도’가 있다니, 곽박의 주석이 잘못된 것이다.

필자는 의무려산 남쪽 발해만 연안 고조선 지역에서는 지금도 ‘天(천)’과 ‘檀(단)’을 호환해 사용하며 ‘天祭(천제)’를 ‘檀祭(단제)’라고 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조선 사람들은 檀君을 王儉(왕검, 王險)이라고 호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天=檀=儉(險)과 같다. ‘毒’은 ‘瀆’과 음이 동일하다. 고조선어로는 ‘터’(墟)의 뜻이다. 그러므로 ‘天毒’은 ‘險瀆’과 같다고 본다. 『한서』 지리지에는 북해의 북쪽 진나라가 설치한 요동군에37) ‘험독(險瀆)현’이 있다고 했는데,38) 응소(應劭)는 “조선왕 만(朝鮮王 滿)의 도(都)이다”39)라고 주석하였고, 서광(徐廣)은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 「창여(昌黎)에 험독(險瀆)현이 있다」40)고 하였다. 창여(昌黎)는 북해의 모퉁이에 있던 현이다.

그러므로 “북해의 모퉁이에 한 나라가 있는데 朝鮮天毒(조선천독)이 있다”고 한 것은 “북해의 모퉁이에 朝鮮이라는 나라 險瀆(儉瀆, 검터)이 있다”는 기록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라고 필자는 본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춘추전국시대 주요저서로 인정되는 『산해경』에 ‘조선’은 두 곳에서나 나오지만 ‘기자’ ‘기자조선’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역사실제에서 ‘춘추전국시대’ 발해만 이북, 의무려산 남쪽에는 고조선 후국(侯國)인 고죽국(孤竹國)이 실재하고 있었다. 『산해경』은 고조선 본국은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그 후국인 ‘고죽국’을 ‘朝鮮’으로 인지하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4) 『戰國策』의 朝鮮遼東


‘전국시대’라는 시대구분 호칭까지 낳은 유명한 전국시대 나라별 역사책인 유향(劉向) 편찬의 『전국책』에는 연책(燕策)에 다음과 같이 ‘조선・요동(朝鮮・遼東)’의 지리가 기록되어 있다.

「燕(연)은 동쪽에 朝鮮(조선)・遼東(요동)이 있고, 북쪽에 林胡(임호)・루번(樓煩)이 있으며, 서쪽에 운중(雲中)・구원(九原)이 있고, 남쪽에 呼沱(호타)・易水(역수)가 있으며, 영지는 방(方)이 2천리이다.」41)



연(燕)나라 영토의 위치와 크기를 서술한 위 기록은 연 나라 동쪽에 있는 것이 ‘조선・요동’임을 밝혀서 전국시대 당시의 ‘조선’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요동’은 요수(遼水)의 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고, 연나라 당시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灤河)를 가리킨 것이었다.42)

이 기록은 춘추전국시대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 안에 가두어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록은 충격적인 잘못된 기록으로 보여 당황스럽겠지만, 편견없이 이 기록을 읽으면 고조선의 영역이 ‘난하’(요수)를 건너 지금의 베이징 부근인 燕의 국경에 맞닿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조선은 고조선의 수도가 있는 본국이 아니라 고조선의 후국인 고죽(孤竹)을 비롯하여 불령지(弗令支)・불도하(弗屠何)・산융(山戎) 등이었다. 특히 이 중에서 가장 강대하고 문화가 발전했던 ‘고죽국’을 고중국인들은 아예 ‘조선’이라고 호칭하고 있었다.

BC 3세기 초엽 연의 소왕(召王, BC 312~BC 279) 때 연의 장군 진개(秦開)가 고조선의 서변을 침공하여 약 1천~2천리의 땅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

북위 시대의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은 “연이 진개를 보내어 (조선의) 서쪽지방을 공격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43)고 기록하였다.

동일한 사실에 대하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그후 연(燕)에는 현장 진개(秦開)가 있어 호(胡)에게 인질이 되었는데, 호는 그(진개)를 매우 신임하였다. (진개는) 귀국하자 동호(東胡)를 기습하여 패주시켰다. 동호는 1천 여리나 퇴각하였다”44)고 기록하였다.

위의 두 기록은 연(燕)의 동쪽에 朝鮮이 연접해 있었으며, 진개가 인질로 가 있던 東胡도 조선의 서변에 포함된 것이었고, 동호도 바로 조선의 후국이었음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후에 진시황은 BC 222년 연(燕)을 멸하고 연의 장성을 수축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양평(襄平)을 거쳐 하단은 지금의 난하 하류의 동쪽 갈석산(碣石山) 부근에서 바다에 닿도록 축성하였다. 그리고 燕과 秦은 난하 이동 만리장성 하단까지에 ‘요동군’(遼東郡 )을 두고 난하 이서에는 ‘요서군’(遼西郡)을 두었다.

그러므로 연의 진개의 조선 침공 이전에는 『전국책』의 기술과 같이 “燕은 동쪽에 朝鮮・遼東‘이 있었고”, 이때의 조선은 매우 강성하여 연의 진개가 인질로 조선에 가서 장기간 억류되어야 할 정도로 막강했던 것이다.

『전국책』의 기록에는 막강한 ‘조선’이 연의 동쪽에 연접해 있었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지, ‘기자’ ‘기자조선’의 기사는 아예 없다.



5) 『孟子』에 기록된 箕子


중국의 전국시대 맹가(孟軻, BC 372~BC 289)의 사상과 언행을 기록한 『맹자』에는 ‘기자’는 기록되어 있지만 ‘조선’은 나오지 않는다.

맹자는 ‘왕도정치’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현명한 신하의 도움을 받는 군주는 용이하게 왕도정치를 실행할 수 있음을 설명하면서, ‘기자’를 미자(微子)・미중(微仲)・비간(比干)과 함께, 다음과 같이 ‘현인’의 하나로 들었다.



「그 옛 가문의 남은 풍속과 유행하던 풍속의 선정이 아직도 남아 있었으며, 또 微子・微仲・왕자 比干・箕子・膠鬲이 모두 賢人으로서 서로 더불어 그를 보좌하였다.」45)



맹자는 선대 스승 공자에 따라 기자를 현인과 인(仁)자로 생각하고 들었으나, 조선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6) 『荀子』에 기록된 箕子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 성악설을 정립한 순경(荀卿)의 저작인 『순자(荀子)』에는 다음과 같은 기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


① 「(상의 紂가) 比干의 배를 가르고 箕子를 가두었는데(…)」46)

② 「伊尹(이윤)과 箕子는 諫했다고 말할 수 있다.」47)

③ 「紂왕은 比干의 배를 가르고 箕子를 가두었으며, 炮烙刑을 행하고 아무 때나 살육하였다.」48)

④ 「(紂가) 比干의 배를 가르고 箕子를 가두었다가 자신은 죽고 나라는 망하였다.」49)

⑤ 「(주의 무왕이』 箕子를 석방하고 比干의 묘에서 통곡했는데 천하가 善으로 칭송하였다.」50)

⑥ 「(제왕이 어진이를 죽이자) 箕子가 거짓으로 미친척 하였다.51)



즉, 『순자』에 서술된 기자의 기록은 ① 주(紂)왕이 폭정을 하자 기자가 간했으며, ② 주왕이 비간을 죽이는 것을 보고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한 바 ③ 주왕은 기자를 가두었으며, ④ 紂는 폭정을 하다가 자신도 죽고 상나라도 망했고, ⑤ 주(周) 무왕이 주(紂)를 멸하고 기자를 석방하고 비간의 묘에서 통곡하자 천하 사람들이 선(善)하다고 칭송했다는 것이다.

『순자』에 기록된, 기자기사에도 ‘기자동래설’ ‘기자조선후분봉설’ ‘기자조선설’ 등은 전혀 단서가 될만한 것도 나오지 않는다.



7) 『韓非子』에 기록된 箕子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 순자의 제자인 한비(韓非, BC 280~?)는 그의 저작 『한비자(韓非子)』에서 다음과 같이 기자에 대해 기록하였다.


① 「옛날에 紂왕이 상아젓가락을 만들자 箕子가 이를 염려하였다. (…) 오년이 지나자 紂왕은 肉圃(육포)와 炮烙(포락)을 만들고 술지게미가 쌓인 언덕을 오르며, 술로 채운 연못에서 놀았다. 이에 紂는 마침내 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箕子는 상아젓가락을 보고 천하의 禍를 (미리) 알았던 것이다.」52)

② 「(은의) 紂王이 상아젓가락을 만들자 箕子가 이를 두려워하였다. (…) 이런 식으로 추구하다 보면 (사치와 방탕이) 천하에 만족할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성인은 아주 작은 일을 보고도 다가올 일을 알고, 사물의 작은 단서를 보고 그 끝을 안다. 그러므로 箕子가 상아젓가락을 보고 두려워한 것은 천하도 紂왕을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53)



『한비자』는 기자가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현자여서 상의 주(紂)왕이 상아젓가락을 만들어 사용하는 작은 사실을 보고도, 사치와 방탕이 끝이 없게 커져서 천하도 이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되어 紂가 망하게 이를 것이라고 종국적 결과를 예견하여 이를 두려워했는데, 결국 5년 후에 紂가 망하게 되었음을 사례로 들면서, 성인은 사물의 작은 단서를 보고도 그 끝을 미리 안다고 설명한 것이었다.

『한비자』에는 기자가 성인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현자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기자동래설’이나 ‘기자조선후분봉설’ ‘기자조선설’은 전혀 단서도 보이지 않는다.



8) 『方言』에 기록된 朝鮮의 위치


전국시대 말기의 나라별로 한자를 발음하는 사투리를 수집 분류하여 전한(前漢)시대 揚雄(양웅)이 편찬한 『방언(方言)』은 그 분류가 우리의 주제에 참고가 된다.

