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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개혁개방'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2001. 11. 26 손광주(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 1. 몇 가지 의문사항 지난해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많이 바뀐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분단 50여 년 만에 남북의 정상이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큰 변화라 할 수 있고, 지금까지 남북대화의 성과물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신뢰를 담보하는 문서인 6.15 남북공동합의문이 나왔으며, 이후 장관급회담, 국방장관회담, 경제당국자회담, 적십자회담 등 후속회담들이 개최되어 왔고 또 앞으로 계속 열릴 전망이다. 이밖에 이산가족상봉을 비롯하여 당국 및 민간차원의 크고 작은 사회문화분야의 교류까지 합치면 이제 웬만한 남북 간의 만남은 신문에서도 크게 지면을 할애 받지 못할 정도로 많아져 버렸다. 또 김정일 위원장(이하 ‘김정일’)은 인민들이 비참하게 배를 곯고 있는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를 시켜 김대중 대통령을 포함한 남한의 유력인사들에게 값비싼 송이버섯을 갖다주는가 하면, 남한의 어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자체 행사에 인민군 의장대를 초청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고 정식으로 통일부에 신청서까지 냈다가 퇴짜를 맞는 등, 좀 ‘괴상한’ 일도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현상들을 놓고 보면 최근 1년 동안의 남북관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음에 틀림없고, 또 앞으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는 만큼 또 어떤 변화를 몰고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향후 남·북·미의 관계, 나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남·북·미·중 간의 국제역학관계가 단기적으로 어떤 형태로 변화될지는 쉽게 예견하기 힘들게 되었다. 또 지난 3월 7일부터의 한미정상회담을 통하여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한·미간에 의견이 일치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북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들을 노정한 것도 쌍방 간에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향후 한·미간 대북공조의 방식이 과거 클린턴 정부 시절의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되는 현상들만 추수(追隨)하다보면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무엇이 현상적인 것이며, 무엇이 핵심적인 것이고 무엇이 주변적인 것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 중요한 흐름 자체를 놓쳐 버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지금 동북아시아의 변화 중에서 한국, 미국, 일본, 중국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핵심적 사안은 북한의 변화, 즉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는 주변 나라들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한을 비롯하여 미국, 일본, 중국이 모두 이해관계를 가진다. 특히 남한정부는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여 민족의 화해와 협력, 평화정착, 나아가 통일로 가는 중요한 계기로 삼으려고 한다. 미국과 일본은 북한이 개혁개방 노선을 택함으로써 자국에 대한 군사위협이 근원적으로 제거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중국 역시 한반도 정세가 안정 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며, 이를 위해 북한이 중국 형태의 개혁개방 노선으로 따라오기를 원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변화들 중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가 현재로서는 수면 위에 떠오른 사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가 어떻게 전개될지 그 추이를 살펴나가는 것은 향후 한반도 정세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주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북한의 개혁개방’이라고 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몇 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 의문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김정일이 개혁개방으로 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북한은 진짜 변했으며 개혁개방으로 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둘째, 만약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간다면 어떤 형태로 나갈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남한에서는 중국식 개혁개방의 형태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는데, 북한에도 적용이 가능할 것인가, 즉 김정일이 과연 ‘등소평’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셋째, 현 김정일 체제가 과연 개혁개방으로 나갈 수 있는 체제환경과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아무리 ‘신사고’를 외치더라도 체제 자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은 있는데 몸이 안 움직이는’ 상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상의 의문들을 중점적으로 점검해보고자 한다. 2. 