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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자료실

작성자 한 빛
작성일 2004-02-21 (토) 17:30
ㆍ추천: 0  ㆍ조회: 9913      
조선 역사가 남북한에 미친 영향


최성재


조선 역사가 남북한에 미친 영향



* 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미

* 조선 왕조 500년은 너무 길었다
* 군사의 중요성을 모른 나라, 조선

* 조선이 남북한에게 미친 영향1, 군사
* 조선이 남북한에게 미친 영향2, 공업화

* 조선이 남북한에게 미친 영향3, 상업화: 남북한의 결정적 차이
* 조선이 남북한에게 미친 영향4, 명분 사회

* 조선이 남북한에게 미친 영향5, 농지 개혁
* 희망 사항



[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미]

조선은 왕권의 약화와 귀족의 국가 재산 사유화, 외적의 침략 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고려를 대신하여 들어선 새 왕조이다. 아직도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지만, 세계 어떤 나라 역사를 보아도 고려만한 크기의 나라로 약 500년간 장기간 왕조를 유지한 예는 아주 드물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는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본다. 또한 그것은 근대 이전의 세계 정치사상 유례가 드문 평화적 왕조교체였다(한영우-조성왕조의 정치·경제기반).

어찌 보면 왕조가 한 번 세워지면 지배자 이데올로기인 정통성 문제로 인해, 장구한 기간 동안 아무리 모순이 많이 생겨도 전혀 개선되지 않고 왕조가 면면히 이어진 것이 우리 역사의 침체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이 부국강병이 아니라 빈국약병(貧國弱兵)의 나라가 되어 국민들만 고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들어선 새 왕조는 대개 100년 정도는 원기 왕성하다. 소박하고 건실하고 희망차다.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모두 조화롭게 발전한다. 견제 세력, 이전 왕조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늘 염두에 두기 때문에 권력을 정적에 대해서는 몰라도 국민을 대상으로 하여서는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비판 세력, 견제 세력을 모두 제거한 다음부터는 긴장이 급속도로 이완되면서, 정권 피로증이 급속히 몰려온다. 서민은 소외되고 새로운 귀족층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여 퇴폐적인 문화를 발전시킨다. 예술은 아름답지만 현실과 유리되어 탐미적으로 바뀐다.
그래서 한 100년마다, 또는 역사적 현실로서 200년마다 왕조가 바뀌는 게 좋다는 설이 역사가 사이에선 유력하다.


[조선 왕조 500년은 너무 길었다]


조선은 너무 오래 계속된 왕조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새로운 왕조가 태어날 절호의 기회였는데, 왕조 이데올로기에 너무도 충실한 성리학이 모든 양반의 의식, 무의식 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놓쳐 버렸다. 왕조를 바꿀 수 있는 실질적 힘은 중앙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군사 집단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조선 초의 사병 혁파로 상상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임진란이 호기였으나 전란 중에도 권력은 철저히 임금과 문관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신라말이나 고려말과는 전혀 달리 장군들은 그저 뼈가 가루가 되도록 머슴처럼 말 그대로 죽자고 일(전쟁)이나 했던 것이다. 언감생심 새 왕조를 개창할 것은 생각도 못했다. 이런 제도적인 면만이 아니라, 실지로 무관들도 성리학에 절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식만이 아니라 무의식이 문관들에게 저당 잡힌 것이다. 국가와 민족보다는 왕조에의 충성을 아득히 높이 산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도망만 다닌 양반(좁은 의미, 문신)들이 왜적과 열심히 싸운 장군과 의병장들을 하나하나 제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군의 역할을 애써 축소시키고 명군의 역할을 엄청 과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점은 파당을 초월해 일치 단결해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일이다. 혹시라도 어느 '미친 놈'이 전쟁의 책임을 물어 칼로 위협을 가하면 하루아침에 문신의 200년 태평천하는 끝난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던 것이다.

오죽 했으면 실질적으로 임진왜란을 혼자 막다시피한 충무공에게 선무1등공신이란 명예를 전사한 지 6년 후에나 내렸을까? 아울러 아무 공이 없었을 뿐 아니라, 가물가물 왜적의 돛대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혼비백산하여 전라좌수영보다 두 배나 많았던 전선과 군사를 스스로 물에 가라앉히고 직권으로 영구 휴가 보내고, 달랑 전선 3척만 끌고 전라도 해안으로 도망쳐서 충무공 뒤를 졸졸 따라다닌 원균을, 마침내 충무공을 내쫓고는 충무공이 고심참담하게 키워 둔 그 당시 세계제일의 수군 3만 여명, 대소 전선 300 여척을 '큰 소리 뻥뻥 치더니' 하루 밤새 전패시킨 패장의 패장 원균을 단 한 번도 죄를 묻지 않고 충무공, 권율과 똑같이 선무1등공신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완전 물타기 작전이었고 철저한 희화화 작전이었다.

원균은 바로 임금인 선조와 당쟁만 일삼던 대부분의 문관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는 뇌물을 부지런히 안긴 윤두수와 집안이었고 윤두수는 또 선조와는 사돈지간이어서 선조는 틈만 있으면 원균을 극력 감싸고 돌았다. 바로 이것이다. 임금과 사적으로 가까우면 전쟁을 아무리 그르쳐도 전쟁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하들이 처음에는 일말의 양심이 살아서 원균을 선무2등공신이라고 상신했으나 선조의 뜻이 워낙 완강하여 선무1등공신으로 고쳐서 임금의 재가를 얻은 것이다. 이처럼 국가 권력의 사유화는 인구의 3분의 1을 잃는 전쟁을 겪고도 약화되기는커녕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 폐해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권력의 사유화는 그 맥이 잘 이어져서 북한에 가서 만개하고 있다. 거기서는 김일성 부자와의 개인적 친소관계가 곧 권력의 크기이다. 해방 이후 엄격한 자격 기준에 의해서 지금까지 발급된 당원증은 4백만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당원이 된다고 곧 신세가 확 펴지지도 않는다. 4백만이 갈라 먹을 것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실지로는 김일성 부자와 가까운 2만 명이 핵심이다. 당 위에 당이 있고, 정부 위에 정부가 있고, 군대 위에 군대가 있다.

겉으로 드러난 국가 공식 기구의 얼굴 뒤에 실세는 따로 있는 것이다. 이 2만 명에 들어가기만 하면, 대학생도 어제만 해도 선생님으로 깍듯이 모시던 교수한테 인사도 않는다. 오히려 교수가 그냥 지나가면 불러다가 인사 안 한다고 나무란다. 무역일꾼이어서 달러를 만지게 된 그 조카 강명도(한국에 귀순)가 강성산 총리를 평양의 고급 음식점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한다. 난생 처음 가 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총리까지 올라간 그도 실세 2만 명에 끼이지 못했던 것이다.

황장엽이라고 하면 김일성 대학 총장에 최고인민회의회장(국회의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도 이 2만 명에 끼이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황해도에 사는 누이를 그렇게 그리워하면서도 50년 동안 한 번도 못 만났던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거지도 만나고 싶으면 가족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황장엽마저 2만 명의 핵심 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같은 나라에 사는 친누이도 못 만난 것이다. 이러하건만 자유로운 남북이산가족상봉? 북한이 민주화되거나 무너지지 않는 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북한이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신파조로 항상 우렁차게 외치는 것은 언제나 평등이요, 평화요, 민주요, 주체요, 자주이다. 요샌 그 속셈이 뻔하지만 난데없이 민족까지 외친다.

