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별혁명'시대의 시민 혁명
강천석칼럼] ‘告別혁명’ 시대의 시민혁명 ▲ 강천석 논설주간 며칠 전 묵은 책 더미를 옮기다 바닥에 깔려 있던 ‘시간과의 경쟁―동아시아 근현대사 논집’이란 책 표지에 눈길이 닿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단숨에 3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동숭동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개강(開講) 첫 시간이면 으레 있을 법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너뛰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강의가 시작되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금지한다는 엄중한 사전예고도 있었습니다. 소란스러웠던 그 시절, 수강생들은 선생님의 이 엄중한 지침 덕분에 한 차례의 휴강도 없이 학기 내내 혁명에서 혁명으로 이어진 중국근대사의 격랑에 몸을 담글 수 있었습니다. ‘시간과의 경쟁’은 너무 이른 나이에 타계하신 바로 그 선생님의 유저(遺著)입니다. 책에는, 중국과 일본―물론 한국도 포함되겠지요―의 지난 100년은 어른거리는 망국(亡國)의 그림자 아래 서둘러 부강(富强)한 나라를 만들어 이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벌였던 역사이고, 이 조급증과 강박증이 동양 3국 역사의 비정상적 전개를 가져온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00년 전 ‘시간과의 경쟁’에서 맨 먼저 탈락한 것은 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식민지라는 운명이 주어졌습니다. 중국은 지지부진했습니다. 반(半)식민지는 그런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승자인 듯 보였던 일본도 조급증과 강박증에 밀려 침략적 제국주의의 길을 걸어갔고, 마침내는 2차대전 패전으로 미국에 점령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시간과의 경쟁’이란 동양 3국 역사의 특징은 100년이 흐른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얼마 전 ‘일본은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 중국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데 한국은 컴컴한 터널로 들어서고 있다’는 전경련 부회장의 발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에는 그때나 이제나 한·중·일 3국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시간과의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보겠습니다. ‘한·중·일 동양 3국’이란 용어는 이미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시대착오적 용어가 돼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은 ‘일·중’을, 중국은 ‘중·일’을 이야기할 뿐, 거기 한국을 끼워주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돼버렸습니다. 말은 시대의 조짐입니다. 시대보다 앞서 달려와 귀 달린 사람에게 경보를 울리는 법입니다. 섭섭하다고, 괘씸하다고 할 게 없습니다. 25년 전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선생으로 지목했던 한국은 이제 중국의 한 성(省)만도 못한 처지로 굴러떨어졌습니다. 인구 4800만명의 광둥(廣東)성은 허허벌판에서 맨몸으로 시작한 지 25년 만에 수출은 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외자유치에선 한국의 3배 이상 실적을 올리고 있습니다. 중국이 이럴진대, 일본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 나라에서 한국 뉴스는 탄핵소추를 받은 대통령과 그 대통령을 지지하는 전국의 촛불시위밖에 없습니다. 불과 몇 년 만에 왜 이 지경이 돼버렸을까요. ‘시간과의 경쟁’에서 선생님은 일본은 혁명이라 불러야 할 ‘메이지(明治)유신’에도 혁명이란 단어를 붙이길 꺼리는데, 중국에는 혁명이란 말이 넘쳐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혁명 좋아하는 민족의 팔자가 다난(多難)하다는 뜻이겠지요. 그 혁명 좋아하던 중국의 반체제급(級) 지식인이 다시는 중국에 혁명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고별(告別)혁명’이란 책이 화제가 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이 나라에선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이 이번 총선을 통해 시민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외쳐 왔습니다. ‘고별혁명’의 시대에 혁명 환영의 플래카드를 쳐든 인파가 거리를 메우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잠시 동안이나마 살다간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면서 마지막 책의 제목을 ‘시간과의 경쟁’으로 정하신 민두기(閔斗基) 선생님. ‘시간과의 경쟁’에서 다시 한번 맨 먼저 밀려나는 이 나라에 살면서,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강천석 논설주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