북한의 개혁개방을 판단하는 두 가지 관점 첫째, 북한은 진짜 변하고 있으며, 개혁개방으로 나갈 것인가. 사실 이 문제는 최근 1년여 사이의 북한의 변화와 관련하여 가장 본질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지난 한미정상회담에서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근본적인 시각차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변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고, 부시는 김정일에 대해 ‘다소 의구심(some skepticism)’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남한정부는 ‘김정일은 이미 변했다’는 관점을 갖고 있고, 미 공화당 정부는 ‘김정일이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북한의 변화와 관련하여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관점과 ‘언제든 과거의 상태로 U턴할 수도 있다’는 관점이 상충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북정책의 수행방법론을 둘러싸고 남한정부의 ‘출구론’(먼저 주고 뒤에 받자)과 부시 행정부의 ‘입구론’(검증 확인 후에 지원하자)이 맞서있는 것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세 가지 포괄적 상호주의안 - 북한으로부터 ▲ 제네바 합의 철저 준수 ▲ 미사일 제조 판매 완전 해결 ▲ 남한에 대한 무력도발 포기를 받아내는 대신에, ▲ 북한의 안전에 대한 한미 양국 보장 ▲ 적정한 경제협력 보장 ▲ 북한의 국제사회 진출과 국제금융기관의 차관지원에 대한 협력 등을 북한에 줄 수 있다 - 을 제시하면서 일괄타결을 통해 해결하자는 해법을 던져놓고 부시 행정부와의 협의를 기다리고 있다. 부시 행정부 역시 대북정책의 6대 원칙 - 한·미·일 정책공조, 한반도 긴장완화 지지, 북한정권에 대한 정확한 인식, 대북정책 전면 재검토, 대북 검증·점검, 북 무기확산 활동에 주목 - 을 수립해놓고 국무부와 백악관, 국방부, 관련연구소를 중심으로 대북정책 수행을 위한 기본전략을 짜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볼 때 향후 대북정책의 구체적인 안을 놓고 발생할 수 있는 한·미간의 의견 차이는 궁극적으로 북한의 변화에 대한 양국의 관점 차이에서 파생될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1년 동안 남한의 학계·언론계에서 북한의 변화를 둘러싸고 전략적 변화냐 전술적 변화냐, 본질적 변화냐 현상적 변화냐 하는 논란이 계속되어 왔지만 뚜렷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으며, 또 이러한 논란은 앞으로도 김정일의 중요한 정치적 행위가 나올 때마다 불거질 것이다. 또 “북한의 변화가 본질적 변화냐, 현상적 변화냐가 중요하지 않다. 현상적인 변화들이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니, 김정일을 자극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변화로 유도하는 것이 좋다”는 일부 의견도 있다. 물론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갈 것인지 여부는 김정일이 제일 잘 알 것이다. 또 원칙적인 견지에서 말한다면,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는 남북문제로 보기 힘든 측면도 있다. 일반적으로 남북문제라고 할 때, 남북 간의 평화정착 문제,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에 관한 문제, 통일문제를 들 수 있다. 남북문제는 대체로 이 세 가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중 평화정착 및 통일과 관련한 문제는 남북 당사자뿐 아니라 미·중·일·러 등 국제사회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만큼, 그 형식과 방법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는 앞의 세 가지와는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앞의 세 가지는 남북이 동등한 의지를 가지고 국제사회의 협조를 얻어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지만,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는 1차적으로는 북한의 의지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북한의 개혁개방과 관련하여 남한과 미·일·중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각 나라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보조역’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 역시 앞의 세 가지 문제와 맞물려 상호의존하고, 또 상호제약하는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개혁개방과 관련한 직접적인 변화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북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북한의 변화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단의 결과에 따라 대북정책의 철학과 그 수행방법에서 크게 차이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개혁개방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북한의 변화를 더 추동하는 방향으로 대북정책의 중점이 두어야 할 것이며, 북한의 변화가 전술적인 변화에 불과하다면 검증·확인 쪽에 더 무게를 두는 정책을 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변화 여부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일까. 