한국은 어떤가? 조직 생활을 해 본 적도 없고 하다 못해 군수나 중소기업 사장 정도의 직위를 갖고 조직을 체계적으로 운영해 본 적도 없는 민주화 세력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오히려 권력의 사유화가 더욱 심해져서 대통령, 대법원장, 국회의장, 장관, 차관이라는 공식적인 국가 조직보다는 대통령 및 실세들과 사적으로 얼마나 가까운가, 사석에서 '형님, 동상, 자네, 아무개야' 소리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권력의 크기가 정해지고, 정부의 각종 중요한 정책마저 이들 실세들의 비공식적인 회합에서 소곤소곤 주고받은 밀담에 의해 결정되어 마른하늘에 벼락치듯 거창하게 개혁이란 명패를 달고 전격적으로 단행된다. 하나회니, 상도동계니, 민주산악회니, 동교동계니, 아태재단이니, 청운동계니, 창사랑이니, 노사모니 -- 저들이 떠받드는 '어른'은 농담으로라도 단 한 마디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결사옹위하지만, 그 정적에겐 지옥에서 쓰는 말을 노아의 홍수처럼 퍼붓는 이런 사조직이야말로 바로 조선처럼 대한민국을 망치는 온상이다.

조선시대에 임금과 고관대작이 언제나 삼강오륜이란 거룩한 말씀을 앞세웠듯이 이들도 늘 명분은 말만 들어도 황홀한 민주주의요,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개혁이다. 오늘날도 권력의 사유화로 인한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원균에게 이순신과 같은 상을 내린 것은 바로 무능한 임금과 가증스러운 문관(훌륭한 몇몇 분은 제외하고)에게 책임을 전혀 묻지 않고 스스로 그만한 일을 했다고 바로 자신들에게 상을 주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에서 교훈을 얻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백성은 여전히 안중에도 없고 교활하게도 왜적을 비난하고 망조가 단단히 든 명을 떠오르는 신흥 대국 청 대신 하늘같이 떠 받쳐 백성의 눈을 딴 데로 돌리게 하고는, 크든 작든 권력을 뺐고 뺐기는 데에 제갈공명보다 더한 지략을 썼던 것이다. 백성들을 철저히 기만한 것이다. 기록이 곧 역사라고 굳게 믿고 원균을 선무1등공신이라고 당당히 실록에 기록함으로써 어리석은 후세 사람들까지 기만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역사왜곡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선무1등공신이라고 하니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실은 최우수상 호성(扈聖)1등공신 2명, 특상 호성2등공신 31명, 우수상 호성3등공신 53명 도합 86명의 문관이 큰 상은 다 차지한 후에 특별히 내려 준 특별공로상에 지나지 않는 87등급의 상훈이었다.

호성공신이란 게 별거 아니었다. 멀리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이 패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맞서 싸울 생각은 꿈에도 않고 앞에는 거대한 한강을 마주하고 뒤로는 험준한 북한산을 두른 난공불락의 요새인 한양을 대뜸 버리고 백성들한테 돌팔매질을 당하면서 허겁지겁 한밤중에 비를 맞으며 도망가는 임금을 끝내 버리지 않고 '망극하여이다'를 연발하며 의주까지 졸졸 따라갔다는 게 갸륵하다는 것이었다. 임란 때의 호성공신은 조선초로 말하면 개국공신과 같은 반열이었다. 공신도 예사 공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껏 한 일이라곤 임금 곁에서 훌쩍훌쩍 운 일밖에 없는 인간들을 그렇게 높이 들어올린 것이다. 임금과 얼마나 가까운가, 그것이 최고의 잣대였다. 임금에게 말하는 강아지가 있었다면 능히 영의정에 봉해졌을 것이다.

그럼 그들과 비교해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비교해 보자. 충무공은 너무 신화화되어 민족의 성웅으로 떠받들려지지만, 실지로 그분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노산 이은상처럼 감탄만 연발하거나 객관적인 입장에 서서 공평하게 말한다면서 이순신 영웅 만들기에 원균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지식인 사이에 의외로 많고 의병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역사학계에 두드러지고 있어서 더욱더 충무공이 얼마나 대단했던 분임을 모르고 있다.

이순신과 원균을 어떻게 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나라 역사가 전혀 달라진다는 생각에서 간단히 재조명하고자 한다.

충무공이 1591년 2월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여 전라좌수사가 되었을 때 이미 47세였다. 전라좌수영(5관5포)은 이웃한 경상우수영(8관16포), 전라우수영(15관12포)보다 관할지역이 각각 두세 배나 적어서 전선(戰船)과 군사도 각각 두세 배 적었다. 휘하에 전라좌수사보다 약 세 배나 많은 고을(官은 오늘날의 郡에 해당)을 거느렸던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당시에 겨우 31세였다. 혁혁한 공을 세워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원균이 자신이 이순신보다 선배라며 배아파했는데, 우린 잠시 눈을 돌려 이억기(선무2등공신)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순신 장군은 32세에 겨우 무과에 급제했을 뿐인데, 그보다도 한 살 어린 나이에 이미 이억기는 47세에 벼락출세(?)한 이순신보다 격이 훨씬 높은 해군제독이었던 것이다. 배아파하려거든 애송이(?) 이억기를 보고 배아파해야 했던 것이다.

원균도 영웅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또한 이억기를 조금이라도 주목하고 그런 말을 해야 한다. 그의 공은 이순신 장군에게야 까마득히 못 미치지만, 원균보다는 그 공이 열 배가 넘었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은 본 척 만 척하고 오로지 중앙에 줄이 단단해서 아무 공이 없는 그가 마치 이순신 장군과 라이벌의 관계나 되었던 듯이, 일방적인 주장과 두둔이 실려 있는 조선실록의 어느 한 쪽 면만 보고 그를 높이는 사람들은 옛날의 그 지겨웠던 당쟁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분투노력하는 사람이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면 너무 순진한 사람이거나. 공부를 전혀 안한 사람이거나.

충무공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지만, 출세는 늦어도 너무 늦었던 것이다. 먼 친척인 이조판서 율곡 이이가 한 번 보자고 해도 그가 인사를 담당한 자리에 있는 한 그럴 수 없다고 얼굴 한 번 안 내비친
강직한 분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이순신은 이미 젊었을 때부터 대장군의 그릇이었지만, 당시 시류와는 전혀 달리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했기 때문에
사방에 시기하는 자는 가득했지만 그를 공평히 평가해 주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순신 장군은 수전에서의 전승과는 달리 육전에서는 두만강 유역에서 한 번 패전한 걸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때도 일차 백의종군한 적이 있다. 이를 보고 그가 이 젊은 날의 패전을 교훈으로 삼아 크게 성공한 줄 하는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 때도 모함에 의한 것이었다.

함경북병사(여진족의 침략이 잦았던 함경도에는 병사가 두 명) 이일한테 여러 번 추가로 병력을 배치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그가 끝내 묵살하였기 때문에 이순신이 조산 만호로 관아에 있는 사이 여진족이 추수하는 틈을 타 병력이 태부족한 녹둔도에 급습하여 분탕질을 친 것이다. 이순신은 소식을 듣자마자 바람같이 달려가 매복 작전으로 오히려 적을 크게 무찌르고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을 60명이나 구해 왔다. 당신도 허벅지에 큰 화살을 맞았다. 그러나 이미 녹둔도에서 많은 아군이 죽었고 미리 도망간 적들에 의해 끌려간 백성들은 구해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이일은 자신이 다칠 것을 염려하여 이순신을 꽁꽁 묶고 득달같이 죄를 추궁하면서 당장 죽이려고 들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태연자약했다. 여러 번 병력 추가배치를 요청한 공문사본을 다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일은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교묘하게 모함하여 이순신을 백의종군하게 만든 것이다. 장군(이일)과 장교(이순신)의 위치가 뒤바뀐 것이다. 이미 그 때에 이순신은 대장군의 그릇이었던 것이다. 이 이일이 누군가? 신립에 앞서 상주로 급파되어 나라의 운명을 한 어깨에 짊어졌다가 그 무거운 힘에 짓눌려 충주로 허겁지겁 퇴각한 자다.

