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 정문기 회고록
(대한민국 학술원)

제27장 대마도 영유권 문제와 이승만박사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직후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장군은 일본국토의 범위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국토는 홋카이도, 혼슈, 시고쿠, 큐슈등 4개 도서로 국한하고 나머지 도서는 전부 UN에서 관장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신문에서 맥아더장군의 이런 성명을 읽고 대마도가 일본의 영역에서 빠져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순간 이 기회에 대마도를 일본에서 분리시켜 우리 한국에 환속시킬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대마도는 과거 우리나라에 속해 있던 섬으로서 우리나라에 환속시키든지 불연이면 최소한 일본에서 떼어 놓기만 해도 동양평화 유지상 중대한 문제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튿날부터 대마도가 우리나라에 예속됐던 이조실록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 무렵에 백남운씨가 이조실록을 병사, 경제 및 산업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물어보니 벌써 1/3정도가 분류돼 있었다. 이조실록에 대마도가 우리나라에 속해 있는 기록을 조사코자 한다는 이야기와 그 목적을 설명해 주었더니 단편적이나마 이조실록에 기록돼 있는 실적을 전부 발췌해 주었다.

나는 이조실록 외에도 지도 기타 역사적 문헌을 종합 정리하여 “대마도의 조선환속과 동양평화의 영속성 (Taimato must be restored to Korea for Perpetual Peace in Orient)”이란 제목의 우리 말과 영문으로된 소책자를 1945년10월 15일자로 출판했다. 그리고 대마도를 되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 소책자 내용은: 대마도는 원래 조선의 영토였다. 지리적으로나 대마도의 일본 발음상으로 보아 조선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마도는 경남 부산 절영도 상이말등대 끝에서 대마도 북단 탁미갑(한자발음)이란 곳까지가 26.5리인데 비해 일본 큐슈 左?縣 呼子港 북단에서 대마도 神崎燈基岬까지는 47리나 된다. 그리고 대마도를 일본인들이 ‘쓰시마’라고 부른다. 이 쓰시마의 ‘쓰’는 본래 ‘둘’이란 뜻에서 비롯된 말로서 ‘쓰시마’ 말로 ‘두섬’이란 뜻이다.

문헌상에는 고려 文宗 36년(1083년) 이후 공민왕 17년(1368년)까지 우리나라에 獻貢한 사실이 增補文獻에 나와 있다. 백제시대에도 왜인은 대마도를 외국으로 알고 대마도인들을 반朝鮮人이라 한 사실이 海行總載에 기록돼 있을 뿐 아니라 이조 제4대 새종대왕 9년(1427년) 7월17일에 병조판서 조말생이 대마도에 사는 대표 지도자에게 보낸 항복권고서 가운데 [對馬島 於慶尙道之鷄林(慶州) 本是我國土地載在文籍昭然司考…]라 日記돼 있다. 당시 대마도는 우리나라 경상도에 속한 섬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또 兩界彊域圖道기에도 [嶺南之對馬島]라고 기록돼 있다.

이 같은 문헌을 통해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영토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가 우리 민족의 도서생활을 장려하지 아니했던 까닭에 도서를 무시해 왔다. 이런 연유로 대마도는 일본인 해적들의 소굴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 민족은 대륙문화를 계승한 민족으로서 도서를 경시해 왔기도 했다. 이리하여 도서 생활을 싫어했다. 이와 반대로 일본 민족은 본국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피신차 대마도로 들어와 해적행위까지 감행하게 되어 대마도는 해적 소굴로 되고 말았다. 이들 해적들은 기회있을 때마다 우리나라 연해에 침입하여 해적행위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런 관계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들 해적들을 토벌하여 항복을 받는가 하면 직접 대마도에 들어가 소탕하기도 했다. 세종대왕 원년 (1419년) 6월17일에는 三軍都體察使 이종무가 병선 2백27척과 장병 17,285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토벌하여 배 229척을 나포하는 동시에 가옥 1,939채를 불살랐으며, 21명을 사로 잡았고 104명을 목베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또 그해 9월20일에는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대표(宗貞盛)가 사자를 보내와 외교문서로 우리나라에 항복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 세종은 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그 다음해 (1420년) 1월10일 宗貞盛은 다시 사자를 보내 다마도를 조선의 한州郡으로 지정하는 동시에 郡印을 사여해 주기를 신청해 왔다. 이리하여 1월 23일에 당시의 예조판서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하게 한 후 郡官에 대한 관례에 따라 官印을 사여했다.

그후에도 예속의 상태는 오래 계속돼 왔다. 海東諸國記에 따르면 세종 9년에도 多羅而羅가 우리나라에 와서 관직과 圖書를 받아갔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 역사가 편찬한 國史辭典에도 기록돼 있다. 이 사전에는 1555년에 우리나라에서 받아간 임명사령장이 게재돼 있다. 나는 이 같은 여러가지 사적을 열거하면서 대마도는 우리나라에 환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연이면 적어도 중립지대로 UN이 관할할 것을 주장했다.

이 문제를 구체화시키려고 이승만 박사를 비롯하여 김규식, 김구, 조소앙등 임정요인들을 만나는 동시에 국내 지도자인 송진우, 김성수, 백관수 제씨에게도 보고했다.
그러나 정권 쟁취에 열중해 있던 시절인지라 대마도 문제에는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그중에는 임정요인인 조소앙씨가 대찬성이었으나 이야기 끝에 북간도까지 찾아야 한다고 열을 올리기에 북간도는 김일성이 보고 찾아 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는 분이 아님을 짐작했다.

국내요인 중에서는 김성수씨를 비롯하여 김준연, 백관수 제씨와 임병직, 조정환, 장면 제씨가 협조해 주시었다. 백관수씨는 관계지도까지 입수해 보내 주시면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전화를 주시었다. 대마도가 우리나라에 속해 있었던 이조실록 조사결과를 손꼽아 기다리기도 한 분이다. 이승만박사에게는 외국에서 귀국하여 유숙했던 삼선교부근 별장에 찾아가 대마도 문제를 설명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정권쟁취 문제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이 느꼈다. 그후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 임병직 외무장관을 통하여 대마도 문제를 설명했다. 임병직씨는 이런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와야 한다고 하시면서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 뒤에는 아무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대마도 문제는 1.4후퇴 때까지 빛을 못보고 있다가 장면박사가 국무총리로 부임해왔기에 부산에서 만나 대마도 문제를 설명해 드렸다. 그때 나는 제주도 개발단장으로 제주도에 가 있었다. 장총리는 대마도 문제를 근청하고 있다가 나에게 화를 내면서 이런 중요한 문제를 뭐 이제야 이야기를 하느냐고 나무래는 어조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또 실망했다. 그래서 장총리보고 귀하는 오랫동안 미국주재 대사관 요직에 계시면서 이 대마도 문제를 한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나는 일개 수산학도라고 상기시켰다. 그제야 흥분을 죽이고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되겠느냐고 묻기에 지금이라도 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임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대답했더니 그 자리에서 외무장관을 비롯하여 위원 5명을 선정하였다.

나도 위원으로 지명됐다. “위원회에서 언제든지 찾으면 올 것입니다”하고 제주도 개발단으로 돌아갔다. 그후 아무 소식이 없었다. 3개월만에 장면 총리가 사임하고 말았다. 그후 일본이 독립된 후였다. 이승만박사가 느닷없이 [대마도는 우리 땅이다]라는 발언을 신문에 발표했다. 일본은 놀래 가지고 전문학자를 대마도에 파견하여 우리나라에 예속됐던 고적을 전부 말살기켰다. 이리하여 대마도 문제는 일단 휴식상태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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