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대마도는 우리땅)
(신동아 2001.8월호)

'경상도 경주땅 對馬島를 생각한다'

700년 전부터 우리 땅
萬戶벼슬 하사받은 대마도주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내막
이승만의 영유권 주장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이 일면서 한국은 마땅히 일본에 대항할 것이 없다. 오히려 일본은 그들의 교과서에서 독도를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독도에 대해서만 염려할 뿐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데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구한말 우리가 쇄국정책을 펼치는 사이 일본은 재빨리 대마도를 삼켜버렸다.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을 주장했는데…. 지금은 대마도 반환의 불씨를 지펴야 할 때다.

신영길 < 한국장서가협회 회장 >

대마도는 남북으로 72km, 동서로 16km인 길쭉한 모습의 두 개 섬이다. 총면적은 714km2에 이른다. 이 섬은 일본보다는 한국에 가깝다. 한국 남단에서는 53km, 일본 규슈(九州)에서는 147km 떨어져 있다. 대마도는 섬이라기보다는 ‘바다에 떠 있는 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특히 남섬은 375.5m의 원견산(遠見山)을 필두로, 328.6m의 홍엽산(紅葉山), 158.2m의 백악산(白嶽山) 등이 있어, 온 섬이 숲으로 덮인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산림이 많다 보니 농사는 해안지대 일부 계곡에서만 가능해 식량의 자급자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유사 이래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잡은 어물을 배에 싣고 한반도로 가, 물물교환하는 형태로 호구지책을 삼아 왔다. 대마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대마국은 구야(狗耶·가야)에서 강 건너 1000여 리에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인 대관(大官)은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副官)은 비노모리(卑奴毋離)라고 한다. 대마도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절해의 고도다. 넓이는 대략 400여 리에 이른다. 토지는 척박하고 산세는 험준하며, 깊은 숲이 우거져 있다. 길은 매우 좁아 짐승이나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다. 사람은 1000여 호가 마을을 이뤄 살고 있다. 그러나 좋은 농토가 없어, 해산물을 거둬 자활(自活)하고 있다. 식량은 선박을 이용해 한반도의 해안에서 구하고 있다.”


‘慶尙道에 속한 對馬島’

대마도는 고려 때부터 우리의 속령이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고려 문종 36년(1083)부터 공민왕 17년(1368) 사이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친 기록이 있다. ‘해행총재(海行摠載)’는 조선 초 신숙주(申叔舟) 등 17명의 관리가 통신사로 일본에 다니면서 남긴 기록물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 시대에 이미 일본에 사는 왜인(倭人)들은 대마도를 외국으로 보았고, 대마도 사람들은 스스로 반(半)조선인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세종 원년(1419년) 조선 정부는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했다. 그리고 세종 9년(1427) 7월17일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1370~1447) 명의로 항복하라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 문서에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된 곳이라, 본디 우리 영토다. 여러 문헌에도 그렇다고 되어 있다(對馬島 隸於慶尙道之鷄林 本是我國之地載 在文籍昭然可考)”고 적었다. ‘양계강역도(兩界疆域圖)’ 기서(記書)에도 “영남지대마도(嶺南之對馬島·대마도는 영남에 속한다)”라는 표현이 있으니 대마도는 우리 영토였음이 분명하다.

세종 24년(1442) 신숙주(1417~1475)는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 대마도에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성종 2년(1471)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했는데, 이는 15세기의 대마도를 연구하는 기본 문헌 중의 하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대마도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군(郡)은 8개이고 사람은 모두 바닷가 포구에서 살고 있다. 대마도의 포구는 82개나 된다. 남북은 3일이면 다 돌아볼 수 있고 동서 횡단은 하루나 반나절이면 족하다. 바다와 접한 사면은 모두 돌산이고 땅은 척박하다. 백성은 가난해서 소금을 굽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해산물을 잡아, 팔아서 살고 있다. 종(宗)씨가 대대로 도주(島主)가 되는데, 풍속은 신을 숭상하여 집집마다 소찬(素饌)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대마도는 해동 여러 섬의 요충지이므로 조선을 왕래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본도(대마도)의 거주자에 한하고 도주의 문인[渡航證]을 받아야 조선에 올 수 있게 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대마도는 원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재위 1419~1450년)의 ‘유대마도서(諭對馬島書)’에도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에 예속된 본시 우리 영토라는 내용이 있다.