이순신 장군이 31세의 새파란 젊은이가 차지한 전라우수영 세(勢)의 반도 안 되는 전라좌수영에 47세라는 늦은 나이에 어쨌거나, 인물을 알아본 유성룡의 도움으로 파격적으로 발탁은 되었지만, 시간이 너무 없었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1년 2개월의 준비기간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전에 가장 높았던 지위가 정읍현감이었던 사람이, 불과 1년 2개월만에 그나마 수군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을 것 같았던 사람(10여년 전인 1580년부터 1년 6개월 동안 전라도 발포 만호로 근무한 것밖에 없었음)이 세계최강의 수군을 만든 것이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문란한 기강.
둘째는 전무한 중앙의 지원.
모든 것을 혼자서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수군은 같은 병사 중에서도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종이나 노복이 많았다. 수군 생활이 육군 생활보다 훨씬 힘들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사기도 엉망이었고 기강도 형편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불과 몇 개월만에 솔선수범과 신상필벌로 병사들의 눈이 겨울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발걸음이 봄날의 새털처럼 가볍게 만든 것이다.

또한 심각한 문제가 전선의 보수와 건조, 화살과 대포 및 화약의 확충, 군량의 확보였다. 조정에서는 이것들을 당연히 제공해야 했지만, 되레 방해만 했다. 식량을 수시로 징발해 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전란 중에도 계속되어 수시로 육군에서 해안의 병사를 징발해 가고, 조정에서 식량을 바리바리 싣고 갔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충무공은 열 번도 더 간곡하고 애절한 장계를 올렸지만, 조정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라. 오늘날 전방 사단장에게 총과 대포를 스스로 만들고 탱크도 스스로 만들고 군량도 대주기는커녕 정부에서 수시로 빼앗아가며 어디서 구하든 군량을 스스로 해결하라고 내버려둔다고 해 보자. 당장 촛불 대신 총을 들고 광화문으로 달려갈 것이다.

이런 악조건에서 오늘날로 말하면 조선소도 세우고 방위산업체도 일으키고 국방과학기술연구소도 건립하고 농사도 짓고 염전도 만들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불과 1년 2개월만에 수군 경험이라곤 10여년 전에 1년6개월의 경험밖에 없던 사람이 홀로 이뤄낸 것이다! 또한 이런 와중에 전설로만 전해 오던 거북선도, 오늘날로 말하면 이지스함이나 항공모함에 해당하는 거북선도 건조한 것이다!

불과 1년 2개월의 준비로, 그 백 배인 120년간 실전 경험을 쌓고 쌓고 또 쌓아 바람같이 날래고 천둥같이 무섭고 해일같이 걷잡을 수 없는 왜의 수군을 맞아, 야구로 말하면 항상 퍼펙트승 아니면 완봉승을 거뒀던 것이다. 7년 전쟁 동안 충무공은 실수로 자초된 한 척 외에는 단 한 척도 전선을 잃지 않고 적의 대소 전선은 무려 935척을 깨뜨렸던 것이다(최석남--구국의 명장 이순신). 그 필승의 전략전술은 졸고: '백전백승의 충무공 이순신의 비결'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런 분을 도리어 왕의 칙명으로 쥐 잡듯이 잡아가서 개 패듯 패는 사이에 원균은 단 하룻밤만에 적의 전선은 한 척도 못 깨뜨리고 300척을 거제도 앞 바다에 고스란히 가라앉힌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혹시 거기에 거북선의 잔해가 있을까, 수시로 뒤져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도 원균이 충무공과 똑같이 선무1등공신이 된 것이다!

공사(公私)가 추상같았던 충무공은 공사가 춘풍 이불 속의 이팔청춘 같았던 원균과 그의 영원한 후원자 선조 및 대부분의 대소 관료들에게는, 특히 공이 없는 자들에게는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백성들과 휘하 병사들, 한 번이라도 충무공을 만난 사람들은 그 큰그릇에 절로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없는 곳에서도 존칭을 쓰지 않고는 함부로 말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충무공의 유일한 후원자 유성룡과 반대편에 섰던 이원익, 이항복, 기자헌, 정탁, 권율 등은 마음속으로는 열렬히 겉으로는 눈치껏 충무공을 변호했지만, 충무공은 임금과 공적인 벼리 외에는 사적인 끈이 털끝만큼도 없었던지라, 만인지상이 일방적으로 원균을 싸고돌았던지라 400년 전에 나라를 왜적(倭賊)과 명구(明寇)의 식민지로 헌납할 뻔했던 것이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장살(杖殺)되고도 남을 만큼,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이나 심하게 맞았던 것이다.

백의종군했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공에게는 원균의 참패를 보고 돛아 나 살려라, 줄행랑친 배설이 남긴 12척의 전선밖에 없었다.
이 때 당시 왜적의 대소 전선은 무려 1,000척!
거기에 이 당시 우리의 판옥선은 일본보다 커서 한 척에 150명 내지 200명이 탔으므로 군사가 최소한 2,000명이 필요했지만, 남은 군사가 겨우 100여명!
전선 한 척도 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아니라 오늘날로 말하면 실지로는 이순신 장군은 해군 중위만도 못했었다. 물론 군량도 없었고 무기도 없었다. 뿐이랴, 원균의 참패로 곡창인 호남까지 적의 수중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왜적은 다시 한양 근처 수원까지 무인지경으로 치고 올라갔다. 구원군이라는 명군은 더 이상 전쟁할 의사가 없었다. 명군은 노골적으로 점령군 행세를 했고 임금 이하 조정 대신들은 가슴만 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상황 끝!
수군 폐지론이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이 때 나온 충무공의 저 유명한 말! --신에게 아직 전선 열두 척이 남아 있음에 ... 왜적들이 함부로 까불지 못할 것입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 則賊不敢侮我矣)!

이 말과 더불어 전혀 당황하지 않고, 불과 1년 2개월의 준비로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 우리 수군을 이끌고 가서, 장장 120년에 걸친 실전으로 황룡처럼 고개를 쭉 빼고 쏜 살같이 적선이 날아오던 때보다 더한 역경을,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고작 한 달 동안 준비해서 바야흐로 나라가 북은 명의 발에 남은 왜의 발에 짓밟히기 직전에 처한 상황을, 일거에 뒤집는 저 기적 같은 명량대첩을 이끈 것이다.