『방언』에는 조선의 언어권적 분류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① 「燕之外鄙(鄙는 邊邑이름)・朝鮮洌水之間」54)

② 「燕代-朝鮮洌水之間」55)

③ 「燕之北鄙-朝鮮洌水之間」56)

④ 「燕之北郊-朝鮮洌水之間」57)

⑤ 「燕-朝鮮洌水之間」58)

⑥ 「北燕-朝鮮之間」59)

⑦ 「北燕-朝鮮洌水之間」60)

⑧ 「東北-朝鮮洌水之間」61)

⑨ 「燕之東北-朝鮮洌水之間」62)

⑩ 「朝鮮洌水之間」63)

⑪ 「燕之外郊-朝鮮洌水之間」64)



여기서 北燕(북연)은 만리장성 아래의 ‘연’을 가리키고 있고 열수(洌水)는 지금의 요하・압록강 중의 하나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방언』의 고대 중국어 발음과 방언의 언어권의 분류는 燕(북연)의 밖(外鄙・外郊)・북쪽 밖(北郊)・동북(東北)쪽으로부터 조선・열수 사이까지의 지역이, 燕(북연)까지의 고대중국어권과는 별개의, 독립된 ‘언어권’이었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연(북연, 만리장성 아래의 연)의 북쪽 또는 동북쪽으로 조선이 인접・연접해 있었음을 지리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방언』에서도 ‘조선’의 위치는 ‘연’에 연접하고 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고조선 후국 고죽(孤竹)・불령지(不令支)・불도하(弗屠何)・산융(山戎)을 포함하여, 연의 외부(동북부)와 연접된 나라로 인지되어 있다.

즉 고조선 후국들인 고죽・불령지・불도하・산융・동호가 하나의 동일한 ‘언어권’을 형성하여, 별개의 언어권인 燕과 연접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산해경』 대황북경(大荒北經)에 있는 「胡(호)와 不與(불여)의 나라는 烈(열)성이고 기장을 먹고 산다」65)는 기록을 주해하면서, 진(晉)의 곽박(郭璞)은 “한 나라의 이름을 중복하여 쓴 것이다. 지금 胡(호; 북호)와 夷(이, 동이)는 언어가 모두 통한다”66)고 하여 북호(北胡, 山戎 계통)와 동이(東夷, 孤竹・부여 계통)가 모두 언어가 통하는 하나의 ‘언어권’이라고 기록한 사실과 유사한 분류라고 할 수 있다.

『방언』에서도 ‘조선’은 기록되어 있으나 ‘기자조선’ 등은 전혀 없다.

9) 『淮南子』에 기록된 朝鮮과 箕子



『회남자(淮南子)』는 한(漢)의 고조 유방(劉邦)의 손자인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아직 권세를 갖고 있을 때 식객 지식인들의 설명을 모아 BC 2세기경 편찬한 책으로서, 한 무제(武帝)의 고조선 침략 직전에 쓰여진 책이면서 조선과 기자에 대한 논급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고조선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고문헌이다.67)

『회남자』는 5방위를 설명하면서 동방의 끝은 갈석산(碣石山)에서 조선을 지나 해가 뜨는 곳이고, 태호(太皡)족과 구망(句芒)족이 주관하는 곳으로 토지가 1만 2천리이다라고 하여 『관자』의 ‘발조선(發朝鮮)’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곳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5방위. 東方의 極은 碣石山에서 朝鮮을 지나고 대인국을 지나 일출(日出)을 맞는 곳 부목(榑木)의 땅, 청구(靑丘) 수목의 들에 다다른다. 太皡(태호)・句芒(구망)이 주관하는 곳으로서 1만 2천리이다.」68)



즉 『회남자』는 (진시황의 만리장성의 끝인) ‘갈석산’에서 그 이동은 朝鮮이고 그 동쪽 끝은 일출(日出)을 바로 맞이하는 곳으로 태호(太皡)족의 발상지이오 태호족이 주관하는 청구(靑丘)의 1만2천리의 땅에 이른다는 인식을 가진 것이었다. 이것은 『관자』에서 8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동쪽 ‘발조선’에 대한 추상적 인식과 유사한 인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회남자』는 이어서 동방의 끝지역(예컨대 발조선)은 당시의 선진문명과 개방적 선정이 시행되고 있는 곳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곳의 令에는 가로되, 여러 가지 禁(금)하는 것을 줄이고, 閉闔(폐합; 폐쇄한 것)을 개방하며, 막힌 것을 통하게 하고 障塞(장새, 장벽)를 통달하게 하라. 優游(우유; 유익한 교류활동)를 실행하고, 원한과 미움을 버리며, 부역과 죄를 풀어주고, 우환을 없게 하고 형벌을 중단하라. 關(관; 국경 검문소)과 梁(나루)을 개방하고, 창고의 재화를 풀어 베풀며, 외국의 원한과 講和(강화)를 도모하고, (주위 각국)을 撫(무; 안무)하여 부드러운 혜택을 행하고 강강(剛强; 강경하기만 한 것)을 중지하라.」69)



즉 ‘동방의 극’이라고 표현하면서 시사한 고조선의 본국, 동방의 끝 (예컨대 발조선) 지역에서는 대내적으로 선정과 화합・소통・관용 정책이 실시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개방과 평화교류 정책이 실시되고 있음을 기록한 것이었다. 이것은 한의 고조와 무제 당시의 BC 2세기 고조선 지역의 문명과 정책에 대한 『회남자』의 인식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기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곳에서 ‘현인’으로서의 행적을 기술하고 있으나, ‘기자동래설’ ‘기자조선후분봉설’ ‘기자조선설’ 류의 기술은 전혀 없다.



① 「무왕이 殷나라를 이기자 (…) 箕子를 석방해 주었다.」70)

② 「왕자 比干은 箕子처럼 머리를 풀고 미친척 하면 죽임을 면할 수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정직하게 행동하고 충성을 다하다가 죽는 것까지도 즐겼기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 이제 箕子를 따라서 比干을 보면 즉 어리석은 것이고, 비간을 따라서 기자를 보면 즉 비겁한 것이다.」71)

③ 「舜과 許由는 그 행동은 다르지만 모두 聖이고, 伊尹과 伯夷는 道는 다르지만 모두 仁이고, 箕子와 比干은 간 방향은 달랐지만 모두 賢이다.」72)

④ 「(무왕이 殷을 이기자마자) 먼저 湯의 묘당에 제사하고, 商容의 마을을 표창하며, 比干의 묘를 봉토해주고, 箕子의 투옥을 석방해준 것은 (…) (이것으로) 민심을 얻은 것이다.」73)



여기서 명확한 것은 주의 무왕이 투옥되어 있는 기자를 석방해 주었고, 기자가 상의 주(紂)왕에 의한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미친척한 것과 은(殷)에 충성을 다한 것을 ‘현인’이라고 높이 상찬함과 동시에 조선을 언급하면서도, 무왕의 ‘箕子조선후분봉설’이나 ‘기자동래설’나 ‘기자조선설’은 비슷한 것도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이것은 ‘기자분봉’이나 ‘기자동래’나 ‘기자조선’같은 그러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과 그의 지식인 집단은 갈석산 이동부터의 동방으로의 고조선의 지리적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동방의 끝 발조선 지역의 선정과 대외 개방정책 및 평화적 교류정책을 인식하여 높이 상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회남왕 유안의 이러한 고조선 인식이 고조선을 침략 정복하려는 동시대 한의 무제의 정책과 정면으로 대립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회남왕 유안은 권력투쟁에서 결국 한 무제에게 패배하여 유배지로 가는 도중 무제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이러한 당시 정세는 당시 漢의 지배층 내부에서 『회남자』와 같이 조선의 평화적 대외정책에 조응하여 조선과의 평화적 교류정책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고, 이에 반하여 한의 무제와 그 측근세력들은 고조선을 침략정복하여 한 나라의 지방군현으로 병탄하고자 해서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것은 고조선 침략을 추진하는 한 무제측의 세력집단에게는 고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이념적 근거를 만들 필요를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연구과제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중국의 춘추시대(BC 770~BC 403)와 전국시대(BC 403~BC 221)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노자(老子)・맹자(孟子)・신자(愼子)・양자(楊子)・묵자(墨子)・순자(荀子)・상현(尙賢)・상동(尙同)・장자(莊子)・상앙(商鞅)・한비자(韓非子)・추연(鄒衍)・여불위(呂不韋) 등 대가들이 출현하여 중국의 역사와 문예를 발굴하고 정리하여 체계화하던 시대이다. 그러나 제자백가의 누구도, 또한 방대한 서책들의 어떠한 서책에도 기자라는 ‘현자’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거나 “기자가 조선에 가서 조선왕이 되었다”거나 하는 언급이나 기록이 전혀 없다.

즉 BC 11세기부터 BC 3세기 말까지의 고중국의 기록에는 ‘기자’라는 ‘현자’는 있었으나, ‘기자동래설’ ‘기자의 조선후분봉설’ ‘기자조선설’ 등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누가 왜 ‘기자조선설’을 제시하여 보급했을까? 이것은 반드시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고찰해야 할 주제가 된다.







五. ‘箕子朝鮮說’의 형성과정



1) 伏勝(生)의 『尙書大傳』에서의 첫 ‘기자조선설’의 제시



중국에서 ‘기자조선설’이 처음 나타난 것은 BC 202년 한(前漢)이 세워진 이후 한의 무제(재위 BC 140~BC 87)가 고조선을 침공하기 직전시기부터이다.

한나라 초엽 문제(文帝, 재위 BC 179~BC 157년)때의 관인의 하나인 복승(伏勝 또는 伏生)이라는 사람이 공자의 『상서』에 대한 각종 전설들을 수집한 전설모음책인 뒤의 『상서대전(尙書大傳)』을 강론하였다. 정현(鄭玄)의 이 책 서문에 의하면, 복승의 남긴 강론을 그의 제자 장생(張生)과 구양생(歐陽生) 또 그 제자 아관(兒寬) 등이 기록하여 편찬한 책이 『상서대전』이었는데, 후에 후한의 정현이 주를 붙여서 4권의 책이 되었다. 74)

복승은 기자의 생존 약 1,000년 후에, 그리고 공자의 『상서』가 편찬된지 약 400년 후에, 『상서』에 대한 전설을 모았다고 하면서 『상서대전』 주전(周傳) 홍범조에서 “무왕이 은을 이기게 되자 감옥의 기자를 석방해 주니, 기자는 주나라가 석방해 준 것을 참지 못하여 ‘조선’으로 도망갔다. 무왕이 이를 듣고 조선을 봉하여 주었다. 기자는 이미 주 무왕의 봉함을 받았으므로 신하의 예를 부득불 갖추지 않을 수 없어서 무왕 13년에 무왕에게 내조(來朝)하여 배알하였다. 무왕은 기자의 내조를 받은 계기에 홍범에 대해 질문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실로 엉뚱한 해설을 술회하였다.



