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연중기획] 친일인명사전 우리가 해낸다 (1)

CF감독과 도서관 사서를 잇는 힘


손병관/김영균 기자 redguard@ohmynews.com

지난해 12월18일 학교법인 광신학원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광신고 교정에 세워진 재단설립자 박흥식의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이 동상은 1996년 재단이 박 씨를 기념해서 세운 것이나 50여 년 전 반민특위에 의해 '반민족행위자 1호'로 체포됐던 친일 기업인의 동상이 고등학교 교정에 들어섰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는 논란을 빚어왔다.

철거를 앞둔 '박흥식 동상'의 존재는 반드시 단죄되었어야 할 친일세력의 잔재들이 해방후 한국사회를 지배해 왔다는 아픈 과거와 함께 이들의 역사적 청산 없이는 21세기 새로운 민족사의 창조도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2002년은 일본과의 월드컵 공동개최를 통해 새로운 한일 관계를 고민하는 해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 '친일파의 역사적 청산' 과제 해결의 첫발을 디디는 해이기도 하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91년 2월 발족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숙원사업이었으나 지난 11년간 재정적 어려움과 친일파 후손들의 반발 속에 올해에야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하게 됐다. 그러나 편찬작업이 진행될수록 청산되지 못한 친일세력들의 조직적인 방해가 이뤄질 것은 자명한 일.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정부 예산 지원이 국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은 이를 웅변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제2의 반민특위'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이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 속에 굳건히 이뤄질 수 있도록 편찬과정을 지속적으로 보도하기로 했다. 이 기획은 <친일인명사전, 우리가 해낸다>는 연중 캠페인으로 진행된다. <오마이뉴스>는 민족문제연구소(www.banmin.or.kr)와 공동으로 추진되는 이 캠페인이 해방 이후 오욕으로 점철된 역사를 바로세우는 '첫 단추 끼우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오늘은 그 첫번째로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새해 희망을 옮겨보았다.


"답답한 현실, 친일파 청산 실패와 맞닿아있어"
- CF 감독 지덕엽

<감독 지덕엽 씨> ⓒ 오마이뉴스 손병관

"세상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야 되겠소만 그런 대로 한세상 이러구러 살아가고..."

작년 늦가을 소리 없이 개봉돼 보는 이들에게 짙은 여운을 안겨줬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귀에 익숙한 록음악 선율 한 자락을 복원시켰다. 그룹 송골매의 '세상만사'.

송골매를 흉내내던, 영화 속의 '와키 밴드'는 노래가사처럼 세상일이 뜻대로 안돼 무대를 찾아 떠도는 3류 밴드가 되지만, 정작 '세상만사'의 작사작곡자 지덕엽(46)은 '잘 나가는 CF 감독'이 됐다. 송골매가 9집 앨범까지 내며 80년대에 힘차게 날아오르는 동안 70년대의 활주로와 송골매 1기에서 활동했던 지덕엽 감독은 자의반 타의반 좋아하던 음악에서 손을 떼게 된다.

"80년 군입대로 그룹 활동을 접게 되면서 자연히 음악과는 멀어지게 됐습니다. 광고회사에 입사한 것이 1984년이니 벌써 광고 일에만 18년을 매달린 셈이죠."

지 감독이 만드는 TV CF는 한해 평균 30여 편. 이중 'LG텔레콤 ez-I 수화 편'은 CF '2000 대한민국 광고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또래들보다는 많이 가져간다"는 그는 지난 8년간 '민족문제연구소'의 후원회원이었다. 그가 연구소 후원회원이 되기로 한 데에는 8년 전 우연히 접한 한 권의 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내놓은 '친일파 99인'이라는 책을 우연히 읽게 됐죠. 먹고사는 문제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는데, 어린 시절 교과서 등을 통해 위인이라고 생각했던 분들이 상당히 문제가 많았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어요. 야, 이거 정말 잘못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연구소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게 됐습니다."

지 감독이 '친일파 99인'을 읽은 후 가장 크게 이미지가 달라진 사람은 김활란과 이갑성.

"50여 년 간 이화여대에 몸담고 있으면서 한국 여성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알려진 김활란 박사님이 알고보니 우리 여성들을 종군 위안부로 내모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선 '용서할 수 없는 과거'가 있더군요. 지금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분을 기념하는 상을 제정한다고 하는데, 이해가 안가요. 그리고 또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생존자라고, 돌아가실 때까지 3.1절 때마다 TV에 나와서 만세삼창을 선창하던 이갑성 씨는 3.1 운동 이후 상해를 드나들며 일본의 밀정을 한 전력이 드러나서 몹시 실망했습니다."

94년부터 "재정적으로 어려운 연구소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나라도 몇 푼 보태야겠다"는 생각으로 1년에 5만원씩 꼬박꼬박 후원금을 내고 있지만, 친일파 문제에 대한 이 같은 관심을 밖으로 드러내는 게 쉽지가 않다.

"일단 제가 하는 일과 안 어울리는 게 사실이고,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성향도 그런 편입니다. 간혹 이런 얘기 나오면 어떤 사람은 이상한 눈으로 보고... '친일파 청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흔치가 않더군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야심적으로 시작한 '친일인명사전' 작업에 대해서도 그는 걱정을 감추지 않는다.

"적잖은 돈이 들 텐데... 쉽지 않은 직업이죠. 돈도 돈이지만, 우리나라 기득권 세력들이 친일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성공할 지 걱정이 많아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기자가 새해 소망을 물었지만, 지 감독은 대신 쓴웃음을 짓는다.