북한의 변화를 일정한 범위 내에서 과학적으로 잴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은 없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의 기본 관점과 이에 기초한 몇 가지의 검증기준이 있을 수 있다. 첫 번째 관점은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를 관찰하는 것이다. 북한의 변화, 즉 구체적으로 김정일의 변화가 자신의 유일지배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북한 인민들의 정치적 권익과 물질생활의 향상을 위한 것이냐 하는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만약 북한의 변화가 김정일 개인의 유일지배체제를 유지 강화하는 데 중점이 두어진다면, 이는 본질적인 변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째 관점은 북한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남북 간의 평화를 보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정착에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압축하면, 북한 인민들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에서의 지위를 높이고, 남북 간의 평화를 정착하는 데 기여하는 변화냐, 아니냐를 잣대로 북한의 변화 여부를 판정해야 하며, 김정일 체제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뚜렷이 입증될 때 비로소 본질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3. 김정일의 변화를 보는 몇 가지 기준 현재 ‘김정일은 이미 변했으며, 또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지난해 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이 파탄난 경제를 복구하고 체제생존을 위해 개혁개방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남북정상회담을 받아들였고 또 김정일이 중국의 개방지역을 포함하여 2회 연속 중국을 방문하고,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과의 미사일 협상이 상당한 진척을 보였는가 하면, 지난해 10월 조명록 차수를 미국에 보내 북미 공동코뮈니케를 발표했으며, 최근 1, 2년 사이 유럽, 동남아 국가 등과 활발한 수교활동을 벌이는 것도 개혁개방으로 가는 청신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밖에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 연결, 개성 신의주 등지의 경제특구 설치방안 등도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가는 중요한 신호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일면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북한은 80년대 이후 만성적인 식량난과 관료주의적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 그리고 90년 이후 구공산권의 붕괴로 인한 역내무역의 몰락 등으로 경제난이 가중되어 왔으며,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여기에다 70년대 이후부터 어떠한 경제논리보다 수령우상화 논리가 앞서다 보니, 인민들에게는 통강냉이 한 톨이 시급한데도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각종 시설물 건축에 수십 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따라서 북한경제가 안 망하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95년 이후 300만 명 이상의 아사자가 나왔고, 이에 따라 김정일이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것은 명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북한이 변화하고 있다는 현상적 조짐은 감지되고 있다. 올해 초 노동신문 등의 신년공동사설에서 드러난 경향을 보면, ‘국가경제력’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경제전반을 현대적 기술로 개건’하고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풍조를 세우며’, ‘실효성 있게’, ‘실리가 나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실용주의적 노선을 강조하고 있다. 1월 14일자 노동신문에는 김정일의 ‘말씀’을 빌려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로운 관점을 갖자”고 언급했다. 이를 남한에서는 ‘신사고’로 표현하고 있고, 북한에서는 ‘새로운 관점’, ‘새로운 높이’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신년공동사설에서 ‘자력갱생’, ‘자립적 민족경제’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대외 경제개방을 좀더 가속화할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선군혁명노선’, ‘선군정치’의 중요성을 먼저 강조하고, “불패의 군력과 정치사상적 위력은 반드시 강력한 경제력에 의하여 안받침되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군사중시사상이 무엇보다 앞서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또 지난해 남한언론사 사장단과의 면담에서 김정일 스스로가 “나의 힘은 군력에서 나온다”고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김정일 체제가 유지되는 한 군사력 감축을 기대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변화를 놓고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첫째, ‘군사’와 관련한 부문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이다. 