「(周의) 무왕이 箕子의 囚를 석방해 주었다. 기자는 周나라가 석방해 준 것을 참지 못하여 朝鮮으로 도망해 갔다. 武王이 이를 듣고 그(기자)에게 朝鮮을 封하였다. 箕子는 이미 周의 封함을 받았으므로 부득이 신하의 禮가 없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13년째 되는 해에 (기자는 周의 武王에게) 來朝하였다. 무왕은 그의 來朝로 인하여 이에 洪範에 대해 질문하였다.」 75)



『상서』 원전에는 무왕 13년에 무왕이 기자를 방문해서 ‘홍범구주’의 가르침을 받은 사실만 상세히 설명했는데, ① 복승은 무왕이 기자를 감옥에서 석방해 주자 주(周)의 혜택을 받은 굴욕을 부끄러워 참지 못해 조선으로 도망을 가니(기자동래설), ②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朝鮮侯)로 봉해 주었다는 것이다(기자조선후분봉설). ③ 기자가 이미 주 무왕의 분봉을 받아 조선후가 되었으므로 신하의 예가 없을 수 없어서(箕子朝鮮說) 무왕 13년에 내조(來朝)하니 기자의 내조로 인하여 홍범을 질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의 원문 『상서』와 너무 모순되는 날조된 해설이다. 왜냐하면 공자는 ① 기자가 석방되어 약 13년 후에 무왕의 방문을 받을 정도의 중국 周의 수도 근거리의 근기지역에 은거하고 있었으며, ② 무왕의 질문에 장시간 통치의 원리로서의 ‘홍범구주’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정도의 좋은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③ 공자의 원문 『상서』에는 기자가 무왕의 석방을 부끄러이 여겨 조선으로 도망간 사실도 없었고, ④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에 봉해준 사실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복승은 『상서』의 원문에도 없는 기자의 행적을 1,000년 후에 꾸며내는 일을 자행했을까? 지식사회학의 해석을 적용하면 이것은 복승과 그 제자집단의 시대에 漢의 문제와 무제가 만리장성 넘어 조선과 그 후국들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와 맞물려 있음이 주목된다. 복승과 그 제자집단의 내재적 동기는 한(문제와 무제)의 고조선 침공 정복 병탄을 원하여 지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복승의 역사왜곡이 한무제의 고조선 침략동기와 맞물려 있다 할지라도, 어떤 자료를 왜곡해서 사용하여 근거를 대어맞추려고 시도했을 터인데, 『상서대전』에서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76)

3) 司馬遷의 『史記』에서의 ‘箕子朝鮮說’ 수용과 보급



사마천(BC 145~?)은 복승보다 약 1세대 후의 사가로서 『사기』를 집필하면서 복승의 『상서대전』의 날조된 ‘기자조선설’을 수용하여 기자조선설을 사실화하려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① 箕子는 紂왕의 친척이다. (…) 紂가 황음하고 방종하자 기자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가로된 “떠나버리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자, 기자는 “신하된 자가 간했으나 듣지 않는다고 떠나버리면 이것은 군주의 악을 추겨주는 것이 되고 내 자신도 백성의 기쁨을 뺏는 것이 되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기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척하다가 잡혀서 노예가 되었다. 기자는 (풀려난 후에) 마침내 숨어살면서 시를 짓고 거문고를 치며 노래하면서 스스로 슬픔에 잠기니 그것을 전하여 기자조라고 불렀다. (…)」

「② 주의 武王이 殷을 이긴 후 箕子를 방문하였다. 무왕이 질문해 말하였다. (…) ③ 이에 무왕은 箕子를 朝鮮에 封했는데 그를 신하의 신분으로 대하지 않았다. ④ 그 후 기자가 周왕을 배알하기 위하여 옛 은나라 도읍지(殷墟)를 지나다가 궁실은 이미 파괴되어 거기에 곡식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고, 기자는 마음이 상하여 소리내어 울고 싶었으나 망설이고 울먹이자니 아녀자처럼 되는 듯하여 麥秀歌를 지어 노래하였다.」 77) (번호는 인용자)



사마천은 『사기』에서 먼저 『상서』의 공자 편찬의 원문과, 복생의 『상서대전』의 날조한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을 종합하였다. 즉 ① 기자는 은의 왕 주(紂)의 친척인데, ‘주’가 방탕하자 간했으나 듣지 않고 투옥하였다. 기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예견하여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척 해서 죽음을 면하여 노예로 신분이 강등되었는데, 周의 무왕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자 기자를 석방하였다. 기자는 은(상)의 충신으로 은의 멸망을 슬퍼하여 은거해서 악기를 두드리며 살았다. ② 周의 무왕이 기자를 방문하여 통치방침의 자문을 청하니 기자는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상세한 자문을 해주었다. ③ 이에 무왕은 기자를 朝鮮에 봉했는데 그를 신하의 신분으로 대하지 않았다. ④ 그후 기자가 周 무왕을 배알하기 위하여 옛 은나라 도읍지를 지나가다가 궁궐은 이미 파괴되어 그 자리에 곡식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상심하여 ‘맥수가’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이러한 기술에서 ①과 ②는 공자의 『상서』 기록을 원용하여 기술한 것이어서 소위 “기자조선설”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③과 ④는 복승과 그 제자들의 『상서대전』의 근거없는 ‘기자조선후분봉설’ ‘기자조선설’을 수용하여 약간 윤색한 것이어서 참으로 큰 문제를 내포한 것이었다.

첫째, 周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후왕으로 봉한 사실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마천은 (유일하게 복승의 『상서대전』에만 기술되어 있는) 근거없는 낭설을 끌어들여 무려 1,000년전의 있지도 않은 일을 사실인 것처럼 서술하였다. 무왕이 기자를 방문하여 질문하자 ‘홍범구주’의 통치원리를 자문해준 공로로 周 무왕이 기자에게 ‘기자조선후 분봉’을 하고 기자가 이를 받아 조선후왕이 되었다고 쓴 것이 기자의 商(殷)에 대한 충절 훼손의 위험성을 느꼈는지, 사마천은 무왕이 기자에게 조선을 봉하면서도 기자를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고 기자의 충절과 위신을 배려하여 윤색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복승의 황당한 ‘기자조선설’을 끌어다가 ‘무왕의 기자 조선후 분봉설’ 조작에 동참한 것을 표출시키고 싶지 않았는지, 『사기』의 ‘송미자세가’ 항목에 슬그머니 끼워넣는 편성으로 황당한 역사날조에 동참하였다.

둘째, 더욱 황당한 것은 조선후왕 기자가 주의 무왕을 배알하기 위하여 주나라로부터 무려 통칭 8,000여리나 먼 곳에 있는 조선으로부터 주나라 수도까지 주 무왕을 배알하러 (단 한번이라도) 다녔으며, 도중에 은(상)나라 도읍지를 지나다가 밭으로 변하여 곡식이 자라고 있는 은(상)나라 궁궐터를 보고 슬픔에 잠겨 ‘맥수가’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 주나라 수도와 고조선 수도 사이의 통칭 8,000리 거리를 기자가 주의 무왕을 알현하려 다녔다는 것은, 당시 교통수단을 고려하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또한 『사기』에서 기자가 무왕을 배알하러 은허(殷墟)를 지나다가 슬퍼서 불렀다는 ‘맥수가’는,78) 『상서대전』에는 미자(微子)가 지어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기자조선후분봉설’ ‘기자조선설’이 얼마나 조잡하고 근거없는 억설인가를 이 부분도 잘 나타내고 있다.

고대 중국의 최고의 학자 공자도 기자를 연구하여 『상서』에서 기자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술을 쓰면서도 사실이 아니어서 기술하지 않았던 것을, 공자로부터 4백년 후에, 복승과 그 제자들은 『상서』에 대한 전설을 모아 쓴다고 하면서 근거도 없이 ‘기자조선설’을 날조해 내고, 사마천은 복승을 끌어들여 ‘기자조선설’을 사실인 것처럼 날조에 동참하여 기술하였다. 복승과 사마천은 기자로부터는 무력 1,000년 후에 왜 근거도 대지 못한 ‘기자조선설’을 기술해 넣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반드시 복승과 사마천 양인에게 공동의 큰 동기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푸는데는 지식사회학적 접근이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인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식사회학적으로 보면 이데올로기 사학은 그것을 산출한 시대와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조건에 전적으로 구속되어, 지배자・지배층(또는 저항층)의 사회적 요청의 구속을 받는다. 복승과 사마천은 漢나라 초기에 한의 문제(文帝)・무제(武帝)가 고조선을 침공 침략하던 전후시기의 인물이다. 고대의 중국사학은 황제의 통치 요구에 복무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고조선 침공에 대한 회의파・반대파의 정치세력을 제압하고, 농민들로부터 대규모의 병력을 징발 편성하여 이웃나라 조선을 침공 침략하면서 많은 병사(농민)들의 생명을 희생시키기 위해서는 고조선 침략 침공의 정당성을 합리화할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는, 복승과 사마천의 ‘기자조선설’은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조건과 관련되어,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황제의 정치적 요구에 복무하는 고대 중국사가가 조작해낸 이데올로기적 가설이었다고 해석된다.

복승은 영향력이 없는 사가였으나, 사마천의 『사기』는 그후 중국의 ‘역사교과서’처럼 쓰인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진 저술이었기 때문에, 소위 ‘기자조선설’이 온갖 윤색을 가해가며 중국과 조선에 보급된 것이다.