"이 사회는 제대로 뭐하나 하려고 해도 안 되는구나 하는 느낌 많이 받잖아요? 하다못해 직장 생활을 해도 일 열심히 하는 놈보다는 줄 잘 서서 윗사람 눈에 드는 놈이 출세하게 되고 바르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잘려나가고... 이런 현실의 뿌리가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안된 과거와 연결되어 있지 않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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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 실패는 한국사회의 가장 큰 오류"
- '인명사전' 발기인 김연희 씨

'친일인명사전' 발기인으로 참가한 김연희 씨 ⓒ 오마이뉴스 김영균

"어릴 적 배웠던 아주 단순한 논리가 있죠.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그러나 커 가면서, 이 단순하고 평범한 진리가 '왜 안 지켜지나'하는 것이 가장 이상했습니다. 친일파 문제도 그렇죠. 역사를 배신했던 사람들은 왜 현대까지 유유자적하며 사나... 이런 현실에 화가 났습니다."

부산 동주대학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김연희(24) 씨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을 추진중인 '친일인명사전' 발기인으로 참가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인명사전' 얘기를 봤습니다. 서명을 하고 나니 연구소에서 연락을 주시더군요. 주저 없이 발기인에 참여했습니다. 난해한 역사 같은 것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일상 속에서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 수준은 되고 싶었습니다."

'인명사전' 발기인으로 참가하게 된 동기를 짤막하게 답했지만, 사실 김 씨는 학생 시절부터 역사과목을 특히 좋아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온 '역사 매니아'다.

"중학교 때부터 역사 과목을 좋아했습니다. 연도와 사건을 외우는 건 싫었지만, 나름대로 우리 사회의 흐름을 짚어낸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죠. 중학교 때는 친구와 '친일파' 문제로 크게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김 씨는 큰 눈과 발그레한 볼을 가진, 락 음악과 윤도현 밴드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가씨다.

"우리나라는 참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잖아요. 그 중에서도 특히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은 게 가장 큰 오류인 것 같아요. 친일파 때문에 오늘날의 경제파탄, 미국 종속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나... 정치가 소위 '개판'인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지..."

비록 자신이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지만, 김 씨는 아직도 사회에 대해 스스로 부족하고 미안함을 느낀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인명사전 등의 일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지만, 솔직히 좀 이기적이고 아직은 제 미래에 투자하고 싶은 욕심이 많아요. 그래서 생각만큼 많이 못하고 있죠. 특히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열심히 사는 분들에게 부끄러워요... 이번에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한다는데, 왜 좀더 많이 못 주죠?"

딱딱한 논쟁을 싫어하는 요즘 젊은 세대 분위기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쉽게 이런 문제를 꺼내지 못한다"는 김 씨는 '인명사전'이 발간될 때까지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큰 도움은 안되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하고 싶습니다. 책이 나오면, 그 책을 사서 주변에도 알려야겠죠. 부족하지만,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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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도망간다고 생각하는 사람 없다"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방학진



46세의 CF감독과 24세의 도서관 사서 아가씨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계기로 '제2 반민특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 오마이뉴스 손병관

위'에 발기인으로 동참했다. 그 두 사람이 같은 뜻을 가지게 된 것은 '친일파 청산'이라는 역사적 대의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편찬사업을 주도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젊은 일꾼들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자원 봉사할 때부터 일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거듭 밝혔지만, 결혼 전까지는 주변에서도 '귀여운 자원봉사자', '기특한 청년'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결혼 후에도 흔들리지 않으니 이제 좀 인정해주는군요. '이 친구, 도망가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방학진(32) 씨가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을 주도하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92년. 올해로 만 10년째를 맞이한 그가 작년 11월 결혼한 것에 기뻐하는 사람이 많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결혼한 후에도 '딴 생각' 없이 연구소 일에 전념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학교 교사인 아내의 내조도 그가 연구소 실무에 전념할 수 있는 든든한 원동력이다.

"초창기 멤버들이 몇 분 남아 있지만, 지난 10년간 바뀐 사람이 30명이 넘습니다. 아무래도 경제적인 요인이 크죠. 성격이 낙천적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시련은 없었어요."

-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요?
"크게 반대 안하고, 지속적으로 반대하셨죠. 월급 가져올 때마다...(웃음) 그래도 제 생각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셨어요. 단지 우리 아들 다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1500여 회원들의 후원금을 모아 힘겹게 살림을 해야 하는 그의 어깨는 여전히 무겁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연구소 활동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회원 수도 100∼200명 선에 머물던 시절들을 떠올린다.

"재정적인 어려움 이외에 다른 어려움이요? 재정만 탄탄하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겠죠. 연구소가 가난하면 연구원들에게도 전망을 줄 수가 없어요. 결국 유일한 방법은 뜻을 공유하는 회원들의 수를 늘리는 것이겠죠."

재정의 안정화라는 선결 과제와 함께 올해부터 그에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다. 약 30억원의 예산을 투입, 3년 이내에 완간한다는 목표를 잡고 있으나 실행 여부는 미지수.

방 국장은 아직까지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친일파 청산' 작업에 대해 "젊은 층들이 친일파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이것을 제대로 설명하고 알려낼 수 있는 일손들이 부족했다"고 자성한다.

"일에 전념하기 위해 결혼까지 미루려고 했다가 기회가 닿아 제때 결혼하게 됐다"는 방 국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연구소 10년 역사에서 가장 혜택받은 사람이죠. 짧으면 두 달, 길면 2∼3년간 연구소 일을 도와준 분들의 희생 속에 제가 남을 수 있었으니까요"라며 예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2002.1.1
오마이뉴스/사회
(http://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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