충무공은 한 시도 지체하지 않고 무모하게도 이미 적의 소굴이 된 호남으로 들어간다. 적이 놓칠 리 없다. 졸졸 따라다닌다. 누구도 충무공의 무모한 행동을 이해 못했다. 백성들이 난리가 났다. 난리를 피해 도망가다가 너도나도 달려와 매달렸던 것이다. 보리쌀 한 되 갖고 피난 가던 할머니는 반 되를 뚝 떼 주고 쌀 한 말 지고 가던 할아버지는 쌀 반 말을 덜어 주었다. 충무공은 그 때마다 말에서 내려 아무 말 않고 그들의 손을 꼭 잡고 굵은 눈물을 흘렸다. 도망가던 청년들은 이순신 장군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며 따라나섰다.
바로 이것이었다!
왜적의 눈을 속이고 호남 지방을 빙빙 돌며 한 달 간 군량과 군사를 모았던 것이다! 전선은 내버려두고! 만약 이 때 적이 빈 전선을 불태웠으면 그것으로 천하의 이순신도 별 수 없었다. 나중에 몰래 전선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단언한다--만약 이렇게 하여 충무공이 명량에서 대첩하지 못했으면, 한강 내지 임진강 이남은 일본, 그 이북은 명이 삼켰다고!
그러하건만 충무공에게 돌아온 상은 명의 경리 양호가 내린 고작 은20냥! 충무공을 모함하기 위해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역정보를 갖다 바친 간첩 요시라에게 내린 상은 왕이 친히 하사한 은80냥!
오죽했으면 명의 경리 양호가, 왕의 체통도 다 버리고 기껏 식량 약탈 부대 500여명 중에서 겨우 31명을 죽인 직산전투(현 국사 책에도 이 전투를 너무도 엉터리로 기술하고 있음)에 이겼다고 고맙다며 직접 찾아와 큰절을 올리려는 선조에게 자기는 전혀 한 일이 없다며 극구 사양하면서, 며칠 전에 있었던 기적적인 명량대첩의 주인공에게 제발 큰상을 내리시라고 간청했을까. 선조는 그러자 발끈 하면서
--그 자가 한 일은 사소하다.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상을 주고 안 주고는 내 소관이다.
라면서, 끝내 상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충무공이 물 맑은 거제도 해안에서 잡은 황금빛깔 멸치 한 포대라도 아무 말 않고 은밀히 왕에게 갖다 바쳤으면, 목포 앞 바다에서 큰 홍어 한 마리라도 잡아서 은근히 왕에게 진상했으면, 만인지상은 그에게 호남 지방을 하나 뚝 떼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임금이 공사 구별을 그렇게도 못했던 것이다. 그건 임금만이 아니었다. 당시 풍토가 누가 누구랄 것 없이 그랬던 것이다. 문화였다.

그 부끄러운 문화를 바꾸어야 할 시점에 그 문화가 너무도 공고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은 망하고, 공은 거꾸로 세우고도 뇌물을 바치고 아첨을 선물하고 연줄을 잡고 늘어졌던 사람들은 흥했던 것이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거의 누구나 그랬던 것이다. 사(私)를 위해서 공(公)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랬으니, 충무공은 아무리 공을 세워도 아니 공을 세우면 세울수록 미운 털이 더 단단히 박혔고 원균은 아무리 공이 없어도 아니 나라를 백척간두에 세워도 고운 벼슬이 머리 위로 쏙쏙 솟아났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오면 권력의 사유화가 더욱 극심해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하나만 예를 들어 보자.
1895년 한성부의 1년 예산이 5,416원이었는데,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윤의 녹봉이 무려 2,000원이었다. 한양의 1년 예산의 약 반이 그 우두머리 한 사람에게 지급되었던 것이다! 국가라는 것이 완전히 개인과 가문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 권력과 국가 부의 사유화가 이 정도로 심해진 것이다.

실은 이와 비슷한 체제가 현존하고 있다면 믿겠는가. 그 곳은 바로 북한이다. 북한 전체가 김씨 가문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국가 위에 한 가문이 있고 그 가문 위에 한 개인 곧 비둘기 집같이 포근한 가정에서는 너무도 자상하고 너그럽고 따뜻한 가장이 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임진왜란이 끝난 지 6년이 지나(1604년) 왕과 문신들이 조직적으로 파당을 초월하여 자신들에게 전쟁 책임론을 들이댈까 봐, 혹여 전쟁 영웅들이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거나 정권을 쇄신할까 봐, 전쟁 영웅들을 잔인하게 '물 먹였던' 것이다. 그렇지는 못해도 그들이 요직을 다 차지할까 봐 미리미리 수를 쓴 것이다. 나라 지키는 데는 아마추어의 아마추어였지만, 권력 투쟁에는 다들 프로의 프로였다.

미증유의 전쟁을 겪고 나서도 조선은 그런 식으로 군사를 업신여기고 국가 권력의 사유화에 총력을 기울이다가 금방 병자호란을 겪게 된다. 결국 왕이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치욕을 당한다. 그 후에 동양에 세 국가가 솥발처럼 안정되어, 어쨌건 우리 역사상 전혀 유례없는 평화를 누리게 된다. 1636년에서 1866년(병인양요)까지 무려 230년 동안 외적의 침입이 단 한 차례도 없는, 전세계 역사를 통틀어 희귀할 정도로 기나긴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된다.


[군사의 중요성을 모른 나라, 조선]


국가가 국가의 구실을 하려면 군대는 필수적이다. 군대가 없이는 주권은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은 후기에 접어들면서 사실상 군대가 없는 나라였다. 명성황후가 일본의 칼잡이에게 살해된 1895년의 을미사변과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1896년의 아관파천이 이를 너무도 잘 설명해 준다. 최소한의 군대만 있어도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조선은 사실상 부족국가도 아닌 씨족사회로 돌아간 거나 진배없었다.

한말에는 나라가 나라가 아닌 것이, 고을에 원님이 임명되면 득달같이 내려와 백성의 고혈을 짜서 한양으로 싣고 올라가서 골고루 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동헌에 사또가 없었던 것이다. 벼슬하는 자들이 대부분 한양에 살았다. 당연히 아전들은 관아에 나와서 잡담이나 하고 화투나 치고 낮잠이나 잤다. 심지어 관아에 벼루과 먹과 붓이 한 습밖에 없었다. 오늘날 군청에서 볼펜 한 자루로 모든 사무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이규태). 이 당시 조선은 그냥 동네끼리 계와 향약과 두레와 품앗이로 살았던 것이다. 벼슬은 거의 정해진 값이 있어서 벼슬을 팔고 사는 거래소까지 생겼다. 돈으로 벼슬을 꿰어차면 그 길로 백성을 후려쳐서 사돈의 팔촌까지 다 먹여 살렸다. 세종대왕의 그 찬란하던 조선이 영락하여 씨족 사회로 전락한 것이다. 가문(씨족)밖에는 중요한 게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씨족 사회이다. 국가의 버팀목인 군대가 엄정했을 리가 없다.

2천만 인구에서 사실상 3,000 명 정도의 군대밖에 없었다. 한말에 이르러 조선은 나라의 구실을 전혀 못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조선은 한말에 이르러 씨족사회로 전락했다.

율곡은 조선의 인구가 1천만 정도일 때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었다. 그보다 600년 전 947년 고려 정종2년에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창설한 광군(光軍)이 무려 30만이었다. 고려는 그렇게 준비를 단단히 했기 때문에 중국의 송으로부터 나라의 절반을 빼앗은 대제국 요
(중국의 또 다른 이름 카테이[Cathay]는 바로 이 거란의 중국식 발음이다.)와
대제국 금
(이들의 후손은 나중에 결국 청을 세워 중국 전체를 약 3백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했다. 중국인의 중화사상은 실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을
모조리 물리치고 강토를 한 뼘도 빼앗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땅을 빼앗았던 것이다(강동육주).

이런 역사를 되새겨보면 국방에 대해 조선이 얼마나 무심했으며 무지했나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말에 명맥만 남았던 군대도 당시의 무기 체제로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동학농민봉기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김윤식의 말대로, 일본군 열 명을 그 천 배인 조선군 만 명이 못 당할 정도였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대국들이 그 당시로서는 초현대식 무기를 가진 불과 50명, 100명의 군인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적이 있는데, 조선이 당시 그런 꼴이었다. 이순신, 을지문덕, 김유신이 한꺼번에 다시 태어나도 전혀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이 망한 결정적 계기는 약한 군대]


조선은 정말 허무하게 무너졌다. 전쟁 한 번 못하고 무너졌다. 동학혁명이라고 거창하게 말들 하지만, 한 때 20만명에 이르던 동학 농민군, 꿩이나 노루 잡는 포수의 총 몇 자루와 낫, 죽창, 몽둥이, 괭이, 호미, 지게작대기, 회초리, 부지깽이로 무장한 그들은 현대식 무기를 갖춘 일본군 겨우 100여명에게 우금치에서 참패를 하고는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지배자들은 가렴주구만 일삼고 거룩한 말씀만 했을 뿐, 나라는 안중에도 없었고 백성은 늙은 마누라 눈가의 눈곱만큼도 생각 않다가 나라가 그렇게 참담하게 무너졌던 것이다.