대마도 왜구들의 해적행위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인 숙종 45년(1719), 신유한(申維翰)은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기록을 담당하는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와 ‘해유록(海遊錄)’을 남겼다. ‘해유록’은 여러 통신사의 일본 기행문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꼽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대마도 부분은 다음과 같다.

“대마주(對馬州)의 별명은 방진(芳津)이라고도 한다. 토지는 척박해서 채 백물(百物·100백 가지 産物)도 생산되지 않는다. 산에는 밭이 없고 들에는 도랑이 없고, 터 안에는 채전(菜田·채소밭)이 없다. 오로지 고기를 잡고 해초를 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대마도인들은 서쪽으로는 (조선의) 초량(草梁·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모이고, 북으로는 일본의 오사카(大阪)와 당시 왜국의 수도인 나라(奈良)에 통한다. 동으로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장사하니, 바다 가운데의 한 도회(都會)와 같다.”

이때 대마주인들은 지금의 중국 강소성(江蘇省)의 소주(蘇州) 사람이나 절강성(浙江省)의 항주(杭州)인, 복건성(福建省) 사람, 그리고 당시에는 ‘류큐(琉球)’로 불렀던 지금의 오키나와(沖繩)인, 또 아란타(阿蘭陀) 사람들과 해상교역을 벌였다. 그로 인해 대마도에는 주기(珠璣·보석)와 서각(犀角·무소 뿔), 짐승의 이빨가루, 후추, 사탕, 소목(蘇木·한약재), 비단 등이 폭주하였다. 대마주인들은 이러한 물품을 전매하여 번 돈으로 의복과 식량을 마련하고 생활필수품도 구입했다. 그러나 도주의 통제력이 약해지면, 대마도인들은 필사적인 해적행위를 하는 왜구(倭寇)로 표변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대마도는 고려 말 이래 왜구의 본거지였다. 대마도 왜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에 처음 나온다. 신라본기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7년(408) 춘 2월조(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왜인이 대마도에 영(營)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를 습격하려고 꾀하고 있다.” 신라본기에서 처음 나온 왜구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서도 빈번히 나온다. 그만큼 한반도와 대마도는 밀접했던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교량

대마도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선사시대 부터 한반도 동남쪽 해안에서 실종된 물건은 해류를 따라 자연스럽게 대마도로 흘러들었다. 남해를 흐르는 해류가 한반도 동남쪽과 대마도를 이어준 ‘다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해류 때문에 한반도의 문화는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논농사(稻作)는 야요이(彌生)시대 한반도에서 전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도작은 단순한 기술만으로는 전파되지 않는다. 도작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야만 전해질 수가 있다. 도작 문화가 전파됐다는 것은 고대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대마도를 거쳐 규슈 지역으로 집단 이주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대마도는 고대 이래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이어주는 중계지였다.

삼국 통일을 달성해 가던 시절 신라는 왜에 대해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대마도에 있는 천연 요새 가네다성(金田城)이다. 서기 663년 백제 부흥군을 후원하려고 온 일본군이 백강전(白江戰·백마강 전투)에서 전멸했다. 그러자 일본은 665년 대마(對馬)와 이키(壹岐)·규슈·봉화(烽火)에 변방 수비대인 ‘방인(防人)’을 두었다. 그리고 이듬해 백제에서 망명해온 달솔(達率·백제의 벼슬 이름) 억례복류(憶禮福留)와 사비복부(四比福夫)를 규슈 대재부(大宰府)로 파견해, 대야(大野)와 연(椽)에 두 개의 성을 쌓게 했다.

그리고 2년 후 대마도 천해만(淺海灣)에 가네다성을 쌓았다. 가네다성은 백제산성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졌다. 한반도를 향하고 있는 표고(標高) 274m의 바위산을 이용해 지어진 이 산성은 그야말로 천연 요새다. 가네다성이 완성됨으로써 대마도는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한 최전방 방어선이 되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 문종 3년(1059) 대마도로 표류해온 고려인을 고려로 압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은 그 후에도 거듭된다. 문종 36년(1082)에는 대마도에서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공민왕 때 萬戶벼슬 내려

고려와 대마도가 정식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공민왕 17년(1368)이다. 이때 대마도주는 고려로부터 만호(萬戶) 벼슬을 받은 처지에서 사신을 파견했고, 고려는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대마도로 파견하였다. 같은해 11월 대마도 만호 숭종경(崇宗慶)이 보낸 사신이 고려에 왔기에 고려 정부는 쌀 1000석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주는 고려의 지방 무관직인 만호 벼슬을 받았고 쌀까지 얻어가는 처지였던 것이다.