고조선 해체 후에도 고조선 유민들의 치열한 저항으로 한4군의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는 더욱 필요하였다. 후한(後漢)의 반고(班固, AD 32~92)는 『헌서(漢書)』에서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의와 양잠과 직조와 ‘범금8조’를 가르쳐서 문명화시켜주었다고 날조 첨가하였다. 북위(北魏)의 어환(魚豢, AD 220~265)의 『위략(魏略)』은 기자가 조선후로 분봉되어 조선에 간후 그 자손들이 대대로 조선후를 세습했다고 하여 ‘기자조선설’을 더욱 강화해서 조작하였다.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AD 233~297)의 『삼국지(三國志)』는 기자가 조선후로 분봉되어 조선에 간후 기씨(箕氏)가 40여 대나 계속된 후에 조선후를 계승한 준(準)이 (朝鮮)王을 잠칭했고, 準이 기준(箕準)임을 주장하였다. 육조 송(六朝 宋)의 범엽(范曄, AD 398~445)의 『후한서(後漢書)』에서는 기자가 조선후로 봉함을 받아 조선에 가서 미개한 조선인을 ‘범금8조’를 제정하여 교화시켜서 예의와 문명을 가르쳐주었다고 서술하였다. 그후에 ‘기자조선설’은 갈수록 더욱 윤색되어 마침내는 기자가 조선후로 분봉되어 5천명을 인솔하고 조선에 가서 중국의 예(禮)・악(樂)・시(詩)・서(書)・의약(醫藥)・복서(卜筮)를 전하여 문물을 모두 중국에 따르도록 했다고 서술되기에 이르렀다.79) 모두 역사적 사실에는 없는, 근거없고 황당한 날조된 주장들이다.





六. 箕子의 실체와 유적 箕子墓



1) 箕子의 유적 箕子墓



공자의 기록에 의거하면, ‘기자조선후분봉’이나 ‘기자조선’은 실재하지 않았던 허구이지만, 인물로서의 ‘기자’는 ‘현인’(賢人)으로 실재하였다.

실제로 ‘기자’의 실체는 무엇인가?

‘箕’는 기자의 성씨가 아니다. ‘箕子’의 ‘箕’는 출신 또는 연고지 지역명(城 이름, 國 이름)이고, ‘子(자)’는 ‘爵’(작)이다.80) 후한의 마융(馬融)과 왕숙(王肅)은 기자를 주(紂)왕의 제부(諸父)로 보면서 자(子)성으로 보는 대표적 학자이다.81) 북건(服虔)과 두예(杜預)는 기자를 紂의 서형(庶兄)이라고 하였다.82) 이규경(李圭景)은 기자의 성씨를 商의 왕족의 성씨인 ‘子(자)’씨로 보았다.83) 사마천은 『사기』에서 기자는 은(상)의 마지막 왕 紂(주)의 친척이라고 하였다.84) 이를 해설하면서 『사기색은』은 기자의 이름은 ‘서여(胥餘)’라고 하였다.85)

즉 기자가 商의 주(紂)왕과 동일 왕족이었으므로, 기자의 성씨는 ‘子’(자)성이 명백하다. 송대 정초(鄭樵)의 『통지략(通志略)』은 기자의 성을 紂의 성씨와 동일하게 ‘子’씨라고 기술하였다.

위의 견해들을 종합하면 기자는 기읍(箕邑 또는 箕國)과 관련된 ‘子胥餘’(자서여 또는 子須臾)라는 이름의 BC 11세기 인물이 된다.

기자와 ‘기자조선설’의 실체를 정확히 밝히기 위한 사회학적 검증의 방법은 ‘사회학적 실증주의’를 적용하여 무엇보다 우선해서 기자 당시의 실제 유적을 조사하여 검증하는 것이다. 기자의 실제 유적으로서는 ‘기자묘’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 유적은 ‘기자’와 ‘기자조선설’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증거자료가 된다. 그 인물의 실제 묘를 찾으면 대개 그 거주지를 추정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대체로 멀리 이장을 하지 않는 한 묘지는 피장자의 거주지의 하루 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두예(杜預)의 말을 인용하여 「양국(梁國) ‘몽현(蒙縣)’에 箕子冢(기자총)이 있다고 기술하였다.86) 이것은 당 나라 당시에도 실재했던 기자 무덤을 기록한 것이므로,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몽현’은 ‘三亳’(삼박)87)의 하나인 ‘北亳’(북박)으로서 ‘蒙亳’(몽박)이라고도 불렸던 곳으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조현(曹縣) 남방에 있었으며,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邱)시 동북방에 연접해 있다.

그런데 ‘기자묘’를 문헌상으로 조사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기자묘가 있는 4곳을 들었다. ①은 『사기집해(史記集解)』에 기술되어 있는 위의 설명한 양국 몽현의 기자묘이다. ②는 『수경주(水經注)』에 기록되어 있는 박성(薄城)이다. ③은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기록된 귀덕부 상구(商邱)현이다. ④는 조선 평양 토산(兎山)의 기자묘이다.88) 그러나 조선 평양의 기자묘는 훨씬 후대인 고려시대 AD 1102년(숙종 7년) 경에 조성한 가묘(假墓)에 불과하다.89) 중국에 있는 3곳의 위치는 지방행정구역의 개편 때문에 동일한 하나의 ‘기자묘’의 소재지의 행정구역 명칭이 변경된 것뿐이다.90)

그러므로 ‘기자묘’의 실재한 곳은 양국의 몽현(지금의 산동성 曹縣 서남방)인데, 2천여년 경과하는 동안 여러 왕조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됨으로써 문헌상 3곳에 기자묘가 실재한 것으로 해석된 것이다. 현재에도 중국 산동성 하택시(荷澤市) 조현(曹縣)에는 ‘기자묘’가 남아 있다.91)

‘사회학적 실증주의’의 방법에서는 어떠한 고문헌 기록보다도 기자 당시의 유적인 이 산동성 조현(양국 몽현)에 있는 ‘기자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기자묘’를 발굴할 수만 있다면 그 부장품을 갖고 ‘기자’와 ‘기자조선설’의 실체를 정밀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라도, ‘기자묘’의 지리적 위치만 갖고서도 ‘기자조선설’의 진위는 밝힐 수 있다.

‘기자묘’가 실재하는 산동성 조현은 商의 마지막 수도 안양(安陽, 殷墟)의 하루거리이고, 상의 수도의 ‘기내(畿內)’지역 안에 있다. 기자묘가 실재하는 조현(양국 몽현)은 商의 子씨의 건국기의 수도인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시와는 바로 인접해 있다. 이것이 기자가 주의 무왕에 의해 석방된 후 별세할 때까지 고대사회에서 생활한 활동범위의 지리적 공간이다. 실재하는 ‘기자묘’는 한반도와는 ‘하루’가 아니라 ‘몇 달’을 쉬임없이 걸어야 하는 매우 먼 거리이다. 사회학적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소위 ‘기자동래설’ ‘기자조선설’은 ‘기자묘’의 위치만 갖고서도 성립되지 않는 ‘허위’이고 ‘허구’임이 명료하게 증명되는 것이다.92)




<그림 1> 현재 중국 산동성 서남부인 荷澤市 曹縣(商시대의 蒙亳, 秦・漢시대의 양국 蒙縣)에 남아 있는 ‘기자묘’



2) 箕國의 문제



다음은 ‘기자’의 유적 자체는 아니지만 일부 연구자들이 기자의 출신지 또는 봉국이라고 보는 ‘기국(箕國)’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중국측의 고문헌과 유적・유물 연구에 의하면, ‘箕國’은 2곳에 있었다. 그 하나는 상말주초에 지금의 山東省 서남부에 있었던 ‘㠱’(기, 箕)國이다.

중국 산동성 황현(黃縣) 이가촌(李家村)에서, 1951년에 8점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 6점에는 ‘㠱伯(기백)’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王獻唐(왕헌당) 교수가 이를 계기로 산동성 일대에서 발굴된 ‘㠱’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청동기들을 문헌과 유물들에서 조사하여 모두 43점을 찾아내어 비교분석하였다.93) 그의 연구에 의하면, 商대의 청동기에는 ‘㠱伯(기백)’ ‘㠱侯(기후)’ ‘㠱公(기공)’ 등 귀족신분 중심의 명문이 새겨져 있고, 周 시대의 청동기에는 ‘㠱’국의 명문이 나온다고 한다. 또한 그에 의하면 ‘㠱(기)’國과 ‘杞(기)’國은 다른 나라로서 그 제후국 통치자가 ‘㠱’국은 姜(강)성이고, ‘杞’국은 姒(사)성으로서 두 씨족은 서로 다른 씨족이라고 지적하였다.94) 왕헌당은 정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하여 周시대의 ‘㠱’國의 지리적 위치를 다음의 <그림 2>와 같이, 지금의 산동성 서남부로 비정하였다.95) (그림의 □ 사각형 위치)





<그림2> 周시대 㠱國의 위치(王獻唐 작성)와 箕子墓의 위치(필자 추가)



왕헌당은 周시대에는 보이지 않는데 춘추시대에 내려 오면 산동성의 ‘齊(제)’의 북부에 姜성의 집단인 ‘紀’국이 나오기 시작한다고 지적하였다.96) 예컨대 『춘추좌씨전』의 은공(隱公) 원년조에, 「8월 紀人(기인)이 夷(이)를 공격하였다.」 97) 등과 같은 것이다. 왕헌당은 지배씨족의 다름과 시대의 다름에 주목하여 ‘㠱’국과 ‘杞’국과 ‘紀’국은 서로 다른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왕헌당의 연구에는 ‘箕子’는 한글자도 나오지 않으며, 따라서 㠱伯, 㠱侯, 㠱公은 箕子族(기자족)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관찰되어 있다.

다른 하나의 ‘기국’은 춘추전국시대에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곡현(太谷縣)에 있었던 ‘箕’국이다.

중국 고대학자들은 箕국이 실재했다는 증거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다음의 기록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僖公 33년(AD 627년) 狄이 晉과 箕를 정복하였다. 8월 戊子에 晉의 侯가 箕에서 狄에게 패하였다.」98)



중국 일부 고대학자들은 춘추시대의 이 ‘箕’가 상말주초의 ‘箕’국이었고, 지금의 산서성 태곡현 동쪽에 있었음에 대체로 의견일치를 보여왔다.

전국시대 말기까지의 고문헌에는 무왕의 기자에게의 분봉이 전혀 한 글자도 나오지 않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기자와 관련된 ‘箕’국은 산동성의 ‘㠱’국과 산서성의 ‘箕’국 가운데 어느 箕國일까? 소위 ‘기자조선설’ 검증과는 관계없는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더 쓰지 않는다.