군사문제는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관련한 문제일 뿐 아니라, 북한 인민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군사분야와 관련하여 중대한 변화가 있는 것이 입증된다면 북한은 변하고 있다고 일단 믿어도 좋을 것이다. 북한 인민들은 50여 년 간 전시상태 아니면 전시동원 체제에서 생활해왔다. ‘전쟁’은 생활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북한 인민들은 김일성 김정일 정권이 불어넣는 전쟁의 공포에 시달려 왔다. ‘수령결사옹위 정신’, ‘총폭탄 정신’ 등등이 모두 ‘전쟁’에서 파생된 일상용어들이다. 그 한 예로 지난 3월7일부터의 한미정상회담이 끝나자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지는 “미제국주의가 전쟁을 도발하려 한다는 방송이 나간 후 평양에 비상경계령이 선포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평양시내에 인적이 끊겼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따라서 김정일 정권이 북한 인민들에게 일상적인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시키는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면 큰 변화라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논리에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동안 남한 국민들도 전쟁의 공포에 시달려 왔으며, 세계적 범위에서 미국이 전쟁수행 빈도가 가장 높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 국민들이 ‘일상적으로’ 전쟁의 공포에 시달려 온 것은 아니며, 전쟁을 정권안보의 차원에서 악용할 수 없을 정도로 국민들의 의식이 성장한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아울러 미국이 한국의 반대와 중국의 견제를 무릅쓰고 북한에 대해 자의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실제 전쟁 가능성에 비해 북한 정권이 전쟁을 정권안보의 차원에서 이용하는 것은 일상화되어 있고, 늘 사용하는 체제관리 기법이다. ‘북한 인민들의 전쟁에 대한 공포 제거’, 이것이 김정일 정권의 변화를 가름하는 첫 번째 기준이라고 볼 수 있다. ‘군사’ 분야에서 김정일 정권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대목은 ▲ 현재 10년∼13년의 의무 군복무기간을 어느 정도 단축하는가 ▲ 노농적위대 등의 상시 군사훈련이 어느 정도 약화되는가 ▲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포기와 함께 MTCR(미사일기술개발통제체제)에 가입하는가 ▲ 생화학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는가 등등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오히려 북한은 휴전선 근처에 군사력을 집중 강화했으며,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해오고 있다. 따라서 김정일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인 ‘군사’에서 변화는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북한의 변화를 관찰하는 두 번째 기준은 정치, 특히 선거제도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북한의 노동당 규약과 사회주의 헌법에는 선거에서 복수제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사전에 내정한 사람을 내려보내고 가부의 투표만 하고 있다. 이 같은 선거방식이 어느 정도 개선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도 북한의 변화를 재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적어도 군당급 이상 책임비서 선거에서는 복수후보제를 실제로 인정하고 당원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선거제도에서의 변화는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은 1970년대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수령절대주의가 더 심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수령에 대한 충성도를 기준으로 사전에 후보자를 내려보내고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처형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보내거나, 철직 혹은 지방으로 소개(疏開)했다. 따라서 일정한 수준에서라도 선거제도에서의 변화가 감지되지 않을 때 김정일이 본질적으로 개혁개방을 하고 있다고 입증하기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세 번째 기준은 간부들의 선발 배치 기준을 계급적 성분에 의거하는 제도가 폐지 또는 완화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70년대 김정일 체제가 들어서면서 북한에서는 부정기적으로 계층 재분류 사업을 통해 ‘계층청소‘를 단행해왔다. 북한에서의 계층은 핵심계층, 기본계층, 적대계층으로 나뉘고, 이를 다시 세분화해 51개 부류로 나뉜다. 적대계층은 토지 5정보(ha) 이상 소유한 자, 즉 지주 자본가 및 그 가족들을 비롯하여, 친일 친미주의자, 반동관료배, 기독교 신자, 출당자, 입북자,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 등등 21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한마디로 인간 이하이다. 