일본 헤이안(平安)시대부터 가마쿠라(鎌倉)시대 초까지 대마도의 실권자는 아비류(阿比留) 집안이었는데, 1246년부터는 종(宗·처음에는 惟宗) 집안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니까 고려 문종으로부터 만호 벼슬을 받은 이는 아비류 집안이고, 공민왕으로부터 만호 직함을 받은 것은 종(宗) 집안인 것이다.

고려 말부터 대마도와 일본 근처에 있는 이키시마(壹岐島)·송포(松浦) 등지에서 발호한 왜구가 한반도 남해안을 약탈하고 때로는 육지 깊숙이 침입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는 대마도주 종(宗)씨와 규슈의 탐제(探題) 이마가와(今川)·오우치(大內) 등 호족에게 사신을 보내, 왜구를 금압(禁壓)하고 고려와는 평화적으로 교역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 말 왜구가 횡행하게 된 근본 원인은 1218년과 1274년 두 차례에 걸친 여원군(麗元軍)의 일본 원정이 있은 후, 일본과 고려·중국의 통교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은 남북조(南北朝)의 쟁란(爭亂)에 빠져 있어, 규슈와 대마도 등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했다. 이곳에 사는 변방민들은 부족한 주·부식을 획득하기 위해 왜구로 나선 것이다. 더욱이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정성(貞盛)이 집권했는데 종정성은 너무 어려 왜구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러한 왜구의 발호에 대해 고려 조정과 조선 조정은 회유와 무력 응징으로 대응했다. 조선 왕조는 왜구 근절에 훨씬 능동적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은 ‘이선치선이무제도(以善治善以武制盜·착하게 행동하면 좋게 다스리고, 도적질을 하면 무력으로 다스린다)’의 대책을 내놓았다. 조선 태조 5년(1396) 대마도인 구륙(六)이 선박 60척과 왜인 수백 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조선 조정은 구륙에게 ‘선략장군용양순위사행사직 겸 해도관민만호(宣略將軍龍巡衛司行司直兼海道管民萬戶)의 관직을 제수했다. 이듬해 구륙이 등륙(藤六)으로 이름을 바꾸자, 다시 종4품인 ‘선략장군행중랑장(宣略將軍行中郞將)’이란 관직을 제수했다.

태조 6년(1397)에 왜구의 한 우두머리인 임온(林溫)이 병선 24척을 이끌고 투항하자,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제수했다. 이 일을 계기로 망사문(望沙門)·곤시문(昆時門)·사문오라(沙門吾羅)·삼보라평(三寶羅平)·현준(玄准) 등 대마도에 거주하는 많은 왜구 두목이 투항해 관직을 받았다. 이러한 투항자 중에는 평원해(平原海)·등차랑(藤次郞)·간지사야문(看智沙也文)처럼 의술이나 조선술·제련술이 뛰어난 자도 있었다.


이종무의 기해東征으로 屬領化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재위 1401~1418년)은 왜구에 대해 강경책을 펼쳤다. 그는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했으나, 군사권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1419) 6월17일,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己亥東征]. 이에 따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 1360~1425)가 병선 227척과 장병 1만7385명을 인솔해,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의 천해만과 오자키(尾崎)·후나고시(船越)·진나(仁位)를 공격했다.

이종무 군을 태운 선단이 대마도에 접근했을 때, 대마도인들은 자신들의 왜구선단이 약탈품을 싣고 돌아오는 줄 알고, 영접하러 나왔다고 한다. 대마도에 상륙한 이종무 군은 적선 129척을 나포하고 왜구가 사는 집 1939호를 불질러 태워버렸다. 생포한 왜구는 12명이었고 참수(斬首)한 왜구는 114명이었다. 내친 김에 이종무 군은 왜구들이 심어 놓은 곡식도 베어 버려, 요행히 산 속으로 도망친 자들도 굶게 만들었다.