그러나 ‘산동성’의 ‘㠱’국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자의 무덤인 ‘기자묘’가 있는 산동성 조현(梁國의 蒙縣)은 산동성 남부 ‘㠱’국과 근거리인데 비하여 산서성 태곡의 ‘箕’국은 ‘기자묘’에서 태행산맥을 넘어 너무 먼 거리의 서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송의 정초(鄭樵)의 『통지략(通志略)』이 「箕氏는 子성인데, ‘箕子之國’은 기내제후(畿內諸侯)였다.」99)고 한 것은 산동성의 㠱국을 가리킨 것으로, 이곳은 北亳(북박)의 바로 옆이어서 商의 기내(畿內)였지만 산서성 太谷(태곡)은 태행산을 넘어 너무 원거리여서 商의 畿內(기내)는 될 수 없는 지역이었다.

箕국의 지리적 위치와 함께 종합해 볼 때, ‘기자’는 성명이 ‘子胥餘’로서 산동성 㠱국과 관련될 수도 있는 商의 왕족 가운데 하나였으며, 紂가 폭정을 하자 이를 간하다가 받아들여지기는 커녕 왕자 비간(比干)이 죽임을 당하고, 왕족 미자(微子)가 紂왕을 버리고 낙향(지금의 하남성 商邱시)해 버리는 것을 보고, 거짓 미친척 하여 죽음을 면하고 옥에 갇혔다가 (후에) 周의 무왕이 商의 紂를 멸망시키고 기자를 석방해 주자, 낙향하여 지금의 산동성 조현 부근에서 은거하다가 그곳에서 별세한 것으로 해석된다.

기자는 석방된 후 생전에 周의 무왕이 방문하여 통치원리를 묻자 ‘홍범9주’로 설명해 주었으나, ‘仁(인)’을 지켜서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周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한 일도 전혀 없었고, 기자도 조선에 간 일도 전혀 없었다. 주의 무왕은 周를 세운지 4년 만에 죽고, 생전에 분봉한 기록에는 어디에도 기자의 이름은 없다. 무왕 별세후 나이 어린 성왕(成王)이 뒤를 잇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한 이후 성왕 대에 큰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다수의 제후 분봉이 있어 봉건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는데, 이때에도 기자의 이름은 어떤 기록에도 한자도 나오지 않는다.

기자는 ‘仁者(인자)’로서 商에 대한 지조를 지켜 무왕 때 석방된 후 낙향하여 그 곳에서 방문객만 맞으며 은거하다가, 그 낙향한 고향에서 별세하여 그 부근에 안장된 것이 지금의 산동성 조현(秦・漢 시대의 梁國 蒙縣)의 ‘기자묘’라고 해석된다.



3) 요녕 喀左의 ‘㠱侯’銘 靑銅器의 문제



옛 고죽국(孤竹國)의 영토였던 중국 요녕성 객좌현(喀座縣) 고산(孤山) 북동촌(北洞村) 산기슭 교장갱(窖藏坑: 물건을 저장해 두는 움)에서 1973년에 6점의 청동기가 일괄 발견되고(제1호 매장지), 여기서 겨우 3.5미터 떨어진 지점(제2호 매장지)에서 다시 6점의 청동기가 발굴되었다. 제1호 매장지의 발굴물 가운데 동뢰(銅罍: 청동 큰 제기) 1개의 안쪽에 「父丁孤竹亞微」(부정고죽아미)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서, 이 청동기들이 「고죽국의 아미(亞微)」씨족의 소유물이었거나 제작물이었다고 해석되었다. 또한 제2호 매장지의 발굴물 가운데 방정(方鼎: 직사각형 솥) 1개에는 「亞㠱侯矣(아기후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100) 이 청동기들은 대체로 상말주초의 청동기들로 시대가 편년되었다.

북동촌 2호매장지의 ‘㠱侯’ 명문이 있는 방정(方鼎, 㠱侯方鼎)이 출토되자, 학계 일부에서는 ‘㠱侯’를 ‘箕子’로 해석하고, 이것을 발해만 북안의 객좌현 일대 옛 고죽국의 자리에 ‘箕子朝鮮(기자조선)’ 또는 ‘箕子國(기자국)’이 있었다는 증거유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101)

그러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箕子’와 ‘㠱侯’(객좌현 출토 ‘기후방정’의)는 다른 것이라고 본다.

(1) 기자의 유적인 ‘기자묘’에서 㠱侯 명문의 청동기가 출토되었으면 箕子와 㠱侯는 동일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나, 수천리 멀리 떨어진 당시 고죽국 영토였던 요녕성 객좌현에서 출토된 㠱侯 명문의 청동기를 기자 유물 또는 기자족 유물로 보는 것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지나친 무리이다. 산동성, 하북성, 하남성, 섬서성 등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㠱侯・㠱伯・㠱公의 명문이 있는 청동기들이 수십 점 출토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㠱侯 명문의 청동기를 기자소지 유물로 본다면, 수십명의 기자가 산동성・하북성・하남성・섬서성・요녕성에 출현하는 것으로 되니, 다른 명료한 증거가 없는 한, 이것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2) 箕子(子胥餘)는 성씨가 ‘子’씨이고 㠱侯의 성씨는 ‘姜’씨로서, 성씨가 다르다. 㠱侯 또는 㠱伯 등의 명문의 㠱의 성씨는 ‘姜’씨임이 상당히 깊이 연구되어 있다.102) 따라서 객좌현 북동촌 출토의 ‘㠱侯方鼎’은 箕子(子胥餘)의 유물이 아닌 다른 ‘㠱侯(姜 또는 씨)’의 유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3) 기자시대인 BC 11세기(중국의 商末周初)에 㠱侯方鼎이 발견된 발해만 유역 객좌현 일대를 통치하고 있던 나라는 고조선 후국 고죽국이었고, 고죽국 군주의 성은 墨胎(묵이, 묵태, Moi, Mutai)씨였다. 고죽국은 BC 17세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 형성되어 BC 3세기초까지 墨胎씨가 고조선 후왕으로 이 지역을 강력히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이 지역에 ‘기자조선’이나 ‘기자국’은 공간적으로 존재할 여지가 없었으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103)

(4) 산동반도에서는 청동 㠱器가 㠱伯・㠱侯・㠱公 기타 㠱씨족 명문과 함께 다수 발견되었다. 산동지역의 청동 㠱器를 집중연구한 왕헌당(王獻唐) 교수는 㠱국이 산동성 남부 창현(菖縣)에 있었으며, 商의 祖庚・祖甲 시대에 정인(貞人) 이 기국후작(㠱國侯爵)이었고, ‘㠱侯’의 족휘(族徽)가 새겨진 청동기는 貞人 계열의 청동기임을 시사하였다. 산서성과 객좌현 등지에서 발견된 㠱侯銘(기후명) 청동기도 貞人(商의 점복 및 제사담당 귀족) 계열의 청동기라고 볼 수 있다. 箕子는 왕족 子씨였고 貞人이 아니었으니, 객좌현의 㠱侯方鼎(기후방정)은 ‘箕子’와는 관계가 없는 청동기임이 거듭 증명되는 것이다.

(5) 고죽국은 청동기문화가 商보다 먼저 형성 발전된 고조선 후국이었으므로, 고죽국 영토였던 객좌현 북동촌에서 발견된 기후방정(㠱侯方鼎)은 고죽국 정인(孤竹國 貞人)의 제사용기였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 해석이 될 것이다. 그것은 商왕족 箕子(子胥餘)의 조선동래(朝鮮東來)를 증명하는 청동기는 전혀 될 수 없다. 고죽국의 청동기 ‘孤竹亞微(고죽아미)’의 명문이 있는 청동기가 출토된 동일한 북동촌에서 기후방정(㠱侯方鼎)이 출토된 사실도 이를 보강하여 증명해 준다.

(6) 필자의 견해로는 箕子는 집단을 이끌고 ‘발조선’은 커녕 고조선 후국인 고죽국에도 집단이동한 일이 없었다고 본다. 객좌현의 기후방정(㠱侯方鼎)은 고죽국 군주를 도와 점을 치고 제천 제사를 담당했던 고죽국 정인 기후(貞人 㠱侯)의 유물이며 고죽국에서 제조된 것이라고 본다.

기자는 商의 마지막 수도 은(殷, 安陽)에서 상 멸망 후 주의 무왕에 의해 석방되자 기내지역인 몽박(蒙亳, 진 시대의 梁國의 蒙縣, 지금의 산동성 曹縣)으로 돌아와서 그 부근에서 은거하다가, 그 부근에서 별세하여 그 부근에서 묻혔고, 그 남아 있는 기자 당시의 유일한 유적이 산동성 조현의 ‘기자묘’임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후 춘추전국시대에 㠱국 또는 箕국(箕城)과 관련된 箕씨가 새 성씨로 출현하여 산동성, 산서성, 섬서성, 하북성, 하남성 일대에 활동하면서 약간의 기록과 유물을 남겼을지라도, 이것은 ‘箕子’ 별세 수백년 이후 일이니 ‘기자동래’나 ‘기자조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기자의 유적・유물 가운데서, ‘기자묘’는 명백하게 기자의 유적으로서 기자 실재의 증명자료가 된다. 그러나 객좌현의 기후방정(㠱侯方鼎)은 연구 대상은 되지만 기자 또는 기자집단의 유물로는 보기 어렵다. 필자는 객좌현의 기후방정(㠱侯方鼎)은 고죽국의 유물이라고 본다.


七. 箕子시대의 동북아시아 정세



(1) 武王과 成王의 분봉 명단기록에 없는 箕子



사회학적 실증주의는 문헌고증을 넘어서서 당시의 유적・유물을 더 중시할 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정치세력의 크기와 범위를 더 중시한다. 이러한 관점과 방법에서는 周의 무왕의 사회정치세력이 실제로 어디까지 미칠 수 있었는가, 기자를 조선후로 분봉할만큼 조선에도 무왕의 사회정치세력이 지배했는가를 반드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기자는 상(은)말주초의 상의 왕족계통 인물이다. 필자는 商은 본래 고조선 이주민들이 건국한 고을국가가 중국 중원 평야지대로 진출 발전하면서 원주민을 포섭하고 이주민도 원주민화하면서 발전한 고대국가였다고 본다.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직접 언급을 회피한 대표적 학자가 부사년(傅斯年)이다.