반면 김일성의 친인척, 빨치산 가족 등의 핵심계층은 식량배급, 진학, 일자리, 승진, 선발, 배치, 혼인 등등에서 모든 특혜를 누려왔다. 이 같은 현대판 ‘카스트’ 제도에 일정한 변화가 없으면 북한이 본질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지막으로 수령에 대한 개인우상화가 어느 정도 완화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는 북한의 변화를 잴 수 있는 마지막 사안이자 핵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수령절대주의의 변화는 북한의 궁극적인 변화 여부를 가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령절대주의가 완화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북한에는 김일성 동상, 사적비 등이 전국 도처에 수도 없이 깔려 있다. 이러한 우상화 시설물들이 궁극적으로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김정일 체제가 제거되지 않고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다만 이러한 우상화 시설물들에 대한 관리·보전 비용이 줄어들고 있는가, 여기에 소요되는 인력이 늘어나는가 줄어드는가를 살핌으로써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김일성 동상 관리를 잘못했다가 정치범수용소로 갔다는 소식은 들려오지만, 우상화 시설물에 대한 관리유지비가 줄어들었다는 통계는 나오지 않고 있다. 수령우상화가 약화되고 있다는 것을 잴 수 있는 뚜렷한 기준 중 하나는 모든 정치범수용소를 폐쇄하고 정치범, 양심수를 석방하며 이들에 대한 감시 통제를 해제하는 것이다. 현재 김정일 정권은 공식적으로 “북한에는 정치범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탈북자와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다 탈출해온 사람들의 구체적인 증언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1974년 김정일 세습체제가 구축된 이후 3대 혁명소조운동, 80년 제6차 당대회를 통해 수령절대주의 체제에 걸림돌이 될 만한 정적과 비판자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 가족들을 정치범수용소에 수감하여 왔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들이 전국 정치범수용소에 걸쳐 20여만 명이 상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석방과 실질적인 정치범수용소 폐쇄가 이루어질 경우 김정일 체제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북한이 유엔인권위원회에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현황에 대해 제대로 된 자료를 보내게 되면 1차적인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북한의 방송에서 수령우상화 및 김정일에 대해 신비감을 조성하는 내용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는가를 살핌으로써 수령절대주의의 완화 정도를 우회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방송은 전혀 줄어들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6.15 정상회담 이후 21세기의 태양이신 김정일 장군님의 위대성을 세계가 인정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 아시아 등지에서 김정일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서신이 나날이 답지하고 있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내용의 방송이 항상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이상의 몇 가지 기준에서 변화가 없으면 북한은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있다고 단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현상적 변화가 북한의 인민들을 위한 변화인지를 확정할 수 있는 아무런 증거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더구나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정착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물적으로 입증할 만한 그 어떤 증거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 1, 2년 사이 북한이 외국과의 수교를 급속히 확대해가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외국과 수교관계를 확대하고 있는 것이 폐쇄사회에서 국제사회로 나오는 뚜렷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이다. 90년대 북한의 외교활동이 급격히 위축된 것은 당시 남한정부가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은 북방정책과 90년대 이후부터 남북 외교전에서 북한이 완전히 패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90년대 이후 북한은 국내사정으로 인해 현지 대사관을 운영할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수교국이 많아진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자국을 승인해주는 국가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또 국제사회에서 자국을 도와주는 나라가 많아진다는 뜻이며 외부지원을 다양하게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외교활동은 어떤 나라든 국가로서의 기본일 뿐이지, 이를 개혁개방으로 가는 뚜렷한 증거로 연결시킨다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북한은 어차피 수령중심의 사회인만큼 인권이니 의회민주주의니 하는 것은 우리와는 그 가치기준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좀 이상한 ‘다원주의’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주장은 아프리카의 어느 오지에 식인 풍습이 있으니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논리와 별 다를 게 없다. 