삼국통일 이후 이민족이 아닌 중국 한족은 단 한 차례도 한반도를 침략할 엄두도 못 내게 할 정도로 대단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후손이, 세계최대 강대국 중국에게 무수히 망신을 주었던 부국강병의 고구려 신라 백제의 후손이 어찌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을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현실에 배달족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무 것도 없는 주제에 한민족만큼 언제 어디서나 끈질기게 독립투쟁을 한 나라가 없다. 노예로 팔려간 하와이와 멕시코에서도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항상 우리보다 못하다고 깔보았던 왜놈에게 샅바도 못 잡아 보고 나라가 내동댕이쳐졌다는 것이 한민족은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날 정도로 믿을 수 없었던 탓이리라. 세상에 친일 세력마저 뒤로는 독립 자금을 대 준 민족이 한민족이다.

전세계가 일본을 두려워해도 한민족만은 일본을 우습게 생각한다. 이걸 단지 만용이라고 무지의 소치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산업화 이전에는 그들에게 2,000년 동안 앞섰다는 자존심의 발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100년간 지배한 적이 있는 몽골이 겨우 인구 3백만에 산업시설이랄 게 거의 없어 아직도 초원에서 말 타고 소와 양을 키우는 상황에서도 유일 초강대국 미국마저 두려워하는 중국을 기생오라비 보듯 우습게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이 남북한에게 미친 영향1, 군사]


현실은 현실이다.
조선의 역사가 남북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첫째, 단연 군사다.

나라를 빼앗긴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군대가 약해서 아니 아예 없어서였다. 이를 남북한 모두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남북한 모두 군대를 창설했다. 특히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정당화한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나라를 건설한 북한은 군대를 최우선적으로 강화시켰다. 이것이 지나쳐서 늘 문제였다.

소련 점령군의 일개 장교에서 한 나라의 수령까지 올라선 김일성은 이 점에서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보천보 전투라는 조그마한 전투지만, 무장 독립투쟁한 전력도 있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강군을 만든다는 데 슬기롭고 억센 우리 한민족이 거부할 리가 없었다. 일제 35년을 통해서 군의 중요성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군대가 허약했다. 비록 군의 중요성은 잘 알았지만, 군은 철저히 정치에 종속되었다. 6·25 직전에 인구는 한국이 두 배로 많았지만, 오히려 병력은 남한이 약 10만, 북한은 약 20만이었다.

한국의 군대가 강해진 것은 6·25가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강군으로 변신했다. 외무부보다 더 많은 장교들이 미국에 유학을 다녀와서 당시의 장교들은 어느 모로 보나 엘리트였다.
국민개병제에 대한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를 받아 언제나 60만 대군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도 결국 군사 정부가 들어섰다. 형태는 다르지만, 남북한 모두 군사 정부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이후 무려 569년 만에 한반도에는 남북 모두 군사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6·25가 없었다면 한국의 군대는 여전히 오합지졸에 부패한 군대로 남았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지식인들이 그렇게 통탄해 마지 않는 군사정부는 들어설 리 없었으리라.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역사에 대한 깊은 반성으로 남북한에 군대가 강화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남북 통일이 되더라도 최소한 60만 정예군은 필히 유지해야 할 줄 안다.



[조선이 남북한에게 미친 영향2, 공업화]

조선의 역사가 남북한에 끼친 또 다른 영향은 공업화다.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킨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직접적인 이유는 강한 군대. 간접적인 이유는 산업화, 곧 공업화였다.
그래서 남북한 지도자는 모두 강한 현대식 군대와 그를 뒷받침하는 산업화 없이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초기에는 북한이 유리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빛나는 공업 시설.

일제가 90% 이상의 공업 시설을 삼팔선 이북에 건설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를 고스란히 접수했다. 엄청난 횡재였다. 그래서 그 산업 시설을 가동하기 위해 다른 일본인들은 무자비하게 내쫓으면서도 1,000명의 일본 산업기술자는 노력영웅이라 하여 칙사 대우를 하며 그 노하우를 그대로 전수 받았다(서대숙). 산업화의 기본인 전력을 비롯해서 비료, 철강 공장이 북한에는 생산시설이 넘쳤다. 1년 평균발전량을 먼저 살펴보면, 이북은 91만kwh, 이남은 8만kwh. 이북이 92%를 차지했다. 금속, 화학, 가스 등도 이북이 70~93%를 차지했던 것이다. 한국은 농업 지대로 남겨 두었기 때문에 겨우 경부선 철도 정도가 남아 있었을 뿐이다. 해방 후 몇 년간 북한의 GNP가 한국을 압도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사실 우습게도 일본제국주의자 덕분이었다.

둘째, 풍부한 천연자원.

석유는 없었지만, 특히 철강 산업에 필요한 갈탄과 철광석이 그 당시로서는 무궁무진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연탄은 97.7%, 철강업에 필수적인 유연탄은 99.5%를 이북이 독차지했다. 이북은 시멘트마저 180만 톤을 생산하여 이남 18만 톤의 꼭 10배가 되었다.

셋째, 소련의 아낌없는 지원.

이 당시만 해도 공산주의자들이 참 순진하던 때였다. 간을 꺼내주듯 아낌없이 형제국을 도왔다. 석유도 우호 가격이라 하여 거의 공짜로 주었다. 또한 남반부에도 북반부처럼 '노동자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적화통일하기 위해, 군수산업을 곰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열심히 지원했다.

이 모든 점에서 한국은 불리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미국은 잉여 농산물이나 갖다 주면서 생색을 낼 뿐, 한민족이 오매불망하는 산업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정유공장이 없다는 것을 빌미로 수시로 미국은 휘발유와 등유 값을 올리거나 아예 공급을 끊곤 해서 자유당 때엔 나라 전체가 전전긍긍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울산정유공장을 짓고 나서 울먹였던 것은 그런 내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이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가 된 것도 그런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6·25 후에 서서히 남북의 산업화 역량이 역전된다. 산업화에 대한 지식인의 인식이 급격히 달라졌다. 일반 국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경제 개발에 대한 밑그림을 여러 번 그렸다. 그러나 힘이 모아지지 않았다. 힘이 모아진 것은 지식인들이 무시했던 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한 후였다.