이종무 군이 감행한 기해동정(己亥東征)으로 인해 대마도주와 대마도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은 대마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오는 왜인들에 게 교역을 허가했으나, 대마도인들의 도래는 허용치 않았다. 그러자 그해 9월20일에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이 항복[降]한다는 외교문서를 든 사자를 보내왔으나, 조선은 응답하지도 않았다. 세종 2년(1420) 윤정월 10일 대마도주는 다시 사자를 보내, “대마도는 조선을 주군으로 하며, 그 주명(州名)을 지정받고자 한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서 주군인(州郡印)을 사여(賜與)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동년 동월 23일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외무장관 일을 맡는 예조판서 허조(許稠, 1369~1439)를 통해 대마도를 다시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그 군관에 대한 관례대로 관인(官印)을 사여하였다. 그 후에도 속령(屬領) 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세종 25년(1443)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이 체결되어 대마도주는 1년에 50척의 세견선(歲遣船)과 200석의 세사미(歲賜米)를 특전으로 받게 되었다. 세견선 외에도 특송선(特送船)이란 명목으로 제한 없이 무역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중종 5년(1510)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이 왜란은 부산첨사 이우회(李友會)가 부산에 거주하는 왜인의 수를 제한하고, 웅천(熊川)현감은 왜인이 식리(殖利)하는 것을 금하자, 이에 자극받은 왜인들이 대마도 도주 종성순(宗盛順)의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부산첨사를 죽이고 웅천을 점령한 사건이다. 이에 조선은 왜인을 평정하고 삼포를 폐쇄하자 왜인들은 대마도로 도주하였다.

삼포는 중종 7년(1512)에 임신조약(壬申條約)으로 다시 열렸는데, 이때 세견선과 하사미를 반으로 줄였다. 중종 39년(1544)에는 사량왜변(蛇梁倭變)이 일어나 교역이 일시 단절되었다. 그러다 명종 2년(1547) 정미조약(丁未條約)을 맺어, 이미 반으로 줄어든 세견선 25척을 대선(大船) 9척, 중선(中船) 8척, 소선(小船) 8척으로 한다고 못박아 한층 엄격히 통제했다.



‘대국휼소국’의 관계

이현종(李鉉淙)이 편찬한 ‘조선 전기 대일교섭사’(1964년 한국연구원 간행)에 따르면 대마도의 유력자 중에는 조선의 관직을 받은 ‘수직왜인(受職倭人)’과 특별히 세견선이나 세사미를 배당받는 자들이 있었다. 이키시마(壹岐島)에 있는 수직왜인은 3명인데, 대마도의 수직왜인은 17명이나 된다. 대마도인들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받은 교지(敎旨)를 대개 ‘고신(告身)’이라고 한다. 대마도에서는 오자키의 소다(早田) 집안, 지다류(志多留)의 다게다(武田) 집안, 이나(伊奈)의 쇼야(小野) 집안에서 이러한 고신이 전해 오고 있다.

고신을 받은 대마도인들은 1년에 한 번 조선에 도래하여, 관직에 상당한 예우를 받고 특별한 이득을 얻어갔다. 조선 초기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세약선(歲約船)·수직인선(受職人船)·수국서인선(受國書人船)의 수가 204척이었는데, 그 중에서 대마도 배는 절반에 육박하는 124척이었다.

그럭저럭 유지되던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는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단절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침략군은 대마도의 대포(大浦)에 집결한 후 조선을 침공하였다.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자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는 대마도의 생사가 걸린 조선과의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에 대해 조선은 부정적이었으나, 종의지는 광해군 원년(1609) 기유조약(己酉條約)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 사이에서 줄타기 교린 우호 관계에 들어갔다. 대마도인들은 초량(草梁·부산)에 새로 왜관을 설치해, 문화·경제적 이윤을 얻게 되었다.