또 인류가 지금까지 고귀한 가치로 인정해온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이성과 합리, 사랑과 도덕 같은 보편적인 가치가 북한 인민들에게는 적용될 필요가 없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필자는 북한이 당장 노동당 일당독재에서 양당 체제로, 전면적인 시장경제로 나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일당체제를 유지하더라도 노동당 내에서 입법권, 행정권, 검열권 등 삼권을 분립하고, 총비서 선거 등을 당원들의 자유투표를 통해 실시하면 일정수준의 민주주의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이러한 당내 민주화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4. 김정일식 개혁 개방의 태생적 한계 둘째, 김정일 체제가 개혁개방으로 간다면 어떤 형태로 갈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중국식 형태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전통적인 북중관계를 감안하면 김정일이 중국의 개방 경험을 많은 참고로 할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김정일이 상해 개방지구를 둘러보았으며, 2년 연속 중국을 방문하는 등 중국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있는 만큼 이 같은 추측은 당연하고 또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북한도 경제개혁을 시도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3년 제3차 7개년 경제발전계획의 실패를 인정하고 당 6기 21차 전체회의를 통해 ‘농업 제일주의’, ‘경공업 제일주의’, ‘무역 제일주의’를 채택한 적이 있었다. 이는 60년대부터 채택해온 중공업 우선, 경공업·농업 동시 발전노선을 대폭 조정한 것이었다. 당시 이러한 개혁방안을 내놓은 것은 북한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_ 만성적인 식량난과 생필품 부족, 외화빈곤 등 _ 을 해결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같은 노선도 역시 실패했고, 나진·선봉 경제특구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울러 농업에서 분조도급제를 실시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고, 최근에는 ‘현대적 과학기술’을 중시하여 첨단산업 육성을 통해 단번에 도약해보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개성공단 등의 계획이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개방은 이제 20년을 맞았다. 중국식 개방의 특징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행했으며, 점(點)에서 선(線)으로, 선에서 면(面)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개방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고 순차적으로 이행하는 데서 중국다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북한은 김정일이 스스로 고백했듯이 개방의 종심(縱心)이 짧다. 개성과 신의주, 원산과 청진으로 이어지는 동서 해안선을 따라 순차 개방을 하더라도 개방의 물결이 내륙으로 이어지는 데는 불과 몇 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개방경제가 성공하려면 시장경제질서에 빠른 시간 내에 적응할 수 있는 각종 정책적 개혁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고, 여기에 자본과 기술, 인력이 적절하게 배치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경제주체인 국가, 기업, 인민들의 사고방식이 여기에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 말하자면 타이밍이 적절하게 맞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방에 따른 부작용이 급속하게 확산될 수밖에 없다. 김정일이 개방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 이 같은 개방에 따른 부작용을 막는데 김정일이 쓸 수 있는 정책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국가독점자본주의 형태처럼 자본의 사용권과 처분권을 수령인 자신이 독점하고 주요 경제활동 인구에 대해 수령절대주의사상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즉 사상학습 시간과 생활총화 시간을 늘이고 그 강도를 높임으로써 개방에 따른 부작용을 막는 한편,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북한의 개방경제 형태는 수령독점자본주의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한 학계에서 북한의 개혁개방이 ‘개발독재’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개방으로 나아간 당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화국봉 체제 때 사상(紅)과 기술(專)의 혼용이라는 조정기를 거쳐 등소평에 의해 본격적인 개방의 길로 나아갔다. 또 이미 ‘개방파’라는 그룹이 현실적으로 존재했고, 이들의 개방에 대한 소신과 방법론이 일정수준 구축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모택동 일인숭배사상에서 이미 벗어나 있었다. 북한과 같은 수령절대주의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개방의 길로 나간 것이다. 