국제사회에 신용이 전혀 없어서 광부와 간호사의 월급을 담보로 해서 서독에서 '눈물 젖은 마르크'를 빌리고, 일본과 수교하면서 '피 어린 엔'을 받아내고, 기업 스스로는 단돈 1만 달러로 빌릴 수 없어서 기상천외한 발상을 하여 한국은행 보증 곧 국가 보증으로 기업이 해외에서 거만한 코쟁이의 '침 묻은 딸라'를 빌리게 도와주고, 월남에 꽃다운 청년을 보내 '피 묻은 달러'를 벌어 와서, 죽자 사자 공장을 세우고 너나 없이 목숨을 걸고 일을 해서 가파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강의 기적이 탄생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논의와는 달리 한강의 기적에서 핵심 사항은 일자리 천만 개 창출이라고 본다. 60년대 초 농촌 인구가 약 70%였으므로 15세 이하가 그 중 50%라고 잡아도 여기서만 잠재 실업이 30%는 되었다. 거기에 실업률이 20%를 상회했으므로 당시의 잠재실업률은 무려 50%에 이르렀다. 그런데 줄기찬 산업화로 일자리를 무려 천만 개나 창출하여 실재실업률을 5% 이내로 줄인 것이다. 천만 명에게 사회보장으로 국가에서 돈을 준다고 생각해 보라.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것이다. 나는 이게 바로 생산적 복지라고 생각한다. 기든스의 그 이론이 나오기 30년 전부터 우린 이미 행동으로 실천했으니까, 서양보다 우리가 월등히 앞선 셈이다. 1997년의 외환위기를 보고 서양에서 아시아 경제를 비웃으며 생산요소만 투입했지, 부가가치 생산이 거의 없었다며 잘난 체하는 세계적인 몇몇 경제학자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1975년을 고비로 해서 남북한의 경제는 완전히 역전되어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그 차이가 벌어져 언젠가부터는 비교한다는 자체가 허무하게 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6·25라는 위기에서 군사와 경제 양면에서 강국으로 태어났다. 반면에 북한은 6·25 침략 후에 처음에는 전쟁 복구를 화려하게 하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 외에는 한국에 어느 것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장 큰 원인은 폐쇄 경제와 개방 경제의 차이였다.

조선의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 군대 강화와 산업화에 남북한이 모두 최우선 정책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군사 국가, 농업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한국은 민주 국가, 공업 국가에서 정보화 국가로 나아가고 있다. 조선 역사에서 어떤 점을 한 쪽은 반성하고 한 쪽은 반성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조선이 남북한에게 미친 영향3, 상업화: 남북한의 결정적 차이]

조선은 양반이란 지배계층이 토지를 사유화한 나라였다. 한 마디로 농업 국가였다. 공업은 사치를 조장한다고 해서 상업은 불로소득을 챙긴다고 해서 죄악시했다. 억제했다. 강력히 억제했다. 서릿발같은 사명감을 안고 억제했다. 어쩌다 장인들이 진기한 물건을 만든 게 들통나면, 즉시 토색질의 대상이 되었다. 갖은 명목으로 다 빼앗아 가 버렸다. 생산 가능한 것의 두 배 이상이 항상 진상목록에 올라가 있어서 권력의 콧김이라도 쇤 자들은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러니 누가 그 기술을 후대에 전할까. 이 전통은 요새도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아무리 작은 기업이라도 기업을 운영해 본 사람은 공무원이나 정치인이라면 치를 떤다.

조선은 상업도 철저히 국가가 통제했다. 이 점이 상업과 공업을 장려한 일본 풍토와 전혀 달랐다. 일본은 서양처럼 무엇이든,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잘만 만들면 그것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풍신수길 이후 전국이 단일 상권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비록 덕천가강이 전쟁을 종식시킨 다음에는 쇄국정치를 했지만 국내의 상업거래가 활발하여 상인들은 기생(게이샤)들에게 영주(다이묘)나 무사(사무라이)보다 인기가 좋았다. 이런 전통 때문에 일본은 쉽게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고 조선은 천신만고 끝에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남북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 국가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가져온 게 바로 상업 장려책과 상업 억제책이었다. 공산주의는 산업화의 부작용을 보고 태동한 사상인 만큼 공업의 중요성은 잘 알았으나 상업의 중요성은 몰랐다. 농업 시대와 마찬가지로 상업은 불로소득을 차지한다고 죄악시한 것이다. 대신에 공산주의는 국가가 모든 것을 분배했다.

상업이 장려되어야 상품이 유통되고 품질이 향상된다. 좋지 않은 상품은 소비자들이 사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상품을 만든 회사는 부도가 난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각 회사는 피를 말리는 경쟁을 한다. 덕분에 소비자는 지갑을 열 듯 말 듯 애를 태움으로써 왕과 여왕 대접을 받으며 나날이 더 좋은 상품을 더 싸게 사게 된다. 그래서 국가 전체는 항상 활기가 넘친다. 불경기가 이따금씩 찾아오지만, 시장은 이를 오래지 않아 복원시킨다.

반면에 공산 국가에서는 국가가 생산을 담당하고 원가에 관계없이 당위성에 따라, 나라의 주인인 인민의 입장에서 가격을 마음대로 정하고
(2002년 7·1 경제개선조치 이전에 북한은 쌀 1kg을 80전에 사서 그보다 10배 싼 8전에 팔았다. 유통비를 제외하고도 72전의 손해를 고스란히 국가가 지는 셈이었다. 그러나 장마당에선 쌀 1kg에 무려 50원이나 했다. 현재는 40원에 사서 44원 받고 판다. 시장에선 이미 100원으로 올랐다.)
분배까지 장악함으로써, 만성적인 공급 부족에 생산성 저하로 온갖 모순이 누적되게 이르렀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불경기와 불황을 보고 반드시 자본주의가 망한다고 희희낙락했지만, 오히려 공산국가의 경제가 축 늘어져서 항구적인 불황에 빠져들어 누구도 손을 쓸 수 없게 이르렀다. 망하거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상업을 하게 되면 또한 필연적으로 국민이나 국가나 개방된다. 나라 안만이 아니라 나라 바깥의 세계를 상대로 물건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다른 체제와 문화를 보고 개방적인 사고를 기를 수밖에 없게 된다. 개방적인 나라는 계속 발전하지만, 폐쇄적인 나라는 고인 물이 썩듯이 갈수록 퇴보하게 되어 있다.

조선이 바로 그러했다. 철저한 자립경제였다. 무역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은 전체 경제로 볼 때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그러하다. 이들은 조선의 역사에서 반성을 못하고 조선을 그대로 계승했다. 아니, 답습했다. 공산주의를 가르쳐 준 종주국 소련을 그대로 따라한 탓이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무역이란 것도 형태는 물물 교환, 내용은 형제국에 대한 원조였다. 옛날의 조공무역과 흡사했다. 결국은 서로가 망할 수밖에 없는 체제였다. 재화와 용역에 경쟁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은 다행히 산업화 초기부터 무역입국을 내세웠다. 전산업의 수출화, 이것이 목표였다. 사실 자원도 자본도 기술도 없었던 한국으로서는 그 길 외에는 살 길이 없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선진국의 경제식민지로 전락될 것이 두려워 감히 문을 열 생각을 못했다. 남미처럼, 자유당 정권처럼, 민주당 정권처럼, 애국심이 철철 넘쳤을 뿐 경제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초기의 군사정부처럼 나라의 대문을 잠그고 대체산업 육성에 심혈을 기울여 자급자족하는 자립경제체제를 고수했다면,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전혀 갖추지 못해서 오늘날의 북한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군사정부가 초기의 시행착오를 거쳐 농수산물에서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품을 국제시장에 내몰아 치열한 경쟁을 하도록 한 '전산업의 수출화'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한국인은 아랍인들까지 수시로 드나들었던 고려 이후 무려 600년만에 비로소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 대양을 넘나들다가 더러 죽기도 하고 못 돌아오기도 하지만 살아 남은 자들은 개구리보다 엄청 크고 훨 잘생긴 몸매를 자랑하면서 어김없이 고향의 강으로 되돌아오는 연어처럼 툭 트인 애국자가 되었다.

공산국가가 아니면서도 인도나 남미 여러 나라처럼 국가간의 상업 곧 무역을 소홀히 하다가, 자급자족한다고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우다가 엄청난 자원에도 불구하고 더 가난하고 더 불평등한 나라로 남은 경우가 훨씬 많은 걸 생각하면 '무식한' 군인들의 혜안에 가슴을 쓸어 내리게 된다.