商은 건국하여 멸망할 때까지 고조선과의 관계 측면에서 볼 때 3단계를 거쳐 발전하였다.

제1단계는 고조선 이주민들이 고조선 요동・요서지방에서 건너가 제수(齊水) 하류에 ‘박’(亳)이라는 고을국가를 건국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발전한 단계이다. 제1대 帝嚳(제곡, 契)으로부터 제14대 湯(탕, 天乙)까지가 이 시대로서, 국명 ‘박’은 ‘밝달’의 ‘박’인 고조선식 국명이다. 제수강변을 따라 ‘亳’(박) ‘薄’(박) ‘博’(박) ‘薄姑’(박고) 등 여러 가지 한자로 표기된 ‘박’은 박달족 국가임을 나타낸 고조선말 ‘박’자의 한자 소리표기인 것이다.104) ‘박’은 도읍지를 발전과정에서 8번 천도했다는 설이 있다. 105)

제2단계는 湯(탕, 天乙)이 BC 1,600년 경 夏왕조를 멸망시키고, 商(지금의 하남성 商邱縣)에 도읍을 정하여 공식적으로 국명을 ‘商’으로 정하여 사용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도 상의 왕족과 지배층은 물론이오 국민들도 고조선 이주민의 후예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 학자들은 이 제2단계의 ‘商’시대부터 ‘상’의 건국 시기로 보고 있다. 湯을 제1대로 하는 경우 제19대왕 盤庚(반경, 般庚)이 도읍을 은(殷, 지금의 河南省 安陽)으로 천도할 때까지가 제2단계의 시기이다.

제3단계는 반경이 은(殷, 安陽)에 도읍하여 제30대 紂(주)왕이 ‘주(周)’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 BC 1,046년경까지의 시기이다. 이 단계에서는 商의 지배층도 원래의 고조선 후예들이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고조선문명을 흡수한 후 독자적 문화유형을 창조하고, 선주민 고중국인들도 商의 지배층에 일부 참여하여 독자적 은문화가 형성되었다. 고대 중국학자들은 이 제3단계의 商을 ‘은허(殷墟)’ 시기 또는 ‘은(殷)’ 시기로 부르기를 즐겨하고, 아예 제2단계의 ‘商’까지도 포함하여 ‘商’을 ‘殷’으로 교체하여 호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3단계의 공식 국명은 여전히 ‘商’이었다.106)

商은 마지막 제3단계에도 문화는 찬란한 청동기문화를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세력범위는 사방 몇 백리 정도의 중규모 고대국가였다. 지도 <그림 3>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商의 북방 세력경계는 아직 오늘의 천진・북경 부근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商은 대외적으로 북으로는 위(韋), 남으로는 회이(淮夷), 서로는 하(夏)와 대결하면서도 가능한 한 평화정책을 추구했을 뿐 아니라, 북으로 고조선 후국들인 고죽(孤竹)・영지(令支)・도하(屠何)・산융(山戎) 등의 강력한 군사력의 배후 보호가 배경이 되어 높은 문화의 발전이 성취되었다. ‘고중국문명’ 또는 ‘황하문명’이라고 개념화하는 실체는 이 제3단계의 商문화가 형성의 핵심이 되어 있다.





<그림 3> 商의 사회정치 세력 범위(중국 사회과학원 작성 지도에 필자가 부호・원・국명 첨가) 내선은 商의 畿內 세력 범위. 외선은 商의 전성기의 세력 범위. ▲은 기자묘의 위치.



제3단계의 마지막 왕 주(紂)가 현명하지 못하면서 폭정을 하고 사치를 즐기면서 국정을 잘 살피지 않았으므로, 왕의 친척인 충신 미자(微子)와 기자(箕子)와 왕자 비간(比干)이 간하였다. 어리석은 주(紂)왕이 노하여 왕자 비간을 죽이자, 이를 본 미자는 조정을 떠나 도망가고, 기자는 머리를 풀어헤쳐 미친척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 죽음을 면하고 노예로 강등되어 투옥되었다.

商의 신하의 위치에 있던 희발(姬發: 뒤의 周의 武王)이 군사를 일으켜 商(殷)의 紂왕을 쳐서 BC 1,046년경 商(殷)을 멸망시키고 周를 건국하여 무왕이 되었다. 무왕이 기자를 석방해 주자, 기자는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그러나 무왕시기 초기 周나라는 국력이 약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할 수 없었다.

주 무왕은 봉건제후제도를 채택하여 수도 지역만을 직접 통치하고, 지방 성읍들은 기내지역까지도 친척과 토호들에게 통치권을 할양하여 충성을 약속받아서 지방 분권통치제를 통하여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주의 무왕은 아우인 숙무(叔武)를 成(성, 산동성 寧陽)의 후(侯)로, 아우인 숙처(叔處)를 霍(곽, 산서성 霍)의 侯에 봉하고, 商의 紂왕의 아들 무경록부(武庚祿父)를 회유책으로서 邶(패, 商의 옛 도읍 朝歌, 하남성 湯陰)의 侯에 봉하였다. 그 범위는, 지도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商 왕조의 세력범위 보다도 더 좁은 취약한 것이었다. 周의 무왕의 제후의 북방한계선은 지금의 북경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훨씬 남쪽의 ‘곽(霍)’(곽, 산서성)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무왕의 제후 분봉 기록에는 기자는 들어있지 않았다. 기자는 주 무왕의 친척이 아니었고, 상의 투옥된 왕족의 하나에 불과했으므로 기자가 비록 현인이었다 할지라도 제후분봉의 첫 대상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며, 고문헌은 무왕이 기자를 석방해 준 것을 은전으로 기록하고 있는 정도이다. 주의 무왕은 상을 멸망시킨지 4년(일설 10여년) 만에 타계하였다.






<지도 4> 周(서주)의 사회정치세력 범위(중국 사회과학원 작성 지도에 필자가 부호・원・국명 첨가) 내선은 周의 초기세력 범위, 외선은 전성기의 세력 범위

(▲은 기자묘의 위치)


http://blog.daum.net/yhshin37/20

.
이름아이콘 한빛
2020-10-21 11:11
그러므로 주의 무왕이 제후를 임명했다 할지라도, 주 무왕의 사회정치세력 범위 훨씬 밖에서 당시 한반도와 요동・요서지역에 있으면서 주보다 훨씬 강대했던 독립국가 고조선을 주의 무왕이 ‘기자’에 봉해주었다는 것은 사회학적 실증주의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주 무왕이 갑자기 죽은 후 나이 어린 세자 성왕(成王)이 등극하자 商의 유민세력이 산동과 회수지역의 ‘동이(東夷)’들과 연합하여 商을 재건하려고 봉기하였다. 성왕의 섭정 주공 단(周公 旦)은 놀라 소공 석(召公 奭)과 함께 대군을 일으켜 반란군을 토벌하고 산동과 회수 지역의 ‘동이’ 세력들도 진압하였다. 그 결과 周의 영토가 확대되자, 주공은 아우 당숙(唐叔 일설 康叔)을 봉하여 지금의 하남성 북부에 위(衛)후국을 세우고, 하북 지방에 소공 석의 장자를 봉하여 연(燕)후국을 세우며, ‘동이’의 본거지인 산동지방 곡부(曲阜)에 자신(周公 旦)의 아들 백금(伯禽)을 봉하여 노(魯)후국을 세우고, 제남에 여상(呂尙, 주공의 軍師 太公望)을 봉하여 제(齊) 후국을 세웠다. 그리고 군공을 세운 주의 희(姫)성 왕족과 기타 장군들에게 군소국들을 분봉하여 본격적 봉건제도가 실시되었다. 『순자(荀子)』는 주의 성왕시대에 어린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 주공(周公)이 봉한 대소 제후국이 71개국이 되고 그 가운데 왕과 동성인 희(姫)성 제후국이 53개국이라고 하였다.107)

주목할 것은 이 대대적 분봉이 무왕의 사후 성왕 때 周公에 의해 계속 실행된 것인데, 이때에도 기자에게 분봉해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혹시 또 있었다고 가정하여도 周 무왕의 분봉이 아니라 성왕의 섭정 周公의 분봉이니, 무왕의 ‘기자조선후분봉설’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주목할 것은 그후 강성기의 周의 북방에서 고조선 후국 고죽(孤竹)・영지(令支)・도하(屠何)・산융(山戎) 등과 접경한 주(周)의 후국 위(衛)나 연(燕)이 성왕(成王) 시기에 비로소 분봉되어 설치되고 그후 성장한 주의 제후국이라는 사실이다.

성왕 때의 周公에 의한 대대적 분봉 때에도 ‘箕子’의 이름은 없다.

그러므로 周의 무왕에 의한 기자의 소위 ‘조선후분봉’ 운운은 실증적으로는 역사적 사실이 전혀 아니다.

(2) 孤竹國과의 관계



수(隋)의 배구(裵矩)처럼108) 혹자는 주 무왕의 ‘기자 조선후 분봉설’을 논증하기 위해 지금의 난하 중・하류 양안에 있던 고죽국을 기자에게 조선후로서 분봉해준 것이라고 추정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가정도 당시 국제정세상 전혀 성립할 수 없는 허구이다. 왜냐하면 고죽국의 군주는 성씨가 墨胎(묵태, 무이, 또는 墨)씨로서, 商나라 건국 전에 존재해서 BC 3세기까지 墨胎씨가 계속 군주로 계승되어 온 것이 고중국 기록들에서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기자의 성씨는 商의 왕족과 같이 ‘子(자)’씨였다.

뿐만 아니라 고죽국은 당시 고조선의 서변 후국이어서 고추가 묵태씨를 보내어 통치하고 있던 강력한 고조선 후국이었고, 商과는 친밀하게 외교관계를 갖고 있었으나 周와는 관계가 없는, 당시에는 초기의 주보다 더 강대한 나라였다.109)

따라서 기자가 고죽국에 망명했다가 주 무왕으로부터 고조선후왕의 봉작을 받았다거나, 무왕이 고죽국을 기자에게 분봉해 주었다는 등의 가정은 당시 고죽국 주변의 국제정세에서 전혀 성립할 수 없는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고죽국은 周의 통치권 밖에 있던 고조선의 후국이었으며, 매우 강력하여 商의 북방에서 商을 원호해주던 나라로서 商・周의 시대에 墨胎씨가 계속 군주로 통치하고 있던 나라이므로 처음부터 주 무왕의 세력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주 무왕의 분봉 대상지역이 전혀 될 수 없는 나라였다.