대마도 고문서 목록 서문에 따르면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는 표면상으로는 조선의 교린 정책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수직왜인은 조선 정부로부터 물품을 받는 처지였으므로 대마도는 ‘진상(進上)’, 조선은 ‘회사(回賜)’하는 것이 교류의 기본 형태였다. 조선과 대마도는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조선으로 보면 조선이 대마도를 ‘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규휼하는 것)’ 또는 ‘조공회사(朝貢回賜)’하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조선민족은 대륙문화의 계승자로서 대체로 도서(島嶼)를 경시하였다. 조선인들은 대마도를 척박한 섬으로만 보았다. 이러한 땅은 반역음모지(叛逆陰謀地)가 될 염려가 있어 거주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와 반대로 일본 본토에서는 범법자와 범죄자가 대마도로 흘러들었다. 이들로 인해 대마도는 해적 소굴이 되었다. 이들이 조선의 해안지대를 수시로 침범해 약탈하자 조선은 강부(降附·항복하여 굴복하다)를 권고하기도 하고, 토벌(討伐)을 수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요구
1859년 3월31일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으로 개항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유도에 의해 국내 정세가 크게 변했다. 이에 따라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도 일변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대마도가 대행하고 있던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직접 관장하려 했다. 1868년 1월3일 도쿠가와 막부의 조번체제(朝藩體制)가 붕괴하고 왕정복고·왕위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로써 웅번(雄藩)들은 판권봉환(版權奉還·왕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각번의 영주들의 영역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에 들어가, 도쿠가와 막부의 제15대 장군인 도쿠가와 시게노부(德川慶喜, 1837~1913년)도 정권을 개혁 조정에 반환하게 되었다. 1871년 8월29일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막부 시절의 번을 없애고 근대적 지방 행정기관인 현을 두는 것)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외번부용(外藩附庸)의 대마도주 종의달(宗義達, 1847~1902)도 대마도를 판적봉환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종의달은 조신(朝臣)과 근위소장(近衛小將)이라 칭하고 이스하라(嚴原) 번지사(藩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1877년 대마도는 나가사키현에 편입되면서, 현에 속한 지방 행정지로 격하되었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대마도주가 고려의 만호 벼슬을 가진 사신(使臣)으로 파견된 이래 대마도는 600여 년간 조선과 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 또는 조공회사(朝貢回賜)의 관계를 맺어온 속방(屬邦)이었다. 그러다 일본 신제국주의의 마수에 걸려 일본에 귀속되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1863년 12월13일 즉위한 고종을 대신해 대원군이 섭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1865년부터 조선은 임진왜란 때 타버린 경복궁을 중수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 전해인 1864년 4월22일에는 전국 서원의 향현사(鄕賢祠·향교와 사당)를 철폐하고, 척사 조치를 내리는 등 쇄국봉건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와중인 1868년 12월19일, 일본 정부는 일본이 왕정체제로 복귀해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조선에 통고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 조정은 서계(書契·조선과 일본을 왕래하던 문서) 문구가 불손하다며 접수를 거절하였다. 그러다 1875년 8월20일 강화도에서 운양호사건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876년 2월2일 조선은 일본과 치욕적인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체결하였다.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임오군란→갑신정변→청일전쟁→명성황후 시해→노일전쟁→을사늑결(을사보호조약)→경술병탄(한일합방)→3·1 독립선언→1945년 8월15일 광복으로 숨가쁜 현대사가 이어진다. 이런 현대사 속에 우리는 대마도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광복 후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라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초대 부산수산대학장을 역임한 정문기(鄭文基, 1898~1996) 박사다. 정박사는 ‘대마도의 조선 환속과 동양평화의 영속성’이라는 논문에서 대마도를 조선으로 환속하는 것이 동양평화의 영속성을 기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미 군정 시기인 1948년 2월17일에 열린 제204차 입법의원 본회의에서 입법의원 허간용(許侃龍·서북도 관선의원) 외 62명은 대마도를 조선영토로 복귀시킬 것을 대일강화조약에 넣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정부를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 폭주로 연기되다 회기가 종결됨으로써 실현을 보지 못했다.



대마도 반환 불씨 지펴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18일 전격적으로 ‘대마도 반환요구’를 발표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 이하 온 내각이 발칵 뒤집히며 반발하였다. 그런데도 이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9월9일 재차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9년 1월6일 일본에 대해 배상을 요구한 이대통령은 이틀 후인 1월8일, 대일강화회의 참가계획을 발표하면서 또 한 번 대마도 반환을 주장했다. 국회에서도 앞으로 열릴 대일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것을 촉구하는 건의안이 제출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요시다 총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이대통령의 요구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를 전후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방해되는 언사로 받아들이고 이대통령의 발언을 제지했다. 그 후 이대통령은 공식적으로나 문서상으로는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역설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역사적인 근거를 깔고 있는 올바른 발언이었다.

대마도는 치욕의 역사 속에서도 대의를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한 면암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혼이 깃들인 섬이다. 올해 4월 부산 부경대학교(구 부산수산대) 강남주 총장은 대마도에서 입시설명회를 갖고 “대마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150km쯤 떨어져 있는 일본보다는 53km 만 떨어져 있는 한국을 더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정서가 깔려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강총장이 대마도에서 입시 설명회를 갖고 이러한 발언을 한 것은 깊이 음미해볼 만한 일이다.

구한말 국제정세에 우둔했던 우리는 쇄국정책을 선택해, 대마도가 일본의 억압 속에 일본 영토로 귀속된 사실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기록을 토대로 당당히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따져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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