WTO 체제에서 개방화 자유화에 거센 반발을 하는 오늘날의 노조와 학자, 농부, 언론 등은 오히려 그 때 당시에 600년만에 문을 활짝 연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를 상기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히려 기업가, 경영인, 상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유무역협정에 임하고 국제기준을 뛰어넘는 규제혁파와 노동시장 유연화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앞장서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선은 힘들지만, 뼈를 깎는 아픔으로 너나 없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경제자유도를 획기적으로 높여, 삐거덕거리는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경제 중환자에서 홈그라운드와 필드(국내 시장과 세계 시장)를 질주하는 경제 선수로 탈바꿈한 아일랜드나 핀란드, 뉴질랜드, 네덜란드처럼 불과 5년 이내에 선진국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군대와 공업, 상업은 조선에서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억제한 대표적인 분야인데, 북한에서는 군대와 공업만을 일으키고 한국에서는 이 셋을 다 장려한 결과 전혀 다른 국가를 만들게 되었다. 공짜로 주다시피 하던 석유를 80년대 말 이후 소련이나 중국이나 거의 주지 않음으로써 경화(hard currency)가 없는 북한은 졸지에 저 스파르타처럼 군사 국가에 농업 국가로 전락했다. 80%의 공장이 문을 닫았다. 고철 덩어리가 돼 버렸다. 동독의 경우에서 보듯이 통일이 되면 북한의 공장 대부분은 뜯어내야 할 것이다.

혜택은 누구한테 돌아가는가? 북한은 그 혜택이 철저히 지배층에게 돌아갔다. 갈라먹을 떡과 빵과 쌀이 너무 적기 때문에 힘센 사람이 그것을 우선적으로 차지하기 때문이다. 결국 봉건국가인 조선과 똑같은 체제이다. 양반이 공산당원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말만 거창하게 사회주의요, 노동자농민의 낙원이다. 그것은 옛날에 지주가 하나같이 악질이어서 부를 독차지한 것이 아니듯이 공산당원이 하나같이 악질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생산이 적어서, 경제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고집이 강한 바람에 모든 산업이 망가졌기 때문에 그럴 뿐이다. 그들도 먹을 게 풍족하면 인심 팍팍 쓸 것이다. 모름지기 쌀독에서 인심 난다.

머리 좋은 마르크스와 모택동의 달콤한 혀에 맞대응하지 않고, 마르크스와 모택동은 화려한 공중누각에 모셔두고, 쓸데없는 고집을 안 피우고,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가리지 않고 쥐 잘 잡는 고양이를 열심히 키워서
(공산당원이든 비공산당원이든, 공산주의 이론을 달달 외우는 사람이든 떠듬떠듬 외우는 사람이든 일 잘하는 사람을 우대하여)
생산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킨 사람이 바로 공산주의의 이단아 등소평이다. 그 결과 문화혁명의 여파로 북한보다 훨씬 못 살던 중국이 불과 20년만에 북한보다 열 배는 잘 살게 된 것이다. 탈북자들이 만주에 가면 기절초풍할 일이 사방에 늘려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돼지가 옥수수죽을 맘껏 먹고 중국의 개가 쌀밥을 물리도록 먹는 현실을 목격하고는 눈이 한 자나 쫓아 나온다.

한국은 국민의 거의 대부분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 한국의 중산층이면 북한의 부장 곧 장관급이다. 한국은 1년 총생산이 약 500조원인데, 이중에 300조원이 임금으로 지급된다. 조세부담률 20%를 적용하면 세금이 60조원은 되어야 당연하겠지만 총근로소득세가 겨우 7조5천억원밖에 안 된다. 그나마 노동자의 45%는 세금을 한 푼도 안 낸다. 혜택이 실은 노동자에게 가장 많이 돌아가는 셈이다. 더군다나 한국은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교육의 자유, 언론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 온갖 자유가 있다. 거기에 미쳤다는 소리를 안 듣고 취향대로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가 있다.

북한은 지배층이라도 저도 인간인지라 굶주린 대다수의 국민을 보고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데, 한국은 극소수가 굶주리고 사회보장제도도 꾸준히 나아지기 때문에 그런 심적 갈등이 별로 없다.


[조선이 남북한에게 미친 영향4, 명분 사회]


조선의 역사가 남북한에 거의 똑같이 미친 영향이 바로 명분이다.

명분의 형태만 다를 뿐 셋 모두 아주 흡사하다. 단지 한국이 경제개발과 더불어 실리파가 만만찮게 늘어났지만, 사회의 기조는 여전히 명분이다. 명분을 잃으면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도 낯 들고 못 다니고, 명분을 얻으면 빈깡통이라도 요란한 소리와 더불어 TV에 단골로 출연한다. 오죽하면 유치원 아이도 이렇게 노래할까. --'떼레비쩐'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조선은 성리학을 명분으로 한 철저한 이념 국가였다. 대추 먹고 이빨 쑤시면서도 명분을 버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칸트처럼 자율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이처럼 윤리적인 국민은 전세계 어떤 역사를 보아도 다시는 없을 정도이다. 조선은 법이 따로 필요 없는 나라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상 국가였다.

문제는 이것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 다른 사상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교와 도교는 물론, 중국에서는 조선이 하늘같이 받들던 명이 건국되면서 이미 양명학이 등장하고, 후에 종주국인 청에서는 고증학이 탄생했지만, 조선은 요지부동이었다. 오로지 성리학이었다.

역사적으로 보아, 군대를 무시한 송에서 오랑캐에게 강한 군대로 맞설 생각(우리의 자랑스러운 고려처럼)을 않고, 정신적으로 자기들이 문명인으로서 우월하다는 자위 수단으로 발달한 성리학을 하늘처럼 받들었던 것이다. 그나마 성리학을 신봉하면서도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이나 부국강병을 주장한 다산이 없었던 바 아니나, 언제나 그것은 소수 의견이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도 그것만이 진리인 양 다른 모든 사상을 깔아뭉개면, 그 사회는 썩기 시작하고 곪기 시작한다. 비판이 없으면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도 의심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악마에게 속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심할 줄 모르고 비판할 줄 모르면, 사람들은 사상이나 종교의 속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사회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것의 화려한 겉만 받아들이게 된다. 이해하지 않고 '암기'할 뿐이다. 당연히 더 이상 인간의 사고 능력이 개발되지 않는다. 인간은 사라지고 앵무새와 원숭이와 로봇이 넘쳐난다. 인간 사고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창조는 엄두도 못 낸다. 그런 사회에서는 창조하는 자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아 돌팔매질을 당하거나 마녀로 내몰려 불태워진다.

남북한에 이런 현상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이것은 반성의 결과가 아니라 무의식 중으로 답습하게 된 현상이라고 본다.
북한은 공산주의, 이어 주체 사상, 그리고 통일.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이어 진보, 그리고 개혁과 통일.

명분이 뭔지 잘 모르는 한국의 기업가는 늘 명분에 밝은, 민주주의란 깃발을 항상 들고 다니는 정치인과 학자와 기자와 종교인과 대학생에게 몰매를 맞는다. 정권만 바뀌면 전전긍긍이다. 해외로 빙빙 돈다. 입마다 큰 자물쇠를 채운다. 군사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를 산업화시켜 선진국 문턱에 올려놓았지만, 민주주의라는 명분이 약했기 때문에 늘 가슴앓이를 하다가 주먹을 휘두르곤 했다. 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이젠 걸어다닐 힘도 없기 때문에 씩씩거리다가 하나 둘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


특이한 현상은 한국에 1980년 광주 사태 이후 자유민주주의의 독보적인 지위가 무너지고, 급속히 사회주의가 대학생을 비롯한 지식인 사이에 퍼져 나가고 마침내 북한의 주체사상이 운동권을 중심으로 만만치 않게 파고들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군대와 상업, 공업을 일으킨 군인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 세력과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치 세력 내지 지식인 계층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이것이 한국을 혼란스럽게 한 점도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견제한 비판 세력으로 한국을 역동적이게 만든 점도 있다. 문제는 이제 어느 정도 서로를 용납할 만한데, 그런 기미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선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듯하지만, 지식인과 기업인 특히 대기업 소유자 및 그 경영자 사이에는 조금치의 타협도 없어 보인다. 피터 드러커가 말했듯이 단연 세계 1위의 원기왕성한 기업가 정신으로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세계가 놀라워하고 부러워하고 두려워하는 한국의 대기업이건만 이를 성토하지 않으면 지식인 대접을 못 받는 것이 독특한 한국적 풍토이다.