八. ‘犯禁8條’의 실체


기자가 고조선에 가서 조선왕이 되어 예의・농경・양잠을 가르치고 ‘범금8조’를 제정하여 율령정치를 했다는 ‘기자조선설’이 허구라면, ‘범금8조’의 실체는 무엇인가? ‘범금8조’가 기자 이전에 고조선의 율령이었다는 두 가지 기록의 흔적이 있다.

첫째는 공자의 『상서』에 백이(伯夷)의 업적이 “법령을 제정하여 백성을 형벌로부터 보호했다”고 지적되어 있는 기록이다.

기자와 ‘고죽국’의 왕의 큰 아들 백이(伯夷)는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백이는 고죽국에서 왕자시절에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담당하다가 왕위 승계에 대해 부왕의 내심이 둘째 아들(叔齊)에게 있음을 알고 商에 망명했었다.

그런데 공자가 편찬한 『상서』(書經)에는 망명 전의 백이가 왕자 시절에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보던 큰 업적의 하나로 「법령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자의적) 형벌로부터 막았다」(伯夷降典 折民惟刑)는 사실을 들었다.110)

기자가 고죽국과 조선에 망명간 일도 없고 조선왕이 된 적도 없는데, 고조선의 후국인 고죽국에서 백이가 기자 이전에 이미 ‘법령’을 제정하여 시행한 큰 업적을 내었다고 『상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백이가 왕자 시절에 부왕을 대신하여 한 때 정사를 본 고죽국은 고조선의 후국(侯國)이었으므로 백이의 법령은 고조선 본국의 ‘범금8조’를 도입하여 수정해서 시행한 것을 『상서』에 백이의 치적으로 기록된 것일 수 있다.

둘째, 『한서』에 기록된 ‘범금8조’는 한나라 관리들이 처음 점령지에 와서 ‘낙랑조선민’의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고조선’을 가리킨 것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현재 ‘범금8조’의 내용은 모두 전해지는 것은 없고, 『한서』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범금’ 3개 조항만 전해지고 있다.



① 사람을 죽인자는 바로 사형에 처한다(相殺以當時償殺).

②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자는 곡식으로써 배상한다(相傷以穀償).

③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그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단 재물로 죄를 면하여 속량하고자 할 때는 1인당 50만을 배상하도록 한다(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111)



이 ‘범금8조’는 당시 고조선에서 시행되고 있던 율령임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조선의 중앙정부의 부서에는 개국 시기부터 ‘주형’(主刑)을 담당하는 율령담당 부서가 있었고, 또한 『한서』에 ‘낙랑조선민’에서는 범금8조가 시행되었다고 했는데,112) 이것은 그들의 도착전의 ‘고조선민’의 상태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초에 한나라 관리들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에는 백성들이 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는데, 한나라 통치시기에는 도둑이 생기고 민속이 더욱 각박해져서 ‘범금60여개조’로 늘게 되었다고 기록된 것도 ‘범금8조’는 이전 고조선의 율령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 때 ‘낙랑조선민 범금8조’와 그후 ‘범금60여조’는, ‘범금8조’가 그 이전 고조선 시대에 시행되어 오던 것이고, 한4군 시대에는 부정부패의 증대에 관련하여 조목이 ‘범금60여조’로 증가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 해석이 되는 것이다.113)


요컨대 공자의 『상서』가 높이 상찬한 고죽국의 백이의 율령이 ‘범금8조’였고, 이것은 본국인 고조선의 율령 ‘범금8조’를 후국인 고죽국의 현실에 알맞게 수정하여 (또는 간소화하여) 제정 시행한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이것은 ‘기자’가 상(은)의 감옥에서 석방되기 훨씬 이전에 백이(伯夷)가 고주국에서 제정 시행한 율령이었고, 고조선 율령의 일부였으니, 후에 ‘기자’가 처음 만들었다는 주장은 완전히 허위인 것이다. 또한 BC 108년에 한나라 관리들이 점령지에 도착하여 “낙랑조선민이 시행하고 있던 범금8조”를 발견한 것도 이전부터의 ‘고조선의 범금8조’를 발견해 기록한 것에 불과하였다고 해석된다.

기자는 조선에 망명해온 일도 없었고, 조선왕이 된 일도 없었으니, 소위 ‘기자’의 ‘범금8조’ 제정과 교화정치란 것은 ‘기자조선설’을 꾸며낸 중국고대사가들의 일부가 ‘고조선 범금8조’를 훔쳐다가 견강부회하여 ‘기자의 범금8조’ 제정 실시로 꾸며내고 합리화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범금8조’의 실체는 고조선의 개국시기부터 실시되어 오던 고조선의 율령이었다고 해석된다.


九. 맺음말: 기자조선설의 허구성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사회학적 실증주의는 당시의 유적・유물을 가장 중요한 증거자료로 중시하고, 후대의 고문헌 기록은 부차적 참고자료로 등급화하여 엄격한 사료비판을 통해서 지식사회학적으로 해석한다. 지식사회학적 방법은 기록에 나타나는 어떠한 주장・학설・사상 등 지식을 그것이 산출된 사회와 시대의 지배집단 또는 저항집단의 목적과 이데올로기에 구속되고 투영된 것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특히 객관적 과학적 관찰과 서술방법이 확립되지 않았던 고대・중세의 주장・학설・사상에 대해서는 더욱 더 지식사회학적 관찰과 해석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이를 ‘기자조선설’에 적용하면 BC 11세기 당시의 유적・유물은 ‘기자묘’ 뿐이므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증거자료이고, 그로부터 1,000년 후의 BC 2세기~BC 1세기와 그 이후 기록들은 부차적 참고자료로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기자는 商(殷)의 마지막 왕 紂의 친척으로서 성씨가 ‘子(자)’였고 이름은 ‘胥餘(서여)’로서, 성명이 ‘子胥餘’(자서여)인 학식이 높은 ‘현인’이었고 상(은)의 충신이었다. ‘箕’는 기자의 출신지 또는 연고지 고을의 이름이었다. 기자는 주(紂)의 폭정을 간하다가 왕자 비간(比干)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미치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세하여 죽음을 면해서 ‘노예’가 되어 투옥당하는 벌을 받았다. ‘기자’는 BC 11세기경 중국에 실재한 인물이었다. 상을 받들던 周의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紂를 친 후 기자를 석방해 주자, 기자는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은거지는 명확치 않으나 무왕이 방문하여 기자의 ‘홍범구주’의 통치원리강론을 들은 것으로 보아 주의 도읍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 추정된다.


(3) 기자의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것은 공자가 편찬했다는 BC 6세기 경의 『상서』(書經)이다. 그러나 공자는 기자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면서도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에 봉했다거나, 기자가 조선후로 조선에 왔었다는 류의 기록은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만일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공자가 기자를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면서 이 중대한 사건을 한 글자라도 기술하여 남기지 않았을 리가 없다. 도리어 공자의 『상서』에는 기자가 석방된 후 周 무왕 13년에 무왕이 기자를 방문하여 홍범구주의 질의응답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어서, 기자가 무왕이 방문할 수 있는 주나라 수도 근기지역에 은거했었지, 매우 멀리 고죽국이나 조선에 망명해서 조선후로 봉함을 받았을 가능성은 아예 배제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그 많은 서책들의 어디에도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한 글자도 없다.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는 기록도 없다. 이것은 기자의 ‘조선으로의 망명’이나,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왕으로 분봉했다는 후세의 전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즉 ‘기자’와 ‘기자조선’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기자’라는 인물은 BC 11세기의 실제 인물이었으나, ‘기자조선후분봉설’(箕子朝鮮侯分封說)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BC 2세기~BC 1세기에 꾸며진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4) 기자와 관련해 남은 유일한 유적은 ‘기자묘’(箕子墓)이다. ‘기자묘’는 현재 중국 산동성 조현(曹縣, 商시대의 蒙亳, 秦・漢시대의 梁國 蒙縣)에 있다. 사회학적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기자의 유일한 유적인 ‘기자묘’가 산동성 조현에 있다는 사실은, 『관자』의 표현을 빌리면 8,000리나 매우 멀고 먼 거리에 있는 朝鮮으로 ‘기자’가 망명해 가서 조선왕이 된 일이 없으며, 따라서 소위 ‘기자동래설’・‘기자조선후분봉설’・‘기자조선설’의 가설은 허구의 허위에 불과한 것임을 명확히 실증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기자묘를 한반도에서 산동성 조현으로 이장해왔을지 모른다고 상상할 수도 있으나, 당시의 국제적 세력관계나, 지리 교통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그러한 기록이나 증거자료도 전혀 없다. 기자는 현재 ‘기자묘’가 있는 곳의 1일 정도 도보거리 지역 범위 내에서 은거하다가 별세하여 지금의 ‘기자묘’ 자리에 묻힌 것이라고 보는 것이 사회학적 실증주의의 관찰이다.

‘기자묘’의 산동성 조현에의 실재야말로 ‘기자조선설’의 허구를 실증하는 가장 명확하고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증거이다.


(5) 일부에서 기자가 발해만 북안 고죽국(孤竹國)의 후왕으로 봉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것도 허구이다. 난하 중・하류의 양안에 실재했던 고조선 후국 고죽국은 중국 商시대부터 고죽국이 멸망한 BC 3세기 초엽까지 군주의 성씨가 墨胎(또는 墨)씨였다. 따라서 일부에서 기자가 고죽국에 망명하여 고죽국 군주가 된 것을 ‘조선왕’이라고 해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은 성립될 수 없다. 기자가 생존하고 사망한 당시에도 고죽국 군주는 기자가 아닌 여전히 墨胎씨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죽국을 도입하여 상정하는 소위 ‘기자조선설’도 허구이다.


고죽국 영지였던 객좌현 북동촌에서 출토된 ‘㠱侯(기후)’ 명문이 있는 방정(方鼎, 직사각형 솥)은 고죽국 군주에 속한 정인(貞人, 점복 및 제사 담당자)의 유물이었고, 기자의 유물이 아니다. 箕子는 子씨였고, 㠱侯는 姜씨였다.