반면 북한은 새로운 사상과 관점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3차에 걸친 국가경제발전계획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은 모든 경제논리가 사상논리에 의해 지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올해 초 처음 등장한 용어가 ‘새로운 관점, 새로운 높이’, 즉 ‘신사고’이다. 이는 언뜻 듣기에 ‘사상의 혁신’으로 들릴 수 있지만 수령절대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사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기반이자 북한이라는 나라를 작동시키는 기둥인 수령절대주의를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개방경제로 나가더라도 사상과 경제가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일은 없었다. 말하자면 준비된 개방의 길로 나간 것이다. 수령절대주의에 의거한 경제는 사회주의적 소유가 수령의 개인소유제로 전락한 데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북한은 1974년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한 이후 국가경제로부터 ‘당경제’를 떼어냈다. 당경제는 ‘당중앙의 경제’ 즉 김정일 개인경제를 말한다. 당경제에는 북한의 군수산업과 1급 공장 중에서도 노른자위가 모두 들어가 있다. 특히 외화벌이에 필요한 중요 기업소들이 집중되어 있다. 당경제는 생산설비가 좋을 뿐 아니라 생산조건도 우선적으로 보장된다. 평양근교에 있는 상원시멘트 공장은 서유럽에서 수입한 공장이다. 전국의 모든 시멘트공장이 전력부족과 생산조건이 보장되지 않아도 당경제에 속한 이 공장만은 정상적으로 가동한다. 국가(정부)는 당경제가 제기하는 요구를 해결해야 하는 의무만 지닌다. 당경제가 북한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 정도이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를 훨씬 상회한다. 군대경제는 북한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 정도다.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기반이 군(軍)인 만큼, 군경제를 자신의 직속 경제로 만들었다. 국가에서는 군경제에 대해 간섭하지 못하고 무조건 해결해주어야 한다. 당과 군대가 김정일 개인의 것이므로 당경제와 군대경제가 김정일 개인경제로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북한경제의 나머지 30% 정도를 가지고 인민경제를 운용해야 한다. 이는 지구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기형적인 구조이며, 인민경제가 파탄나지 않을 수 없는 ‘원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국가경제가 김정일 개인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경제 전반에 대해서도 그 운용권은 김정일 개인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모자라는 전력문제는 내각의 전력공업상과 국가계획위원장이 국가전반의 합리적인 경제운용 방식에 따라 처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장마다 전력공업성을 제치고 김정일에게 직접 제의서를 올리게 된다. 각자 사정이 급박하기 때문에 전력공업성의 비준을 기다리다가는 할당목표치를 수행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장뿐 아니라 특수권력기관들이 저마다 김정일에게 제의서를 올린다. 이렇게 되다보니 국가경제 운용과는 상관없이 누가 김정일에게 잘 부탁하느냐에 따라 전력이 공급된다. 북한을 하나의 회사로 보면 김정일이 ‘주식회사 북한’의 오너이자 전문경영인이자 총괄이사를 모두 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논리는 수령 개인의 정치논리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북한이 개방경제로 간다고 해도 수령절대주의 논리가 원천적으로 배제되지 않으면, 중국식 개방보다 훨씬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수행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김정일이 원하는 것처럼 ‘단기간 내 일대도약’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며, 이에 따라 우리가 던져볼 수 있는 근본적인 물음, ‘김정일은 과연 등소평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는 ‘상당히 어렵다’라는 대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상과 같은 수령절대주의 정치논리를 배제하더라도 북한이 본격적인 개혁개방으로 갈 수 있는 실질적인 환경과 조건은 갖추어져 있는가 하는 점이다. 북한은 3, 4년 전부터 공장과 기업의 기술혁신을 위하여 첨단 산업기술을 끌어들이고 나름대로 경제기술 간부를 육성해왔다. 1997년 중국에 15명의 관리를 연수생으로 파견한 이래 미국, 호주, 싱가포르, 태국, 벨기에, 헝가리 등지에 200여명을 보내 주로 시장경제와 회사관리 지식을 습득하도록 했다. 또 내각의 무역성에 ‘자본주의제도연구원’을 설립하여 ‘자본주의적 생존방식과 대기업 관리능력’을 연구하도록 했다. 북한체제가 자본주의에 적응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초보적인 수준으로 예상은 되지만 사람과 기술은 어느 정도 축적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자본을 어떻게 유치할 것이며, 공장기업소의 구체적인 운용방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은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나진·선봉경제특구, 대우가 출자한 임가공 위주의 남포공단, 그리고 지난해 현대와 개성공단을 합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진·선봉특구는 인프라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대다수 외국기업들이 외면했으며, 노동당이 일일이 개입하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남포공단은 대우의 사정이 좋지 않았다는 점도 있지만, 전력부족, 기업운용의 방식에서의 대립 등으로 현재 가동율은 매우 저조하며 언제쯤 제대로 가동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현재 북한이 경제개발의 ‘종자돈’으로 보고 있는 것은 대일 식민지 배상 청구자금이다. 