북한은 전혀 혼란이 없다.
조선처럼 이념과 군대를 중앙 정부가 한 손에 쥐어 버림으로써 그 누구도 반발을 못한다. 주체 사상과 군대, 이것은 북한의 위정자가 최후까지 놓지 않을 두 개의 강력한 무기이다. 여차하면 한국에게도 휘두를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이 둘은 정치 수단의 역할이 더 크다. 하여간 북한은 철두철미한 명분 사회이고 권력의 크기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공고한 신분 사회이다.



[조선이 남북한에게 미친 영향5, 농지개혁]

북한은 조선에는 없던 막강한 군대와 화려한 공업화로 북한 인민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더구나 초기에는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하여 수천년의 농민의 한도 풀어 주었다.

그러나 현물세를 무려 27% 걷어 가서(실지로는 다른 명목을 붙여 30%가 넘었음)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 사실상 전 농민이 소작농이 되었다. 완벽한 하향 평준화였다. 그나마 50년대 말에는 땅을 다시 빼앗아 모조리 협동농장화함으로써 농민의 근로의욕을 무참히 꺾어 버렸다. 그 결과 인구 대비 농토가 한국의 두 배가 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순이 누적되어 북한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한국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농지개혁으로 농민의 무려 92.4%가 자작농이 되었다. 명분은 북한이 요란했지만, 실질은 한국이 월등히 나았던 것이다. 한국은 사실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지주 계층이 조직적으로 언론을 동원해서 농지개혁에 반대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에는 농림부장관 제의를 단호히 거절한 공산주의자인 조봉암에게 토지 개혁을 일임하겠다고 하여 그가 농림부장관직을 수락하게 했다. 북한의 이른바 3·7제 토지개혁은 완전 실패작임을 누구보다 잘 안 조봉암은 15할 곧 일년 소출의 30%씩 5년만 내면 영구히 농민의 토지가 되게 하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전격적으로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북한은 1년에 30%씩 평생 내어야 했지만). (박명림) 그 후에는 세금도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면세였다. 이로써 500년 이상 군림했던 지주 계급, 곧 양반을 몰락시켜서 유례없이 평등한 사회를 건설했다. 북한과 달리 한국의 농촌은 상향 평준화되었다.

북한도 만약 속임수를 쓰지 않고 처음에 농지를 분배했던 것을 그대로 두고 현물세를 10% 정도 거둬 갔으면, 공산국가의 모범 국가로 크게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가 바로 호족, 귀족의 온갖 반발을 누르고 이 10%의 세금을 정착시켰던 영명한 군주였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는 이로써 스스로 정통성을 세운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공산당이 그렇게 욕을 해대는 봉건군주보다 김일성이 훨씬 못했던 것이다. 30%나 빼앗아갔으니까.

이상에서 보듯이 조선의 역사를 실질적으로 잘 계승한(답습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이름을 그대로 쓰더니 결국 닮아가나 보다. 부자가 권력을 세습하는 것까지 닮았다. 철저한 명분 사회인 점도 똑같고, 자립경제를 추구하는 것도 똑같다. 농토를 농민에게 안 주고 국유화한 것도 똑같다. 조선은 단지 양반이 토지를 골고루 갈라서 차지한 점이 다를 뿐인데, 그거나 저거나 농민이 실질적으로 소작인이라는 데는 변함없다.

군대가 강한 점이 북한과 조선이 현재로선 유일하게 다른 점인데(산업 시설은 이미 대부분 가동 중단되었기 때문에 조선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이것도 중앙 정부가 완전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약의 차이만 있을 뿐, 국민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국민이 아무리 울화가 치밀더라도 정권을 바꿀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김정일이 재미로 국방위원장이란 직함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다행히(?) 이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망해도 열 번은 망했어야 할 북한 정권이 공산 정권이 우르르 몰락한 지가 10년이 넘었건만, 세계 최강국 미국에게 식량도 공짜, 기름도 공짜로 실컷 받아먹고도, 버섯구름을 은은히 비추면서 미국을 맘껏 조롱하면서 굳건히 버티고 있다. 한국은 숫제 어린애 취급을 하여 어른들 문제(군사 문제)에는 아예 끼워 주지도 않는다. 이를 보고 뿌듯한 민족적 자존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한국에서 급격히 늘고 있다. 북한 주민이야 중국의 개님과 돼지님보다 못한 취급을 받든 말든. 자력갱생한다며 자주자립한다며 호의호식하던 대제국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민족적 자부심을 만방에 과시하며, 기껏 협박과 구걸로 '제국주의자'와 그 '주구'의 적선에 명줄을 매달든 말든.


[희망 사항]


한국은 명분을 대표하는 민주화 세력과 실리를 대표하는 산업화 세력이 스스로는 반성하고 상대는 추어주며(責己恕人) 손을 맞잡을 수만 있으면,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어떤 나라보다 아름다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GNP의 6%를 투자하여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지던 때는 아득한 옛날이 되고, 국방비를 세계 평균 3.3%에도 못 미치는 GNP 2.8%로 줄여서 군장비 현대화가 점점 늦어지는 것은 물론 직업군인이 20년도 더 된 13평 아파트에서 비참하게 살게 내버려두고, 군의 '머리'인 정보분야를 90% 이상 미국에게 의지한 상태에서 갈수록 반미 사상이 널리 퍼지고, 군인의 사기를 이리저리 꺾고

(전 국민이 안심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월드컵을 지켜보도록 외로이 대한민국을 지키다가 '봐 주라'는 어르신의 말씀을 철석같이 믿고 좋은 말로 타이르던 중 인민군의 느닷없는 정조준사격으로 산화한 여섯 명의 군인에겐 국민들이 촛불 하나 안 밝혀 주고 보상비는 겨우 6천만원, 국민을 기쁘게 해 준 월드컵의 태극전사는 폼만 잡은 후보도 3억원에 무수한 팬클럽, 4강 신화를 부채질한 화란인 희동구는 최소한 3억원의 보너스에 더하여 대통령에 나와도 당선될 만한 광적인 인기, 미군의 작전 수행 중 사망한 두 여중생에겐 보상비 1억9천만원도 너무 억울하여 '악의 화신' 부시의 무릎을 꿇리고 말겠다는 애국시민들의 손에 손에 밝혀진 수백만 개 아니 수천 만개의 촛불 등),

막연한 희망과 '설마'에 안보를 맡기던 조선시대의 고질적인 안보불감증이 휴전한 지 겨우 반세기만에 도진 오늘의 상황을 하루 빨리 타개하면 평화적이고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남북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2000. 7. 27.) (2003. 1. 21.)

http://www.jinbonuri.com



한 빛: ( 조선이 망한 이유는? )  * 클릭 --> http://www.hanbitkorea.com/technote7/board.php?board=hbboard&search=조선&shwhere=subject&command=body&no=64  [02/2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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