(6) 『한서』와 『삼국지』. 『후한서』 등에서 기자가 조선에 가서 왕이 되어 ‘범금8조’를 설시하여 백성을 예의로 교화시켰다는 기록도 사실이 아니다.

일찍이 공자는 『상서』에서 천명을 받은 세 사람의 위인으로 우(禹)・직(稷)・고죽국의 백이(伯夷)를 들면서, 고죽국 백이의 업적으로 「법령을 제정하여 백성을 형벌로부터 막았음」(伯夷降典 折民惟刑)을 들었다.

이것이 고조선 후국이었던 고죽국의 법전이었으며, ‘범금8조’였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고조선 후국 고죽국의 ‘범금8조’는 본국인 발조선의 ‘범금8조’등 율령을 고죽국 현실에 적용했던 것이라고 해석된다.

고죽국에 망명한 일도 없었고, 고죽국 군주가 된 일도 없었던 기자가 당시 商・周에도 없던 ‘범금8조’를 조선에 제정해서 실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위 ‘기자조선설’의 허구를 날조한 사람들이 고조선의 ‘범금8조’를 기자의 업적으로 견강부회하여 날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7) 『한서』, 『삼국지』, 『후한서』 등에서 기자가 동래하여 조선왕이 되어 백성들에게 농경과 양잠을 처음 가르쳐 주었다는 기록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고조선은 농경과 양잠 등 고대농업이 당시로서는 이미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였다.

중국 고대학자들도 고조선의 이주민들인 중국 동해안의 이른바 ‘동이족’들이 선진 농경과 밀・보리 등의 새 농경 종자와 더질긴 비단을 도입해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고조선에 온 일도 없는 기자가 미개한 조선인들에게 처음으로 농경과 양잠을 가르쳐주었다는 ‘기자조선설’의 주장은 황당무계한 허구이다.


(8) 기자시대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보면 기자의 나라 商(殷)은 처음 고조선 이주민 계통이 주도해 건국한 나라로서 말기에는 지금의 안양(安陽, 殷墟)에 천도하여 높은 청동기 문화를 창조한 중규모의 나라였다.

이에 비해 당시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요동 요서에 다수의 후국들을 거느린 상대적으로 商보다 더 강대한 고대국가였다.

周가 상왕조를 멸망시킨 초기에는 수도 및 근기지역과 정권만 교체 장악했지, 商의 융성기에도 미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태의 周 무왕이 기자를 세력권 훨씬 밖에 있는 조선의 후왕에 봉하고, 기자가 통칭 8,000리나 떨어져 있는 조선에 와서 조선왕이 되었다는 주장은 황당무계한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9) BC 11세기 이후 BC 3세기 말까지 어떠한 중국 고문헌에도 ‘기자동래설’ ‘기자조선후분봉설’ ‘기자조선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약 1,000여년이 지난 후에 ‘기자조선설’이 BC 2세기~BC 1세기 이후 갑자기 나타난 이유 및 동기의 해석과 설명에는 반드시 지식사회학적 해석과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한(漢)에서 고조선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은 한의 문제(文帝, 재위 BC 179~BC 157) 때부터이다. 이때는 고조선 침략에 대한 기도는 있었으나, 기병대의 무력이 부족하였고 연이은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농민병들의 군심이 흩어져서 실행에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의 무제(武帝, 재위 BC 140~BC 87)는 군사력 준비가 갖추어지자 BC 121년 약 14만 명의 기병으로 만리장성 이남에까지 들어와 있는 흉노를 공격해서 만리장성 너머로 쫓아내어 만리장성 계선을 확실하게 확보하였다.

무제는 군비를 더욱 강화하여 영토를 확장하려고 BC 111년에는 남쪽으로 동월(東越, 지금의 절강성 일대)과 남월(南越, 지금의 복건성 일대)의 월족을 공격하여 정복하고 9군(郡)을 설치하였다. 무제는 영토확장을 위해 이어서 이듬해 BC 110년 기병 및 보병 약 18만과 수군 등 약 2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고조선 침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난제가 많았다. 연이은 전쟁에 지친 농민층과 농민병들이 만리장성을 넘어서면서까지 침략전쟁을 감행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고, 지배층 내에서도 고조선의 문화와 정치 및 평화적 외교를 높이 평가하면서 무제의 고조선 침략에 회의적인 정치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제에게 암살당한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과 그 빈객 지식인집단이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였다. 이에 무제의 고조선 침략에 대해서는 그 군사활동을 정당화하여 침략을 고취하는 정신적 추동력과 정당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었다고 추론된다. 이 필요에 부응하여 안출해낸 것이 복승(伏勝)과 그의 제자집단의 『상서대전(尙書大傳)』의 ‘기자조선설’이고,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자조선설’이라고 본다.


(10) 고대와 중세의 사학에는 아직 객관적 실증주의가 확립되지 않았으며, 특히 고대 중국에서 역사는 군왕의 통치의 거울과 정당화의 도구로 간주되었다. 한의 문제와 무제가 고조선침략을 준비하고 기도하자, 어용사가 복승과 그의 집단은 군왕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周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하여 기자가 조선왕으로서 무왕을 배알한 것으로 ‘기자조선설’을 맨 처음 날조하였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를 이어받아 “무왕이 기자를 방문하여 통치원리를 묻자 기자가 홍범 9주의 원리를 강론해 주었고,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으나 신하의 예를 취하지 않았으며, 그후 조선왕이 되어 무왕에게 입조하는 길에 옛 은허(殷墟)를 지나다가 슬퍼서 눈물지으며 맥수가를 지어 노래불렀다”는 요지의 보충 분식을 하였다.

사마천의 붓은 자기의 군주인 무제를 위해서 허구도 사실처럼 기록한 것이었고, 그 진실 여부는 검증하지 않았다. 사마천의 역사서술도 군주를 위한 어용의 역사서술인 것은 복승과 다름이 없었다.


지식사회학적으로는 복승과 사마천이 만든 ‘기자동래설’ ‘기자조선후분봉설’ ‘기자조선설’은 역사 사실에서 도출된 설명 기록이 아니라, 역사 사실과는 전혀 관계없이, 한의 문제와 무제의 고조선침략정책을 정당화하고 고취하기 위한 허구의 이데올로기로 정립된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11) 한 무제는 BC 108년 고조선(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위만조선 직령지에 4郡을 설치했으나, 고조선 주민과 고조선 후국세력의 격렬한 저항과 반격을 받아서, 4군의 일부를 폐지하고 위치를 옮기는 등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였다. 이에 고조선이 원래 중국의 ‘기자’가 동래하여 세워서 선정을 베푼 나라라는 주장의 ‘기자조선설’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계속되었다.


이에 후한의 반고(班固)는 『한서(漢書)』에서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조선왕이 되어 예의와 농경과 양잠을 가르쳐 주었다”는 요지의 허구를 첨가했고, 진수(陳壽)의 『삼국지』도 이를 따랐다.


이어서 범엽(范曄)의 『후한서』는 여기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범금8조’의 율령을 제정하여 가르쳤다고 또 다시 추가하였다. 그후 중국의 고대・중세 역사서들은 “기자가 조선에 갈 때 5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갔다”는 둥 계속 허구를 첨가하여 ‘기자조선설’이 부풀려졌다.


뿐만 아니라 한4군 통치기간에 한문자가 민중 사이에도 들어오기 시작하고 ‘기자조선설’이 교육을 통해 상층에 체계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자, 고조선 유민이나 고구려 사람들 가운데는 극소수이지만 ‘기자조선설’ ‘기자’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사회학적 실증주의와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검증해 볼 때, ‘기자동래설’ ‘기자조선후 분봉설’ ‘기자조선설’은 허구이며, 그것은 전혀 역사적 진실이 아니다.


‘기자조선설’은 한(漢)의 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전후 시기에 한 무제의 고조선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어용사가들이 안출해낸 허구의 침략 이데올로기였다.


그것은 마치 일본 군국주의가 19세기 후반 한국을 침략할 때 어용사가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허구를 날조해 낸 것과 동일유형의 허구의 침략 이데올로기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기자조선설’의 본질을 철저히 비판하지 않으면, 소위 ‘기자조선설’의 허구가 한국역사에 대하여 언제나 침략이데올로기로서 악용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제어 : 箕子東來說, 箕子朝鮮侯分封說, 箕子墓, 한무제의 고조선 침공, 지식사회학적 검증


(출처)
http://blog.daum.net/yhshin37/20

.
   
이름아이콘 한빛
2020-10-22 10:03
단군조선 아리랑 (노래)

http://www.hanbitkorea.com/md/dan2.asx

.
   
 
  0
3500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64 기자조선설의 사회학적 검증과 ‘범금8조’의 실체 [2] 한 빛 2020-10-21 138
63 일본(왜)은 백제의 분국이었다! [8] 한 빛 2020-06-12 736
62 금(金).청(淸)나라 시조는 신라인 한 빛 2016-07-28 2432
61 일본! 국제사회에 대마도가 우리영토임을 공인하였다! [1] 한 빛 2011-01-07 5769
60 일본 내 혐한류(嫌韓流)의 성격과 함의 [3] 한 빛 2010-07-22 14763
59 한국-몽골 국가연합론.. [1] 한 빛 2007-09-17 12549
58 간도는 우리땅... 청나라 문서 발견 한 빛 2007-08-07 13276
57 혁명가 김산과 나운규의 부활을 꿈꾸며.. 한 빛 2006-09-13 11503
56 혁명 후의 러시아 레닌그라드 캄차트카에서.. 한 빛 2006-06-14 17407
55 "한국정치의 보수와 진보"에 대한 재론 [17] 한 빛 2006-01-18 9375
54 북한인권 침해의 구조적 실태에 대한 연구- 정치범수용소를 중심.. 한 빛 2005-09-16 14097
53 친일인명사전 명단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한 빛 2005-09-01 6765
52 혁명가 김산 (KBS스페셜)-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한 빛 2005-08-02 6633
51 대마도 반환의 첫 걸음!~ (동영상) [1] 한 빛 2005-04-01 10317
50 개혁 덫에 걸린 한국 경제인가? 한 빛 2004-12-05 12216
49 중국의 동북공정과 간도 영유권문제 한 빛 2004-08-11 13067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