이를 위한 협상이 지루하게 끌어져 왔으나 지금까지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북한은 100억 달러를 요구하고 있고 일본은 50억 달러 어치의 공장 등 현물 배상안을 내놓아, 대략 중간 정도인 75억 달러 상당에서 협의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요도호 납치사건, 일본 여중생 납치사건 등 양국 간에 걸린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 문제는 결국 북일 수교가 되어야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일 수교는 대북정책에 대한 미일 공조가 걸려 있는 만큼 단시간 내에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공화당 정부가 출범하면서 대북정책의 구체적인 그림이 나오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고, 미국 의회 내에서는 NMD(국가미사일방어체제) 정책을 둘러싸고 공화당과 민주당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전망이다. 따라서 북한의 대일 식민지 배상금 문제도 이와 연동되어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임에 틀림없다. 외자유치와 관련하여 그 다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IMF(국제통화기금), IBRD(세계은행) 등 국제금융의 차관을 도입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의 난제가 놓여있다. 이 차관을 받으려면 북한이 ‘불량국가’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문제, 미사일문제가 투명하게 해결되어야 한다. 그 러나 이것 역시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지난해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방북 했을 때 큰 테두리에서 미사일 개발 생산 판매를 포기하고 3년 간 매년 10억 달러씩의 물자와 맞바꾼다는 협상이 진척되기는 했다. 그러나 미국에 새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재협상에 돌입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난제는 설사 국제금융기구의 차관을 얻는다 하더라도 북한 내부에서 어려운 점이 있다. 국제금융을 지원 받으려면 국가의 모든 통계수치를 제시해야 한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북한이 대외적으로 비밀로 부쳐왔던 각종 데이터까지 모두 내놓아야 한다. 북한의 제2경제(군수산업)에 관련한 자료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또 이러한 자료들은 어떻게 만들어본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북한의 경제운용 방식을 국제금융기구의 지시대로 움직여 주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남한이 국제통화기금의 돈을 빌리면서 감독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랑인지 수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한은 'IMF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북한도 과연 ‘모범생’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 하면 국제금융기구는 꾸어준 돈을 상환 받기 위해서 자기네들의 프로그램에 충실해주기를 원한다. 이것을 거부하면 차관이 어렵다. 이 프로그램은 철저한 경제논리에 의거한다. 철저한 경제논리는 시장경제질서에 의거한 논리이다. 그렇게 될 경우 김정일 체제는 타격 받을 수밖에 없다. 북한도 물론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공장기업소는 외형상 지배인 체제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공장 당위원회 책임비서가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 공장 당위원회 책임비서는 수령의 대리인인 당일꾼이지 경제일꾼이 아니다. 그러나 김정일이 체제를 안전하게 유지하려면 자신에게 충실한 당일꾼을 관리자로 보내려 할 것이다. 이 역시 사상논리가 경제논리를 파먹어 들어가는 것이다. 요컨대 북한의 개혁개방이 성공하려면 본질적으로 수령절대주의 사상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이 점에서 김정일의 개혁개방은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김정일이 진정한 개혁개방으로 나가려 한다면 남한을 비롯한 외부에 의존해서 적당하게 보증을 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 또 사실상 불가능하다 - 스스로 돈을 꾸어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군사문제, 당내 민주적 제도 확립문제, 출신성분 토대에서의 탈피문제, 수령우상화 문제에 있어서 과감하게 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지금 김정일이 본격적인 개혁개방으로 나간다는 판단은 아직 섣부르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개혁개방인지, 그 개혁개방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면서 김정일의 행보를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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